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 – 오렌지 먹는 사람
Georg Baselitz - Orangenesser
아이들이 말을 안듣기 시작하는 시기를 예전엔 일곱살쯤으로 여겼었다. “미운 일곱살”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건 참 너그러운 말이었다. 말 안듣고 미운 짓해도 ‘일곱살은 원래 그래’하면서 받아주시던 어른들의 넓은 이해심이었다.
젖니가 빠지기 시작하면 어른들은 에구 이제 말 참 안 듣겠구나 하시면서 겉으론 걱정하는 척, 속으론 아이의 성장과정을 슬쩍 흐뭇해하시곤 했다. 이제는‘미운 일곱 살’보다 훨씬 더 내려와 ‘미운 네 살’이 되었다. 젖니가 빠지는 시기도 좀 일러진 것 같다. 이 후에는 악동 청개구리 시기가 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화 <청개구리>이야기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래라 하면 저렇게 하고, 저래라 하면 이렇게 하고, 부모 말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가 있었다. 그 어머니가 죽을 때 ‘내가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 평소에 늘 시키는 일을 반대로만 하던 자식이니 물가에 묻으라고 하면 산에 묻을 것이라고 믿은 어머니의 유언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그 동안의 반항기가 사라지고 순종하는 자식이 된 청개구리는 유언대로 주검을 물가에 묻었고, 비가 내리면 무덤에까지 물이 넘치니 비오는날에는 청개구리가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말 안 듣는 아이를 “청개구리같다”고 한다. 뭔가 정상적인 것을 거꾸로 하면 “청개구리같다”고 한다. 모르고 반대로 하면 ‘실수’지만, 고의적으로 반대로 하면 ‘청개구리’다.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청개구리인가?
왼쪽 Schlafzimmer (Remix), 2005 Öl auf Leinwand, 427 x 290 cm
오른쪽 Orangenesser IV, 1981 Öl auf Leinwand, 146,1 x 114 x3,4 cm
내가 국내에서 본 바젤리츠의 그림은 리움 미술관에 전시된 <흩어진 그림> 연작인<민속 무용>이 있다. 국내에서 그의<거꾸로 된 그림>은 보지 못했다. 독일 뮌헨의 모던아트 뮤제움에서 처음으로 그의 <거꾸로 된 그림>을 보았다. 바젤리츠가 그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시된 그림과 마주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화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작품을 잘못 걸어놓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작품뿐이 아니라 사방 벽전체에 모든 그림이 다 거꾸로 걸려있는 것이다. 아니, 거꾸로 걸린 것이 아니고 바로 걸린 것인데 그림 자체가 거꾸로 그려진 그림이다.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시실이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방이었다.
나도 한 때는 참 반항적인 아이였었다. 하려고한 일인데도 누가 시키면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만 두려던 참에 어머니가 그만 하라고 하시면 멈추지않고 계속했다. 미운 일곱 살 때가 아니다. 다 커서도 그랬다. 내 자율성을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타인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어머니 말씀을 거역했다. 물론 할 것은 하고, 안 할 것은 안 했지만, 내가 움직이기 전에 누가 먼저 시키면 그 말이 있은 후 한참 시차를 두고 행했다. 연령에 따라 그런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특별히 사춘기라 그런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가 다 알아서 해.” 오만이다. 교만이다. 불순종이다.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결국은 하는구먼, 어차피 할거면 시킬 때 퍼뜩 하잖구’ 이 말씀조차도 내뱉지 않고 삼키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반복학습을 터득하지 못하셨다. 수 십 년 동안을 계속 나보다 꼭 한 발 앞서서 해라 하지마라 말씀을 하셨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웬만하면 어른 마음 편하게 말씀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움직이쟎고 기어이 나의 자율성을 고집했으니.
바젤리츠는 반항아인가? 아니다. 나 같이 속 좁은 반항아는 아니다. 기존의 형식에 도전장을 내민 용기있는 예술가이다.
거꾸로 된 그림은 주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회화 스타일의 표현력과 형식적 특성을 강조하는 장치였다. 주제와 매체의 표현적 특성을 모두 해방시키기 위해 주제를 거꾸로 그렸다. 관객은 현실과 닮은 것보다 그림의 선과 자국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존의 인식 메커니즘에 저항하는 혁신적인 구성이다.
거꾸로 된 작품이 예술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비평가도 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뒤 흔드는 천재의 획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
그의 거꾸로 된 그림은 그를 가장 쉽게 식별 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고, 곧 거꾸로 그린 그림 예술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예술사의 현실에 맞선 영웅이다.
나의 반항은 무엇이었을까. 자주적인 인간, 자율성, 그런 것은 그냥 반항을 포장하는 그럴듯한 단어일 뿐일까?
도전해야 할 때와 순종해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것이다. 저항하고 맞설 상대를 제대로 고를 줄도 모르는 무조건적인 반항아일 것이다. 소아병적인 유치한 반항일 것이다.
나는 바젤리츠의 거꾸로 그린 그림이 좋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저 크기가 당당하게 느껴진다. 누가 뭐라하든 거꾸로 버티고 서있는 자신만만함이 부럽다.
제대로 바르게 서는 것에도 서툴고, 더구나 거꾸로는 서 볼 엄두도 못내는 나는 거꾸로 선 저 거대한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저 사람처럼 서있을 자신이 없거든 편협한 반항은 거두어 들이고 순종하자. 바젤리츠처럼 새로운 것을 개척할 의지도 없거든 그냥 순종하며 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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