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gen Jan 10. 2021

사이 톰블리-감상적 절망으로서의 장미 분석

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CyTwombly

5 부작Analysis of the Rose as Sentimental Despair (사진 순서대로 1,2,3,5,4)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나도 저렇게는 그리겠다." "내가 그려도 더 잘 그리겠다."

모순아닌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나도 그만큼은 그린다니 모순의 말이다. 이해는 어렵지만 그리기는 쉽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그리기 쉬운 걸 왜 이해 못해?

사람들이 또 궁금해하는 일이 있다.

유명한 화가가 그려서 저 그림이 대단하다고 하는 건가, 그림이 대단히 훌륭해서 화가가 유명해졌나?

뭐 이리 어려운 질문 때문에 머리 쓸 일이 있나. 그냥 보면 되지! 이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냥 보자. 그냥 보자.


"저렇게는 나도 그리겠네."하는 그림에 내노라하는 미술 평론가들이 여럿 달라붙어 지식의 향연을 펼친다. 그러면 그보다는 무식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척도 해보고, 뒷걸음질로 거리를 좀 멀리해서 감상하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서 천천히 살펴본다. 드디어 뭔가 필이 딱 꽃히고 "아하, 그렇구나!"할 때도 있지만, "나의 감상은 아무래도 뒤떨어져. 이해가 안가네."하고 주눅이 든 채 물러날 때도 있다.


그러고저러고 어떻고... 어쨌든 나는 사이 톰블리의 그림이 좋다. 왜? 대담하고 자신만만하고 천하에 구애되지 않고 마음껏 자유롭게 그린 그림에 매력을 느낀다. 나는 그런 자유가 없으니.

붓을 들고 마구 휘둘러보고싶은 충동을 드러낼 배짱이 없는 나는 누군가 내 대신 마구마구 휘둘러댄 붓질의 흔적을 보면 내 속이 다 후련하다. 때로는 깃털같은 부드러움이 좋고, 먼 수평선의 희부연 색감도 좋고, 강렬한 색깔로 화폭을 망설임없이 휘저은 흔적도 좋다.


손주들이 나에게 그림 그려달라고 하면 진땀이 난다. 제대로 잘 그려줘야 하니까. 사자는 사자같이, 바나나는 바나나처럼 모양도 색깔도 똑같이 그려야하니까. 내가 그렇게 똑같이 해야하는 성격을 평생 못 벗어나서 창작하는 사람이 못된 나니까. 지금쯤은 그 갑옷을 벗고 좀 부드럽고 편안해질 때도 됬건만, 아직도 나는 형태가 어긋나면 불안하다. 그런 나이기 때문에, 이 못난 모방쟁이는 자유로운 창작자들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위 그림 다섯 점 http://www.miacollectiveart.com/articles/2017/1/13/cy-twombly-against-interpretation

1985 년 5 부작Analysis of the Rose as Sentimental Despair. 1985

oil, house paint,acrylic, and crayon on plywood, Menil Collection.

(사진 순서대로 좌 ->우 -> 상 -> 하 1,2,3,5,4)


마치 낙서와도 같은 그림으로 유명해진 톰블리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불가사의한 해석을 떠맡긴다. 존 버드 예술 비평가는 "우리는 특정 명료성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내 눈으로 보면 세 번 째 그림에서나 "장미"가 보일 뿐 다른 그림에서는 도대체 장미를 그린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타이틀이 "장미"라고 친절히 알려주니 "장미"를 염두에 두고 찬찬히 살펴본다. 아, 장미는 어디 갔나. 작가는 보는 이를 왜 이렇게 좌절시키나? 톰블리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우리는 많은 번역서를 읽는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정확히 옮긴 직역과 이해를 돕는 해석으로 옮긴 의역이 있다. 어떤 번역이든지 그 원본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술을, 그림을 번역으로 생각해보면 사이 톰블리의 그림은 직역이 아닌 의역이다. 위의 그림에서 장미는 재현(직역)하지 않고 추상표현(의역)으로 보여준다. 중요한 원본성은 무엇일까? 장미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원인과 결과, 상징과 의미, 기표와 기표가 모두 흐려져 알 수 없고 그림의 전체적인 모습만 남아있는 톰블리의 그림에서 나는 기호화되지 않은, 얽매이지 않은 자유를 느낀다.

그림을 들춰보고 음악을 듣는 것이 빡빡한 일상에 새 숨을 불러일으키는 일인데,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골똘히 머리를 쓸 이유가 없다. 그냥, 그냥 바라보자. 나는 톰블리의 그림에서 기존의 기호학을 무너뜨린 쾌감을 맛본다. 감히 해석은 할 수 없어 다른 이의 감상평을 옮겨본다.

"한 색이 다른 색으로 흐르는 물의 정원, 장미는 피를 흘리고, 핑크색, 진홍색, 카민, 주홍색, 그 색이 피가 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의 색과 심장도 타오를 때까지 깨어나고,  아름다움은 죽음에, 영원은 일시적으로 버려집니다." - 수잔 우드.


사이 톰블리의 그림들을 살펴보자. 우리들 중 누가 감히 이런 그림을 작품이라고 내놓고 전시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부럽다. 참 부럽다. 그의 인생에 대해선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다 알려진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그의 인생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부정할 수 있는 그의 용기, 자유로운 그의 영혼이다. 어린 아이의 순수함이 드러나는 그의 그림이다.


https://gagosian.com/artists/cy-twombly/

Untitled. 1954. Wax crayon, gouache, colored pencle on paper. 19x25inch. MOMA New York.


아래 그림들은 손주들의 그림이다. 그 아이들은 사이 톰블리를 모른다. 전혀 모른다. 그러나 톰블리의 그림 세상에 접근해있다.

내 손주들은 색연필을 마구 휘둘러댄 그림을 자랑스럽게 내놓고 냉장고 문에 붙여달라고 한다. 어린 손주들의 순수함에 우리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 "와아~! 멋지다! 잘 그렸다!"를 연발한다.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우리 어른들의 마음이 아이의 순수함을 부러워하며 감탄하는 것이다.


우리집 사이 톰블리의 그림들 -  손녀의 그림


매거진의 이전글 메리 카사트 - 바느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