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을 맞이하는 베란다 정원

by morgen


입동을 맞이하는 베란다 정원


나는 바람을 잘 탄다. 바람이 눈에 보이는 날에는 그 바람이 가슴 속까지 흘러들어와 랩소디를 연주하고, 바람이 안 보이는 날에는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적막감을 느낀다. 특히 베란다 화분들을 바라볼 때 그러하다.


꽃 보다는 나무를 좋아해서 제법 큰 나무들을 몇 화분 키우고 있다. 나무의 크기만큼 잎사귀도 많이 붙어있는데 바람이 없으면 그 나무는 그냥 정물화 속의 정물일 뿐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바람 없는 베란다를 내다보면 마치 정물화를 감상하고 있는 듯하다. 생물이 어찌 그리 움직임 하나도 없이 서있단 말인가. 살아있으면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적막함이 싫다. 더구나 요즘엔 소리마저 멈췄다.

유치원이 정상화 되어서 손녀는 우리 집에 오지 않는다. 오면 항상 베란다에서 화분의 식물들과 인사를 나누고, 종알종알 종달새 지저귀듯 말 재롱을 펼치는 손녀가 오지 않는 베란다 정원은 생기가 없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손녀가 화분들 사이를 팔랑이며 돌아다니면 나뭇잎들이 맞장구를 치며 살랑살랑 움직인다. 나무들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잘 그린 정물화가 아니라 내게 생기를 주는 정원이다. 흙을 만져도 따뜻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화분을 돌봐도 허리가 안 아프다. 정원 가꾸기는 생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손녀가 없는 베란다에서 혼자 일을 하는 것은 그냥 노동일 뿐이다. 손에 흙 묻히기도 싫고, 허리도 아프고, 즐거움이 없는 단순 노동일 뿐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야 할일들이 있다. 내 감정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든지 하늘에 떠있든지 때맞춰 할 일들은 절대로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정확히 찾아오는 밥 때가 그랬었다. 몇 끼라도 굶은 채 골방에 칩거하고 싶어도 끼니 때가 되면 부엌으로 기어나가야 했었다. 내 기분과 아이들의 밥 때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계절이 오고 가며 내 가슴을 휘저어 놓아도 옛날 내 아기들처럼 나만 바라보는 눈길이 있다. 내가 키우는 화분의 식물들이 그렇다. 며칠만 방치해둬도 말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손길을 기다린다. 이젠 춥다고 잎사귀를 살짝 오그린다.


아파트 마당에 내놓았던 큰 화분들을 들여놨다. 상태가 안 좋은 잎들을 따주고 마른 가지도 잘라주었다. 베란다의 모든 화분들을 시원하게 샤워시키고 바람에 물기가 마르도록 창문을 활짝 열어놨다. 다육이들도 오랜만에 샤워를 시키고 물을 듬뿍 주었다. 다육이들은 이제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물을 주면 된다. 모두들 올해의 마지막 샤워를 했다. 최저 기온이 0도 가까이 내려갔으니 찬물 샤워는 그만 해줘야 한다.


가운데, 물로 샤워를 한 식물들. 온통 물방울을 뒤집어쓰고 있다.
왼쪽, 가지치기를 하여 삭막해진 베란다 정원. 오른쪽 아파트 화단에서 작은 손녀.


서양란 화분들을 특별히 햇볕 잘 드는 곳에 배치한다. 최고 기온이 10도쯤까지 내려가면 뒷베란다로 옮길 것이다. 꽃을 피우려는 준비과정이다. 햇빛 없고 추운 그곳에서 40일을 넘기면 당당히 거실 입성이다. 거실 탁자 위에서 서서히 꽃대를 올리고 다른 어떤 화분들 보다도 귀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과정을 안쓰러워 하셨었다. 날씨가 많이 추운 날에는 “아이구 베란다 화초들 다 얼어죽겠다.”고 걱정을 하셨었다. 이젠 그런 걱정의 말소리도 없는 뒷베란다에서 서양란 화분들은 쓸쓸한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다.

가을동안 충분히 햇볕도 쐬도록 해주었고, 영양분도 부족하지 않도록 보충해 주었으니 춥고 잔인한 시간을 잘 견뎌대고 늠름한 꽃대를 올리리라고 믿는다.


손녀의 설란 화분은 벌써 겨울인듯 잎줄기가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손녀가 보면 아마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지난 봄에 줄기 두 가닥 시들었다고 엉엉 울었었는데…

산수국은 지금 때가 어느 때인지 모르나보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조금 시들기라도 해야 자르든지 할텐데 저리도 푸르게 있으니 감히 가위를 대지 못하겠다. 11월 말까지 기다렸다가 잘라야겠다. 그냥 놔두면 내년 봄에 꽃을 볼 수 없을 테니까. 겨우내 잎을 키우고 있으면 무슨 힘으로 꽃을 피운단 말인가. 산수국은 그걸 다 알고 있을텐데 어떤 미련 때문에 아직도 잎을 떨구지 못하고 있을까?

이것 참, 남의 말은 잘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살짝 수줍어진다. 내가 떨쳐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화분에서 지지대에 나선형으로 몇 바퀴씩 똬리를틀고 오르던 덴드롱은 완전히 잘랐다. 벽을 타고 무섭게 기어오르던 것은 그대로 두었다. 구아바나무 가지도 많이 자르고, 석류나무 가지도 잘랐다. 부켄베리아는 꽃이 다 시들어서 마음 편히 싹둑 잘랐다.

우리집 식물들은 무슨 영험한 기운이 있는지 내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젠 나무를 자르고 정리를 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가만히 있던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찌 잘라버릴 수가 있나.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여러 해를 거듭하며 제법 여러 번 경험을 했다.

어떤 땐 내가 나무에게 협박을 한다. “너 꽃 빨리 안 피우면 그만 잘라버린다.”고 큰 소리를 하면 얼마후 바로 꽃이 핀다.



식물이 자라는데 필수조건은 바람과 햇빛과 물이다. 물론 흙은 당연한 것이고.

이맘때쯤부터는 창문을 열어두지 않으니 바람이 아쉽다. 잠깐씩 환기를 시킬 뿐 추운 날씨에 문을 열어둘 수는 없다. 햇빛은 많이 부족해지지만 식물의 생체리듬은 일조량의 변화에 적응하며 쉬는 시간을 갖는다. 물도 조금씩 줄여서 주면 된다. 우리집 베란다 식물들은 어쨌든 겨울을 잘 지내고 봄이면 한 놈도 빠지지 않고 모두들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그런데 내가 문제다. 바람이 없는 베란다 정원의 모습을 참아내는 것이 참 힘들다. 움직임이 없는 것이 무섭다. 거실 창 밖으로 가만히 서있는 나무들이 생물인지 정물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싫다.


내가 꽃보다 나무를 좋아하지만 겨울에 화려한 꽃이 필 수 있는 서양란을 키우는 것은 바로 이 움직임 때문이다. 꽃대가 올라오고, 작은 꽃봉오리가 둥실둥실 커가면서 탐스러운 봉우리가 되고, 어느 순간 봉우리를 활짝 터뜨린다.

꽃을 기다리는 것은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살짝 변해가는 그 움직임 때문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하고 뒤 돌아보면 성큼 가까이 와있는 친구들처럼 내가 한눈 파는 사이에 쑤욱 자라는 모습이 좋다. 그러면 나는 바람이 없는 베란다 식물들이 부동의 자세로 서있어도 괜찮아진다.

나의 서양란들은 설 전후로 60일 정도 꽃을 보여준다. 어떤 꽃은 두 달을 훨씬 넘기며 그대로 있다. "얘는 제가 생화인 걸 잊어버렸나, 제가 조화인 줄 아나봐." 우리 식구들이 한 마디씩 한다.


많은 화가들이 허무를 상징하는 바니타스 정물화를 그렸다. 꽃 그림은 보기 예쁘지만 그 안에 허무가 들어있다. 식물을 키우며,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늘 느끼는 감정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종종 회자된다. 그것이 허무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키우는 꽃나무들을 보면 꽃이 진다고 허무해할 이유가 없다. 한 송이는 시들지만 다른 송이가 그 뒤를 잇고, 생육을 멈추고 한 계절을 쉬고나면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우기 때문에 허무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다음 계절을 꿈꾸는 희망이기도 하다.


나도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가까이로는 주말에 꽃보다 더 예쁜 손녀를 만나는 기대, 멀리는 다음 계절에 내 꽃나무들을 만나는 꿈을 꾼다.

베란다에 바람이 없어도 괜찮다. 정물화로 꼼짝않고 서있어도 괜찮다. 벌써 내 가슴엔 주말의 나비가 날아들고, 내년 봄의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이래서 글쓰기가 중요하다.

움직임없는 정원이 주는 우울감 때문에 시작한 글이 끝부분에 다다르면서 희망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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