시인에게 쓴 편지

수필

by morgen


시인님들 보셔요!

참 어이없는 날입니다. 원래 짜증스럽긴 했지만 오늘은 황당하기까지 하네요. 눈부신 햇빛, 촉촉한 보슬비, 성난 소나기, 그래도 또 남았어요. 놀랍게도 화다다닥, 쏟아지는 우박까지, 하루에 이 모든 것들이 순간순간 바뀌니 어이없는 날씨 아닌가요?

오래전부터 시인에게 편지를 쓰고싶었답니다.
글쓰는 분에게 쓰는 편지라 책잡힐까 무서워 망설이다가 오늘 이 화끈한 날씨에 힘입어 나도 한번 객기를 부려보는 게지요.
시인님!
인터넷 동네를 유유히 돌아다니다가 김 용택님의 시를 발견했답니다.

<꽃처럼 웃을 날 있겠지요>

작년에 피었던 꽃
올해도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 피어 새롭습니다
작년에 꽃 피었을 때 서럽더니
올해 그 자리 거기 저렇게
꽃이 피어나니
다시 또 서럽고 눈물 납니다
이렇게 거기 그 자리 피어나는 꽃
눈물로 서서
바라보는 것은
꽃 피는 그 자리 거기
당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없이 꽃 핀들
지금 이 꽃은 꽃이 아니라
서러움과 눈물입니다

작년에 피던 꽃
올해도 거기 그 자리 그렇게
꽃 피었으니
내년에도 꽃 피어나겠지요
내년에도 꽃 피면
내후년, 내내후년에도
꽃 피어 만발할테니
거기 그 자리 꽃 피면
언젠가 당신 거기 서서
꽃처럼 웃을 날 보겠지요
꽃같이 웃을 날 있겠지요

시인님.
이 시의 감상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이론은 일단 무시하기로 해요. 내가 잡아낸건 딱 요 구절 뿐이니까요. "작년에 피었던 꽃, 올해도 거기 그 자리에 그렇게 꽃 피었으니, 내년에도 꽃 피어나겠지요, 내후년, 내내후년에도..." 시 전체를 읽으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오늘 저는 이 문장을 붓 삼아 휘둘러 커다란 화폭에 아주 구체적인 풍경화를 하나 그렸거든요. 그냥 그런대로 봐주세요.
"작년에 피었던 꽃, 올해도 거기 그 자리에 그렇게 꽃 피었으니, 내년에도 꽃 피어나겠지요, 내후년, 내내후년에도~"
저는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나만 아는 곳에 커다란 보물이라도 감춰둔 기분이에요.
누구에게나 <거기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있겠지요? 어려서 살던 곳에 가면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계신 노인들, 사춘기의 몸살을 앓던 제2의 고향에 가면, 아직도 교정에 버티고 서있는 학교 운동장의 등나무, 모교에서 교편을잡고 붙박이로 남아있는 친구, 고향의 버스 터미널 옆 약국에서 언제나 똑같은 미소로 반가이 맞아주는 친구.
그대로 흐르고 있는 강물, 그 곁의 모래밭의 수많은 모래알들, 거기 꼭꼭 심어두고 온 숱한 사연들도 아직 모래속에 그대로 파묻혀 있겠지요.
아직도 푸르게 남아있는 산, 나무, 공원...
멀리멀리 떠돌아 다니다가 잊었던 그 곳에 문득 찾아가면 아직도 그대로 남아 그곳을 지키며 나를 맞아주는 많은 것들. 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지라도 내게 낯익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내가 버리고 떠난 많은 것들이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뭉클하고 눈물나는 고마움인가요!
아, 잠깐, 잠깐만 참으세요, 시인님. 난 당신이 무슨 딴죽을 걸려는지 다 알아요. 고향에 찾아가면, 낯선 사람들이 나를 마치 이방인 보듯 대하는 그쓸쓸함, 나그네로 찾아간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 이상으로 더욱 더 쓸쓸한 고향에서의 이방인 체감, 이런 것도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지요?
그 말은 그대로 덮어두세요. 오늘은, 모든것들이 제자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인정해주세요.
언제나 마음 내키면 발길이 향하는 곳, 거기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 사람들, 장소들. 아, 시간도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인님.
난 시인님이 무명시절에 썼던 시들을 너무너무 좋아해요(여기서 "좋아해요"는 영문법의 현재분사형입니다. 주어는 "무명시절에 썼던 시"이고요. "무명시절"에 밑줄 그으세요). 연필에 침 발라가며 공책에 베껴 쓰고, 소리를 높여도보고 낮춰도보며, 여유있게 느린 속도로 또는 숨도 멈춘채 빠른 속도로, 그렇게 시인님의 시를 읊곤 했었답니다. 시인님은 말이에요, 세상의 어느 화가보다도 사물을 더 섬세하게 잘 그렸었지요. 그래서 시인님의 시에선 생명의 끈적끈적한 피가 돌고 있었다니까요. 어느 작곡가보다도 더 감미로운 음률로 사물을 노래했었지요. 그래서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 가슴 밑바닥에 아름다운 음률이 흐르곤 했었답니다.
시인님. 벌써 눈치 채셨지요? 시인님의 시에 대한 회상이 전부다 대과거형의 문장이라는 것을.
이제 현재형 문장의 글을 써볼까요?

시인님.
내게 있는 별난 취미가 뭔지 아시지요? 글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그림을 음악소리로 듣고, 음악을 글로 써내는 취미 말이에요.
요즘 시인님의 시는 붓으로 그려지지가 않아요. 컴퓨터의 마우스로 그려야할 것같아요.
마우스로 그리는 그림이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아세요? 영화 <타이타닉> 보셨나요? 많은사람들이 죽고, 그렇게 많은 시체들이 물에 둥둥 떠있는 걸 보면서도 그게 정말 사람이 죽었다는 느낌이 안 나잖아요. 아무리 죽었어도 방금 또는 바로 얼마전에 있었던 체온이 시체에서 우리에게 느껴져야하는데, 그래야 '아이구 죽었구나'하고 슬퍼지는데,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 놓은 영화의 시체들은 그냥 차갑기만 해서 <체온을 잃은 사람>이 주는 슬픔보다는 그래픽이 주는 <죽은 사람 그림>의 느낌 뿐이었어요.
요즘 시인님의 시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음감을 느낄 수가 없어요. <요들송>에도 흉성과 두성이 섞이는 묘미가 있는데 요즘 시인님의 시는 두성으로만 부르는 노래같아요. 그래서 그 재주에 정신이 반짝 깨어나기는 하는데, 내 속에서도 덩달아 노래가 우러나오고 흥얼거리며 따라부르게 되지는 않아요.
요즘 시인님의 시는 빚어낸 조형이 아니라 깎아낸 조각작품 같아요. 재료를 주물러서 빚노라면 그 안에 시인님의 땀이 호흡이 함께 섞이지요. 그래서 그 완성품을 보며 우리는 만든이의 체취를 실감하고요.
그런데 덩어리를 깎아내서 만든 작품, 시인님의 체취도 함께 깎아져 떨어져 나갔는지, 참 매끄럽고 고운 선만 남아있을 뿐, 시인님의 냄새를 맡을 수가없어요.

시인님.
이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에도 날씨는 깜깜해졌다 환해졌다를 여러 번 반복했어요. 지금 4월 하순. 내복에 스웨터를 입고 이 글을 쓰거든요. 그럼 참 추운 날씨죠? 그런데 얼굴이 화끈화끈하고 몸엔 진땀이 나요. 글 쓰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분께 글을 써서 전달하려고 편지쓰기를 시도한 나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가요. 내가 어떻게 시인님과 감히 시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러나 난 이 편지를 끝까지 쓸 거에요. 시인님은 읽어내려가는 동안 내가 할 말을 먼저 이해하시고, 더딘 나의 서툰 표현을 기다리고 계시리라 믿거든요.
오늘 밤, 다들 잠들고 나 혼자만 남아 있을 때, 난 좀더 깊이 생각하고 다시 쓸 거에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투정인지, 말도 안되는 협박인지, 잘 따져봐가며 나머지 편지를 쓸 거에요.
밤이 새도록 열심히 찾아보면, 고향의 강변 모래밭에 아직도 파묻혀 있는 시인님의 옛날 시를 찾아낼 수 있을 거에요.
난 믿거든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고.

시인님이 공부를 더 많이 하기 전에 썼던 시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얼마나 따뜻했는지, 내가 밤새 다 찾아놓을께요. 그것들을 다 찾아내서 지식을 더 많이쌓은 후에 쓴 시들과 겨뤄볼 거에요.
시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지, 감성에서 만들어지는지 따져볼 거에요. 난 그걸 꼭 캐내고 싶어요. 감성은 시를 잉태하고 지식은 시를 출산한다고생각하니까요. 우리 모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 하나 품고있지 않을까요?

내일을 기약하며 이만 총총.


시인님들 보셔요!

저녁 식사로 감자를 쪄 먹었어요. 눈이 움푹 패인 자리가 초록색이 아니라 보라빛이 나는 감자였어요. 개수대 앞에 있는 커다란 유리창으로 마당을 내다보며 감자 껍질도 벗기고, 접시도 몇 개 닦고 그랬지요.

시인님.
창 밖에 있는 모든 것들, 4월의 우박을 견뎌내는 마당의 꽃들, 먹이를 쪼아먹는 새들, 졸고 있는 고양이는 누군가가 창 안에서 자기를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까요?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아닐까요? 짐짓 고개를 가로 돌려가며 주변을 한바퀴 돌아봅니다.
눈, 시인님은 아주 특별한 눈을 가지셨었지요. 시인님의 눈을 지배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가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보고 그려내는 시들이 모두 우리들의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직접 이어졌거든요.
참, 생각해보니, 눈의 역할이 없어도 시는 쓸 수 있군요. 생각을 옮겨놓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런것은 사물을 들여다보는 눈조차 거치지 않고 시인님의 가슴에서 단박에 우리들 가슴으로 건너오곤 했지요.

시인님. 아이들이 틀어놓은 아주 빠른 곡의 노래가 들려요. 마음이 바빠져요. 가끔 자동차를 타고가다가 느끼는 건데요, 운전하는 사람이 음악의 영향을 받을 것만 같아서 음악소리에 신경이 쓰이곤해요.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중에 갑자기 타악기가 쾅하고 크게 울리면 운전자가 엑셀레이터를 반사적으로 힘껏 밟게 된다거나, 그런 신경을 쓰곤해요.
지금도 아이들이 듣는 빠른 음악이 내 생각을 마구 몰아부치고 있어요. 이러면 나는 또 음악의 영향을 받아 속도가 빨라지죠. 이렇게 갑자기 쓰는 거에요.
"시인님이 옛날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신 후에 쓰신 시는 가슴에 직접 건너오질 못해요." 이렇게 재빨리 써버리는 거에요. 슬쩍 겁이 나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내가 무식함을 드러내는 것같기도 하고, 시인님이 기분 나빠할 것 같기도 해서요.

시인님이 공부를 더 하셔서 외적으로 변한 것은 사회적인 위치와, 그에 따른 생활의 향상, 타인에 의한 인지도가 좀 높아진 것, 그런 것들이겠지요. 성취감도 얻었고요.
그럼 내적으로 변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혜, 교양, 시를 더 잘 쓸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일까요… 학식이 높아지고 지식이 더 넓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군요. 그런데, 시를 잘 쓸 수 있는 능력까지 더 좋아졌다고는 확신할 수가 없어요.
제 생각엔, 시는 지식이 아니라 본능이니까요.
지식이 숙성되어 지혜가 되고, 가슴속에 출렁이는 감정들이 숙성되는 과정으로 뭉글뭉글 뭉쳐지면서 시로 빚어지니까요. 우리들의 삶엔 지식보다 지혜가 더 빛나는 것처럼, 시를 쓰는 데에도 지식을 앞질러 감정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요. 잘 곰삭은 시 한편이 얼마나 맛나는지!
지식의 습득과 연구의 결과로 나온 시보다는 삶의 모습과 냄새가 묻어있는 시, 사물을 심미안으로 들여다 보고 그린 시가 더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듦은 저 혼자만 느끼는 현상일는지…

시인님.
소설을 쓰는 친구가 교수인데요, 교수직에 충실하다보니 소설 쓸 짬을 낼 수가없다고 투덜거리더군요. 작정하고 소설 쓰기에 몰입했었는데 강의 준비와 학문 연구가 부실해지더라고 한숨짓더군요.
그는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소설가로서도성공하고 싶고, 능력있는 교수로도 성공하고 싶어서 고민하고 있어요. 처음에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할 때는 소설 쓰기에서 손을 떼었지만, 엄청나게 많은 소설 읽기에 치어지내면서, 쓰지않는 것에 대한 허전함을 느낄 수가 없었대요. 그리고 학위를 받아야 하는 큰 목표로 소설 쓰기를 접어둔 것에 대한 위안이 되었고요. 박사학위도 받고, 정교수도 되었지요. 실력있는 학자로 학계에서 평판도 좋았고, 학생들로부터 존경도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땐가부터 자신의 가슴 밑바닥에 조용히 똬리를 틀고있던 "소설"이란 놈이 살그머니 고개를 들더니 목을 쑥뽑고는 튼실하게 익은 성공의 열매를 깔쭉깔쭉 건드리기 시작하더랍니다.
중학교 때부터 소설가가 되리라고 다짐했던 그는 다시 펜을 잡고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요. 학위도 다 따놓았겠다, 이제야 마음놓고 글좀 써도 되겠지, 그런 생각은 또 다른 복병을 만났지요. 이번엔 그의 나이, 그의 직책, 이미 사회의 중진에 들어선 그의 "사회적인 위치"가 그를 가만 놔두지를 않는 거에요. 그는 교정 밖으로도 분주하게 드나들게 되었어요. 대학교수가 그 외의 명함을, 그것도 작은 명함쪽지가 제법 빽빽한 글씨로 들어찬 명함을 따로 가지게 되었답니다.

시인님.
시인님도 그러하시지요? 아무도 발견 못한 아주 작은 보라색 들꽃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도 초조하게 손목시계에 자주 눈길을 주시지요?
휘익, 불어오는 바람결에 묻어온 바다냄새를 단숨에 잡아 요술 호리병속에 가두어놓고도 안심이 안되어서 자꾸만 그 호리병을 기웃거리시지요? 바다 비린내가 너무 강한 것 같아서 꽃 향기를 조금 집어넣고, 그게 또 맘에 안 들어서 다시 솔바람을 불러다 넣고… 이제 시인님의 시는 그렇게 만들어지더군요. 제가 비릿한 바다냄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런 건 아랑곳없이 시인님 마음대로 그 바다냄새를 희석시키시더군요.

시인님.
시인님의 고매한 학문은 어설픈 시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겠지요. 학문이 고매한 경지이듯, 시도 모자란 곳 보충하고 넘치는 것 절제하여 희랍의 조각처럼 준수하게 다듬어야 만족하시겠지요. 딱 먹기 좋게 익은 열매, 가장 보기 좋은 상태의 꽃, 은은한 고급향을 풍기는 시로 완성되어야 마음이 놓이시겠지요.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떫은 풋과일인 것을, 꿀물이 철철 흐르는 농익은 과실인 것을, 그런 생각을 공유했던 시절을 잊으신 겁니다.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아직 열리지 않은 봉오리인 것을, 가슴에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꽃잎인 것을, 그런 것에 함께 빠져있던 시절을 잊으신 겝니다..
우리가 취하여 비틀거리는 것은 엷은 비누향인 것을, 쓰디 쓴 들풀의 향내인 것을, 그런 것에 함께 몽롱하게 취하여 어깨동무하고 비척이며 헤매던 시절을 잊으셨음 입니다.

내가 얼마나 간교한지 스스로 놀라고 있는 중이에요.
왜냐고요? 이 편지 말이지요. 만약에 평론 형식의 글로 썼다면 어쩔뻔 했어요? 학문이 짧은 내가 무슨 실력으로 이론을 전개하며 앞뒤를 맞출수 있겠으며, 억지로 짜맞추어 써냈다 하더라도 만약에 시인님이 반론이라도 하신다면, 그걸 내 능력으로 어찌 감당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편지를 쓴 거지요. 제 마음은 전달하고, 만약에 시인님이 이거 논리에 맞지도 않는 글이라고 야단하셔도 "아휴참, 그깟 편지를 가지고 뭘 그러세요?"하고 슬쩍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제 마음은 다 알아주셔야 합니다.
너무 횡설수설한 편지라서 시인님의 성격에 맞게 다시 정리해야겠어요.
저는요, 시인님이 국문학, 시문학을 많이 공부하셔서 박사님이 되시고, 그 쌓은 지식을 토대로 쓰신 시보다는, 그렇게 공부 많이 안 하셨을 때 읊었던 시들이 더 좋아요. 그전 시가 더 아름다워요.
시인님.
학교 일로 바쁘시고, 문단 일로 바쁘시고, 사회적인체면치례로 여기저기 휘둘리면서 좋은 시 쓰실 시간 빼앗기는 것 안타깝다는 얘기에요.
시인님에게 있어서 시는 문학의 한 장르요, 시학에 맞는 시를 판단하며 쓰시지만, 저는 가슴으로 읽고 있거든요. 시가 성립이 되든 안 되든, 가슴에 첨벙 물소리를 내며 던져지고 물결이 번져나가는 가느다란 떨림을 감지하고 있거든요.
시인님에게는 시가 학문일지라도 저에게 시는 삶입니다.

시인님 보셔요!
오늘 밤엔 이론서 한 권도 못 읽어본 산골 소년이 되어, 봄 꽃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산 속에서 벌거벗은 소년이 되어, 시 한편 써 주세요. 벗은 몸, 열린 가슴으로 욕심껏 흡기한 산 향기 그대로 내게로 뿜어주시어요.시인님!

잃어버린 서정시를 찾아 헤맨 어느 봄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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