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한 가운데
기온이 20도를 넘기면서 베란다 식물들을 샤워시키기 시작했다. 거실 큰 유리창도 바깥 유리창도 원없이 물청소를 했다. 나는 나무마루가 깔린 거실에서, 마루를 깔고 잘 가꾼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우지 못한다. 얼마나 부지런하면 얘네들 잎을 다 닦아준단 말인가. 식물들에게 가장 좋은 것은 햇빛 바람 물, 그런데 비보다 더 좋은 물은 없고, 물샤워보다 더 좋은 물주기는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마당있는 집에 살 때, 정원에 물주기를 하려면 흙에 듬뿍주고 식물을 샤워시키고 그러는데 한 시간은 걸렸다. 그러나 그 정성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당할 수가 없다. 5분 동안만 주룩주룩 비가 내려도 호스로 1시간 물주는 것보다 훨씬 낫다.
물, 물을 물쓰듯 써야 속히 후련해지는 나쁜 습관이 있다. 독일 집에 살 때는 욕실과 화장실 바닥이 타일로 되어있긴 했지만 배수구가 없었다. 괜찮았다. 아이들 머리를 깎아주고 빗자루로 쓸어내면 됐다. 물걸레로 닦으면 개운하고 깔끔했다. 영국집에서는 욕실에는 카페트가 깔려있고 화장실은 나무 마루바닥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집에서 이발시키는 일을 포기했다. 욕실의 카펫을 유지하기 위해, 화장실 바닥을 흠없이 보존하기 위해 내가 들인 정성으로 사람 하나를 키워도 됐을만큼 공을 들였다. 유럽 호텔의 욕실은? 에잇, 그거 별거 아니다. 타일 바닥이야 뭐 샤워커튼 제대로 펼치고 젖으면 수건으로 다 해결된다.
얘기가 왜 이렇게 흘렀지... 어쨋든 식물 몇 화분을 키우든지 나는 물샤워 시키는 것을 고수한다.
지중해성 기후에서 일년에 다섯 번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레몬. 절대로 레몬의 모습은 아닌 것 같지만... 맛은 레몬이니 참 신기하다. 꽃이 질 때, 모든 꽃들이 다 그렇지만 지저분하다. 밖에서는 낙화를 '꽃비'라 칭하며 즐기기도 하지만 베란다에서는 그저 지저분한 모습이다. 처음에 키울 때는 꽃이 시들기 시작하면 시든 꽃잎을 부지런히 따버리고 깔끔한 모습을 유지했었다. 꽃이 시들어 떨어져야 열매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냥 지저분한 게 싫어서. 그걸 참아내면 이렇게 열매를 맺는다. 난 크게 욕심내지 않는다. 해마다 열매 여섯 개만 얻으면 대만족이다. 손주들이 여섯이라.
근래 몇 년 사이에 식물 몇 화분을 잃었다. 몇 번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에 미안하게도 물을 제 때 못줘서 그만... 2년전엔 큰 며느리가 직장 끝나고 퇴근할 때 우리집에 들러서 화분에 물을 주었다. 일주일에 한번만 주라고 일렀고 그 애는 착실히 물을 주었지만 식물들은 주 1회 물주기로 여름 햇볕을 이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식물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가 컸을지 며느리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시'자 들어가는 시금치도 싫다는 며느리들이 많은데 퇴근 후에 시집에 가서 화분에 물을 줘야한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다. 그 덕을 지금 세상에서 누리고 산다. 시든 화분 때문에 그애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거듭하고, 나는 이렇게 많이 살려놨는데 그깟 몇 개는 괜찮다 걱정말라는 대꾸를 한결같이 했다.
작년에는 물주기를 딸이 맡았다. 역시 주1회 물주기. 그러나 또 화분 몇 개를 잃었다. 화초는 갈증으로, 다육이는 과수로 갔다. 다년생 나무들은 갈증이든 과수든 이미 익숙해져서 잘 버텨준다. 지금 옆지기는 유럽 출장중이다. 이번엔 함께 가지 않았다. 그는 화분을 지키려는 나대신 누룽지와 약식과 함께 떠났다. 오히려 좋지 않을까? 누룽지도 약식도 나만큼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저혈당과 싸우고 있는 그는 아침 저녁으로 혈당 체크하여 꼬박꼬박 사진을 보내온다. 큰 염려없다. 아 그놈의 저혈당, 운동은 어떻게 하고 뱃살은 어떻게 빼나...
딸도 며느리도 화분을 가져갈 생각은 1도 없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할 물건도 아니다. 잘 키울 사람에게 잘 보살펴달라고 애원하며 줘야한다. 햇볕쬐고 바람쐬고 물샤워시키며 자랄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 한다. 마치 자식을 분가시키는 마음이다. 떠나보내야 할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나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애완견 하나를 먼저 보냈을 때 그 마음이 식물이라해서 다르지 않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이니까. 더구나 내 손으로 키우는 생명이니까.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있다. 나의 사랑하는 식물들, 지치지 말고 잘 지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