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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Dec 03. 2020

게오르그 바젤리츠-오렌지 먹는 사람

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 – 오렌지 먹는 사람

Georg Baselitz - Orangenesser


아이들이 말을 안듣기 시작하는 시기를 예전엔 일곱살쯤으로 여겼었다. “미운 일곱살”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건 참 너그러운 말이었다. 말 안듣고 미운 짓해도 ‘일곱살은 원래 그래’하면서 받아주시던 어른들의 넓은 이해심이었다.

젖니가 빠지기 시작하면 어른들은 에구 이제 말 참 안 듣겠구나 하시면서 겉으론 걱정하는 척, 속으론 아이의 성장과정을 슬쩍 흐뭇해하시곤 했다. 이제는‘미운 일곱 살’보다 훨씬 더 내려와 ‘미운 네 살’이 되었다. 젖니가 빠지는 시기도 좀 일러진 것 같다. 이 후에는 악동 청개구리 시기가 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화 <청개구리>이야기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래라 하면 저렇게 하고, 저래라 하면 이렇게 하고, 부모 말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가 있었다. 그 어머니가 죽을 때 ‘내가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 평소에 늘 시키는 일을 반대로만 하던 자식이니 물가에 묻으라고 하면 산에 묻을 것이라고 믿은 어머니의 유언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그 동안의 반항기가 사라지고 순종하는 자식이 된 청개구리는 유언대로 주검을 물가에 묻었고, 비가 내리면 무덤에까지 물이 넘치니 비오는날에는 청개구리가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말 안 듣는 아이를 “청개구리같다”고 한다. 뭔가 정상적인 것을 거꾸로 하면 “청개구리같다”고 한다. 모르고 반대로 하면 ‘실수’지만, 고의적으로 반대로 하면 ‘청개구리’다.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청개구리인가?

왼쪽 https://www.pinakothek.de/kunst/georg-baselitz/schlafzimmer-remix 오른쪽https://www.pinakothek.de/kunst/meisterwerk/georg-baselitz/orangenesser-iv

왼쪽     Schlafzimmer (Remix), 2005  Öl auf Leinwand, 427 x 290 cm

오른쪽 Orangenesser IV, 1981 Öl auf Leinwand, 146,1 x 114 x3,4 cm


내가 국내에서 본 바젤리츠의 그림은 리움 미술관에 전시된 <흩어진 그림> 연작인<민속 무용>이 있다. 국내에서 그의<거꾸로 된 그림>은 보지 못했다. 독일 뮌헨의 모던아트 뮤제움에서 처음으로 그의 <거꾸로 된 그림>을 보았다. 바젤리츠가 그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시된 그림과 마주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화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작품을 잘못 걸어놓은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작품뿐이 아니라 사방 벽전체에 모든 그림이 다 거꾸로 걸려있는 것이다. 아니, 거꾸로 걸린 것이 아니고 바로 걸린 것인데 그림 자체가 거꾸로 그려진 그림이다.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시실이었다.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방이었다.


나도 한 때는 참 반항적인 아이였었다. 하려고한 일인데도 누가 시키면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만 두려던 참에 어머니가 그만 하라고 하시면 멈추지않고 계속했다. 미운 일곱 살 때가 아니다. 다 커서도 그랬다. 내 자율성을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타인의 말에 따르지 않았고, 어머니 말씀을 거역했다. 물론 할 것은 하고, 안 할 것은 안 했지만, 내가 움직이기 전에 누가 먼저 시키면 그 말이 있은 후 한참 시차를 두고 행했다. 연령에 따라 그런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특별히 사춘기라 그런 것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가 다 알아서 해.” 오만이다. 교만이다. 불순종이다.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결국은 하는구먼, 어차피 할거면 시킬 때 퍼뜩 하잖구’ 이 말씀조차도 내뱉지 않고 삼키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반복학습을 터득하지 못하셨다. 수 십 년 동안을 계속 나보다 꼭 한 발 앞서서 해라 하지마라 말씀을 하셨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웬만하면 어른 마음 편하게 말씀 떨어지자마자 재빨리 움직이쟎고 기어이 나의 자율성을 고집했으니.


바젤리츠는 반항아인가? 아니다. 나 같이 속 좁은 반항아는 아니다. 기존의 형식에 도전장을 내민 용기있는 예술가이다.

거꾸로 된 그림은 주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회화 스타일의 표현력과 형식적 특성을 강조하는 장치였다. 주제와 매체의 표현적 특성을 모두 해방시키기 위해 주제를 거꾸로 그렸다. 관객은 현실과 닮은 것보다 그림의 선과 자국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존의 인식 메커니즘에 저항하는 혁신적인 구성이다.

거꾸로 된 작품이 예술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속임수라고 생각하는 비평가도 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뒤 흔드는 천재의 획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

그의 거꾸로 된 그림은 그를 가장 쉽게 식별 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고,  곧 거꾸로 그린 그림 예술의 선구자로 알려졌다. 예술사의 현실에 맞선 영웅이다.


2020년 1월 뮌헨 모던아트 뮤제움 바젤리츠 전시실에서 촬영함.

나의 반항은 무엇이었을까. 자주적인 인간, 자율성, 그런 것은 그냥 반항을 포장하는 그럴듯한 단어일 뿐일까?

도전해야 할 때와 순종해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것이다. 저항하고 맞설 상대를 제대로 고를 줄도 모르는 무조건적인 반항아일 것이다. 소아병적인 유치한 반항일 것이다.


나는 바젤리츠의 거꾸로 그린 그림이 좋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저 크기가 당당하게 느껴진다. 누가 뭐라하든 거꾸로 버티고 서있는 자신만만함이 부럽다.

제대로 바르게 서는 것에도 서툴고, 더구나 거꾸로는 서 볼 엄두도 못내는 나는 거꾸로 선 저 거대한 사람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저 사람처럼 서있을 자신이 없거든 편협한 반항은 거두어 들이고 순종하자.  바젤리츠처럼 새로운 것을 개척할 의지도 없거든 그냥 순종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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