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정원에서 손녀와 함께
지루한 우기가 계속되고 있다. 두통이 가라앉았다 도지다 이어진다. 친구들 몇몇은 관절이 일기예보를 한다고 하는데 내 관절은 아직 일기예보를 하지 않는다. 그대신 두통으로 습도를 알려준다.
비가 오는 날엔 전혀 이상이 없는데 비는 오지않고 습도가 높은 날은 두통이 생긴다. 요즘이 그런 시기이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두통약 한 번 먹으면 가라앉는다.
손녀의 유치원이 오늘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 아들이 출근길에 아이를 데리고 왔다. 큰 아이의 학교는 다음 주부터 방학이라서 작은 손녀만 왔다. 아들이 퇴근길에 아이를 데려갈 때까지는 내 차지이다. 빙그레 웃음짓게 만드는 귀여움도, 속사포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의무도, 내겐 재미없는 유튜브를 함께 봐야하는 일도 다 나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내가 큰 손녀를 참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손녀 둘이 함께 오는 날에는 내가 작은 손녀 시중들 일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손녀는 우리 집에 오면 마스크를 벗어서 제자리에 걸고는 베란다로 먼저간다. 그 보다 이전에, 차에서 내리면 마당에 내다 놓은 화분을 먼저 살핀 후에 집으로 올라온다.
베란다에 가면 우선 제 화분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 다음엔 여러 식물들을 빠짐없이 다 둘러본다. 한번 나가면 30여분은 베란다에서 보내는데 심심하면 또 나가고, 또 나가고, 아마 하루에 1시간 반 정도는 베란다에서 식물들과 함께 보내는 것 같다. 물을 줄 때에도 그냥 주는 법이 없다. “목마르지? 내가 물 줄께. 물마시고 쑥쑥 커.” 이런 말을 화분마다 일일이 하면서 물을 준다.
하여튼 작은 손녀는 말이 많다. 갑자기 내게 묻는다.
“할머니, 얘 결혼했어요?”
“결혼? 왜?”
“이거 봐요. 이렇게 애기들을 많이 났네요. 아이구, 얘좀 봐요. 정말 작고 귀여워.”
다육이 본체에서 여러 개의 싹이 나왔는데 손녀가 오지 않는 동안 조금 자란 것을 보고 하는 소리다.
덴드로비움 가지가 새로 뻗치고 있었는데 여러 가닥이 아니라 별도의 화분을 만들기도 애매해서 그대로 놔뒀었다. 그랬더니 제가 흙속에 있는지 어디 있는지 분간도 못하고 공중에 뿌리를 뻗치고 산다. 그런 새 순이 두 개가 됐다.
식물과 대화하는 것은 손녀만이 아니다. 나도 그렇다.
“얘좀 봐. 저 분가시켜 달라고 아우성이네. 빨리 새 집 만들어서 내보내 달라고.”
뿌리가 잘 견딜지 살펴보고 한 마디 덧붙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네가 아기를 하나 더 낳으면 너희 세 식구 분가시켜줄게."
.
손녀가 발레를 하기 때문에 발레하는 모양의 꽃 후쿠시아를 금년에 새로 들였다. 아직 튼튼하게 자라지도 않아서 줄기는 낭창낭창 휘어질 정도인데 웬 욕심에 꽃망울은 그리도 많이 매달았는지. 아침에 나가보니 줄기들이 단체 파업에 들어갔다. 아예 흙바닥에 모두 다 드러누워 버린 것이다. 지지대를 세우고 연약한 줄기를 지지대에 묶어주었다. 꽃망울 맺힌 것을 보니 앞으로도 한참을 꽃피워낼 것 같다. 손녀는후쿠시아 꽃이 예쁜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하는 모습이라고 예뻐한다.
나는 꽃보다는 나무를 좋아해서 제법 여러 화분의 나무가 있는데 이제 늙으니 다루기가 힘들다. 변덕이 나서 이제는 울긋불긋 화사한 꽃이 좋아졌다. 큰 화분들을 처분하고 일년초를 가꾸고 싶다. 한 3년전쯤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지만 식물이 살아있는 것인데 버릴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다. 가져갈 지인들도 마땅치 않다. 어쨌든 내가 힘닿는 데까지는 보살필 것이다.
손녀에게 내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늙어서 죽으면 얘네들은 다 어떡하지, 그게 걱정이다.”
“할머니, 내가우리집으로 가져가서 다 돌볼게요.”
“아이구, 화분 가져간다고 하면 늬 엄마가 기절하겠다. 엄마는 힘들어서 싫어할거야.”
“그럼 내가 할머니 집으로 와서 물주고 돌볼게요.”
“니가 혼자 어떻게 와? 유치원도 가야 하는데.”
“할머니, 내가 얘들 다 돌볼 수 있어요. 할머니는 걱정말고 죽어요.”
그 다음 주말에 와서도 또 그 얘기를 한다.
“할머니, 내가 얘들 다 돌볼 수 있으니까 할머니는 걱정말고 죽어요.”
(참 효심이 넘치는 효손이다.)
우리나이로 여섯 살 손녀. 나보고 화분 걱정말고 죽으란다.
그 아이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재작년에 우리 어머니(손녀의 증조모)가 돌아가셨을 때 손녀는 네 살이었었다. 돌아가신 후로는 한 번도 증조할머니를 본 적이 없으니 손녀 생각에는 죽으면 만나기 힘든 것으로 죽음이 이해될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우리집에 내가 없으면 제가 식물들을 돌보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식물들 걱정하지 말고 죽으라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손녀가 너무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나의 큰 걱정 하나를 덜어주고 나를 안심시키니 얼마나 큰 효도인가.
그 아이는 식물을 돌보는데 정말 정성을 다한다. 큰 화분에는 풀이 제법 많이 나는데 그건 손녀가 다 뽑는다. 숫가락으로 겉흙을 긁어서 속흙과 뒤집어 주기도 한다. 혹시 개미라도 생겼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본다.
그런 손녀를 보면 갑자기 죽기 싫어진다. 그 아이가 예쁘게 자라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다. 아니, 내가 치매가 왔나, 이 무슨 어린애 같은 생떼란 말인가. 그리 오래도록 보고싶다는 욕심은 당장 빨리 집어던져버린다.
지금, 함께 하는 지금, 곁에 있을 때의 모습을 매번 나의 생체 렌즈에 찰칵찰칵 찍어서 고이 담아둘 것이다. 사진 한 가득 담긴 USB는 내가 마지막에 가지고 떠날 수 없지만, 생체 렌즈로 찍은 영상은 내 안에 그대로 담아둔 채 가져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식물에게도 수명이 있고, 화분의 식물들은 늙어 죽는다. 땅에 뿌리박은 식물들 보다는 수명이 짧다. 그러나 지금은 화분의 어떤 식물도 죽으면 안된다. 손녀가 너무 많이 엉엉 울고 또 울고 그럴 것이기 때문에.
현재 내게로 온 지 10년이 넘은 것들이 제법 많다. 20여년 된 것도 있다. 내가 늙어감에 따라 화분의 식물들도 서서히 늙어갈 것이다. 성장을 늦춘 분재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10년을 더 산다면 나의 화분들은 자연사할 확률이 높다. 그때는 손녀가 열 다섯 살이 넘으니 화분 식물 하나 죽었다고 엉엉 울지는 않을 것이다. 슬픔을 꿀꺽 삼키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고, 죽은 식물 보다 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지게 될 테니까..
주간 내내 비가 오락가락해서 마당에 내놓은 화분들은 과수상태가 됐다. 주말에 아들들이 오면 집안으로 들여놓아야겠다. 화분을 들고 움직이는대로 손녀는 촐랑촐랑 뒤따르며 잎사귀 하나라도 떨어지면 안된다고 제 아빠랑 작은 아빠에게 잔소리를 해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