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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Nov 25. 2020

샤갈 - 하얀 십자가

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Marc Chagall  -  White Crucifixion


샤갈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김춘수님의 詩를 통해서였다. 샤갈의 마을은 샤갈이 그린 것이 아니라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읊으며 내 자신이 그린 그림이었다. 나의 <샤갈의 마을>도 제법 몽환적인 이미지였지만 샤갈의 그림과는 가깝지 않았다.


그 후,  박상우님의 단편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접하고 다시 <샤갈의 마을>을 그려보려 했지만, 이미 내겐 샤갈의 그림이 각인되어 있어서 그의 그림 위로 하염없이 눈송이가 흩날릴 뿐 나의 그림은 그릴 수가 없었다.
종로의 맥주집에서부터 눈속을 뚫고 마지막에 다다른 <샤갈의 마을>까지 소설 속 화자의 발자욱을 따라가며 눈속에 파묻힌 서울 거리만 그리게 되었다. 샤갈은 그렇게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내게 다가왔다.

https://www.artic.edu/artworks/59426/white-crucifixion

White Crucifixion, 1938 , oil on canvas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샤갈은 언제나 내게 흰색으로 먼저 다가온다. 때로는 새털처럼 부드러운 느낌으로, 때로는 우주로 증발해버려  텅 비어있는 듯한 강렬함으로 흰색이 클로즈업되는 것이 바로 샤갈의 그림이다.
성탄절이 있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아직 진행중이고, 흰색의 눈발이 희끗희끗 나풀거리는 계절에 나는 자연스럽게 샤갈의 <하얀 십자가>를 생각해냈다.
혹자는 이 그림이 이듬해에 발발하는 2차 세계대전을 암시한 듯하다고도 말한다. 유대인 대학살이 이루어질 홀로코스트의 암시라고.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시카고 인스티튜트의 작품 해설도 샤갈의 <하얀 십자가>를 유대인 학살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가시관을 두건으로 바꿔그렸고, 애도하는 세 명의 천사들(윗부분)과 아기를 안은 여자(아래)가 전통적인 유대인 복장을 하고 있다. 순교한 예수와 박해받는 유대인, 십자가 처형을 현대의 사건과 연결했다고 설명한다. 나치와 그리스도의 고문을 비교하고, 그들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함축하는 의미를 경고하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샤갈이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든지 이론을 떠나 나는 자유로운 감상을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그림감상은 감상(鑑賞)이 아니라 감상(感想)이다.  브런치에 쓰고있는 이 글도 감상(感想)의 글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림을 살펴보면 십자가를 에워싸고있는 주변의 작은 그림들은 지금 우리 지구촌의 이곳저곳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 차가운 흰색의 공간속에 내던져진 파괴된 마을, 공포에 질린 사람들, 불타는 건물, 붉은 깃발을 휘두르는 혁명군,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는 사람들… (이 부분, 십자가의 양쪽에 흩어져있는 작은 그림들은 샤갈이 포그롬Pogrom의 파괴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 모든 어지러움 속에서 예수는 십자가를 지키고 있다. 이 그림에서 로마병정도,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도 보이지 않음은 예수가 구약시대가 아닌 지금 이 시대의 십자가에 달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예수가 매달린 T자의 작은 나무 십자가보다는 큰 흐름으로 내리뻗힌 흰빛의 기둥이 더 뚜렷하게 십자가로 부각됨은 나만의 시각일까?
굵고 넓은 빛의 기둥으로 십자가를 느끼게함은 참 다행이다. 그림 전체에 널려있는 파괴와 공포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안정감을 그 흰 십자가가 주고있기 때문이다. 샤갈도 그런 자위를 얻고자 이 빛의 기둥을 한가운데 세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를 내리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 하나도 없는 빈 사다리가 보는 이를 슬프게 한다.


왼쪽 - 프라우뮌스터 스테인드 글라스,  오른쪽 - 뮌스터 방문시 구매한 셀로판지 사진(우리집 유리창)

왼쪽 사진 출처 https://www.fraumuenster.ch/das-fraumunster/fenster/


스위스 취리히의 프라우뮌스터(Fraumuenster)에는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윤곽선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창밖에 햇빛이 좋아야한다.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그림을 감상할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몽환적인 빛에 사로잡히게 된다. 샤갈의 색깔과 샤갈의 선이 2000년전의 예수님을 만나도록 보는 사람을 인도한다. 그 색감이 참 곱고 아름답다.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가 환한 빛을 받으며 선명한 색깔을 뽐낸다.

십자가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쩜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외면하는, 그리스도 정신에 대한 몰이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십자가의 고통 후에 올 빛의 그리스도를 미리 만나보는 체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실 그리스도.


위의 <하얀 십자가>를 바라보며 흰색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십자가 그 다음에 올 빛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미술 비평가들의 그런 연구발표는 없다. 그러나 나는 한 사람의 관람자로서 그런 생각이 든다.

샤갈이 자주 생각나는 계절이다. 눈 내리는 샤갈의 마을이, 전쟁으로 얼룩진 샤갈의 그림이, 흰 송아지의 슬픈 눈빛이 자꾸만 생각나는 계절이다. 아, 지금, 샤갈의 마을엔 눈이 내리고 있을까....


참고 ; 포그롬POGROM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난 (19세기에서 20세기 초) 유태인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학살을 이르던 말. 러시아민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을 박해한 일, 20세기 초에는 혁명운동을 탄압하던 수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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