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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un 06. 2021

프란시스 베이컨 - 십자가 책형

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Francis Bacon - Crucifixion, triptych

프란시스 베이컨 - 십자가 책형(磔刑) 삼면화.

https://www.pinakothek.de/kunst/francis-bacon/crucifixion-triptychon-linker-teil

Francis Bacon - Crucifixion, triptych. 1965.

Oil and acril on canvas.  197,5 x 147 cm. Bayerische Staatsgemaeldesammlungen, Munich.


아들들이 중3, 중1 때 독일로 갔다. 영어도 독일어도 모른 채 이국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일주일 내내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시간표를 짰다.

농구, 축구, 미술, 악기연주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하면서 또래들과 잘 어울리고, 언어를 빨리 습득했다. 주말엔 바깥 나들이를 했다.


아이들은 미술을 작품감상이나 직접 그리는 것이나 모두 좋아하여 우리는 자주 미술관에 갔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관심있는 전시회가 열리니 함께 가자고 했다. 뮌헨 예술의 집(Haus der Kunst)에서 열리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전시였다. 1997년 1월, 촉촉한 습기가 이마에 달라붙어 살짝 얼어버리는 그런 날이었다. 추위를 뚫고 들어간 전시장에서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몽롱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내가 알던 미술은, 내가 봐왔던 그림은 루브르나 오르세이에 걸려있는 그림들이었다. 그 많은 그림중에 어떤 것이 명화인지 분간할 줄도 몰랐고, 파리의 미술관들이 세계 최고의 미술관인 줄 알았을 뿐, 내가 살고있는 독일의 미술계 흐름이 어떤지 그 언저리에도 접근하지 못했던 때였다. 뮌헨에 알테 피나코덱, 노이에 피나코텍, 렌바흐 하우스, 하우스 데어 쿤스트, 이런 곳에서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보던 유명 미술가들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독일생활 초기에 겪었던 기분좋은 문화적 충격과는 달리, 프란시스 베이컨 전시회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의 충격이었다.


미술감상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보다 먼저 나는 징그러운 것을 보면 얼굴을 찡그리고, 무서운 것을 보면 어깨를 움츠리는 여자였다. 놀란 나와는 달리, 아들은 베이컨의 그림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은 얼굴이 일그러져 사람의 모습을 찾기 힘들고, 육체는 도축된 동물의 모습이었다. 그런 끔찍한 그림을 중요한 무엇을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나는 미술 감상자가 아니라 자식이 해로운 것과 접할까봐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엄마였다.

"뭘 그리 심각하게 보고있어? 넌 징그럽지도 않니?"

"괜찮은데요. 이 사람, 이런 그림으로 미술계에서 인정받은 화가에요.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그린 것 같네요."

"인간의 모습이 이렇게 생겼어? 고깃덩어리 같다. 꿈에 보일라."


화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동성애자였다. 이성애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 당시의 나에겐 납득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이 애가 속에 이런 폭력성이 있나?' ‘그 좋은 그림들 다 놔두고 왜 이런 그림을 좋아하나?' '동성애자라는데 아무렇지도 않나?'

미술작품 감상을 하러간 관람객으로서가 아니라,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걱정의 무게는 나를 마구 짓눌렀다.

그동안 나의 교육철학은 아이에게 부정적인 언어를 삼가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아이의 관심있는 것을 매몰차게 빼앗아버리는 언행이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Kurt Donald Cobain)의 음악에 푹 빠져있는 것도 걱정하던 예민한 시기였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베이컨은 1909년 10월28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에 정착했지만 그곳에 혈연이 없었다. 베이컨은 어려서부터 천식을 앓았고, 16세가 되던 해엔 동성애자인 것을 아버지에게 들켜서 집에서 쫒겨났다. 1926년, 16세의 베이컨은 무작정 런던으로 갔다.  그후 베이컨은 베를린과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돌아와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모든 장소와 순간들이 베아컨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베를린에서 본 영화 <전함 포텐킨>에서 공포에 질린 수녀의 모습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고, 파리에 머물던 시절엔 푸생(Nicholas Poussin)의 그림에서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울부짖는 여인의 얼굴이 베이컨의 뇌리에 새겨졌다.


https://domainedechantilly.com/fr/accueil/chateau/les-galeries-de-peintures/les-incontournables-peintures/

Nicholas Poussin -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 c.1628-29, 147 x 171 cm
Château de Chantilly (Musée Condé)


베이컨의 그림에서 얼굴의 왜곡된 표현은 늘 입주변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있는 모습이다. 베이컨은 '외치는 입모양'에 촛점을 맞췄다. 입은 사람의 속을 가장 진실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나는 뭉크(Edvard Munch)의 <절규 Scream>를 기억하고 있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평생에 한 번쯤은 접했을 이미지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강렬한 이미지. 이유있는 절규를 이해한다. 그렇다면 베이컨의 초상화에 나타나는 절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절규하는 입모양은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

실존적 위기에 처한 사람, 공황상태로 우주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 모든 확실성에서 벗어난 인간의 모습, 그림이 내게 설명해주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사람을 인간으로 그린 것인지, 고깃덩어리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마음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천식환자, 동성연애자,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베이컨은 어떤 미술사조에도 속하지 않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형상이 일그러지고 왜곡된 초상화를 그렸다. 폐쇄된 공간에 있는 사람을 그렸다. 출구가 없는 방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인물을 통해 사회적으로 주변인일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강박관념을 표출한 것이리라.


베이컨은 삼면화 형식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3개의 판넬이 나란히 있는 그림은 종교화나 제단화에 많다. 그 내용도 대부분 종교적 이야기가 담겨있다. 첫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감상하면 논리적 순서대로 전개되는 종교적 스토리의 재현을 알게된다.

베이컨은 "십자가 책형"의 삼면화 그림을 1944년에 처음 그렸다. 1945년 4월에 처음 공개되었다. 6년간 지속되던 제2차 세계대전은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십자가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베이컨의 십자가 그림에도 예수가 등장할까? 베이컨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종교인, 기독교인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람의 행동에 불과합니다."

종교적인 의미는 없다. 사람의 행동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600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홀로 코스트의 공포를 반영한, 인간의 잔인성을 드러내는 그림인 것이다. 인물은 고대 그리스 여신 퓨리(Furies)를 대표한다고 말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acon-three-studies-for-figures-at-the-base-of-a-crucifixion-n06171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 94 × 74 cm(ea), Tate Britain, London.
 

모호하게 의인화된 생물체가 괴로움 속에 몸부림치는 형상이다. 이 끔찍한 삼면화로 베이컨은 인간 상태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작가로 이름이 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 특정 주제가 반복되었다. 동물의 시체를 닮은 인체, 비명을 지르는 인물, 이러한 십자가의 여러 버전들을 그렸다. 인간의 고통을 보편적인 규모로 표현하는 동시에 개인의 고통을 다룬다. 베이컨은 십자가를 웅장한 뼈대로 간주했다. 미리 결정된 이러한 형식은 지각적 감정적 연상에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

전통적인 삼면화는 주인공 형상을 가운데 패널에, 관찰자 형상을 양쪽 패널에 그린다. 그러나 베이컨의 삼면화는 세 개의 패널 각각 다른 기능을 보여준다. 기존의 어떠한 서식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공통된 관계를 드러낸다.


https://www.guggenheim.org/artwork/293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 198.1 x 144.8 cm each.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이 그림은 원화를 보지 못했다. 이렇게 사진으로만 본다.

도살장의 잔인함과 십자가 처형 사이의 연관성이 분명하다. 오른쪽 그림은 치마부(Cimabue)의 십자가 그림을 연상하게 된다.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은 동물의 도살된 시체처럼 펼쳐져있다.

이 그림은 패널이 세 개이면서 하나의 질서로 연결되어 있다. 검은 거울을 그린 배경이 비슷하고, 중단됨없이 연결된 듯한 커다란 윤곽선이 있다. 그러나 어떤 스토리나 재현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오로지 신체에 감지된 감각이 세 개의 그림을 삼면화로 묶어놓은 듯하다. 얼굴을 보면 왼쪽 그림이나 오른쪽 그림이나 모두 그 형상이 뒤틀려있다. 무너져내린 형상이다.

인체에 대한 베이컨의 생각은 이렇다. 그 자신이 한 말이다.

"우리는 육류이고 잠재적인 시체"라는 것이다.


 Crucifixion, triptych. 1965.

Oil and acril on canvas.  197,5 x 147 cm. Bayerische Staatsgemaeldesammlungen, Munich.


이 그림은 내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전혀 모르던 1997년 뮌헨 Haus der Kunst 전시 때 전시된 작품인데 이제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한 에피소드가 있다. 나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가 나치의 폭력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림이 전시된 방은 히틀러가 국가 사회주의 예술을 위해 예약된 홀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뮌헨 현대미술관에 상설전시되어 있다.

1962년 십자가 책형 작품과 비슷하다. 도살장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왼쪽 그림에는 시체가 침대위에 버려져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운데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동물이 각진 비계 구조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오른쪽 그림에는 두 남자가 어떤 장면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증인이나 동료 희생자를 등장시킨 의도라고 한다.


십자가 처형 삼면화 오른쪽 그림

오른쪽에 있는 남자의 팔뚝에는 히틀러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그려진 완장을 차고있다.

나치 완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평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베이컨 본인의 생각을 들어본다.

데이비드 실베스터,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베이컨의 작품 전시를 큐레이팅하고 황금 사자상을 수상한 후 베이컨과 인연이 닿아 22년 동안 여러 차례(9회) 인터뷰를 한 실베스터의 설명은 이렇다.

베이컨은 그의 그림에 밀폐된 방과 사적인 지옥의 괴물적이고 초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창조했다. 나치 완장도 그의 비전에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베이컨은 실베스터를 통하여 자신의 작업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알려왔었다.


2치 대전 이후 베이컨의 예술이 미친 영향은 전쟁에서 드러난 인간의 끔찍한 진실을 포착한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히틀러의 대량학살의 이미지는 예술가들의 상상적인 이미지를 넘는 공포였다. 피카소의 그림 <납골당 The charnel House>이 홀로 코스트의 악몽을 암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문제작 <십자가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이 처음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떨었다. 베이컨의 그림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를 표현하는 도전이었다. 그의 후기 그림에서 베이컨은 끝없는 공포 속에서 서로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나치가 아니었다. 그들의 범죄였다.



그림을 보면 첫인상이 참 끔찍하지만 실제로 원화를 보면 그가 사용하는 붉은색 - 빨강 주황 주홍 -은 벨벳의 고급스러움을 연상시킨다. 지금은 디지털 화면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지만, 내가 처음 루브르와 오르세이 미술관을 관람했던 1987년엔 오직 원화만 볼 수 있었다. 그뒤 1994년부터 독일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그림감상은 원화를 보는 것이었다.

전시회에서 본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전혀 알지 못했던 그림들이었다. 그야말로 맨 처음 그의 그림을 원화로 보게된 것이었다. 색감은 고급스럽고, 그려진 형상은 괴기스러웠다.  동물과 인간을 합쳐놓은 듯한 기괴함은 관람객에 대한 폭력과도 같았다.

피카소가 평면에 안보이는 부분을 펼쳐서 보여줬다면, 베이컨은 인물을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조합시킨 모습을 보여준다.

아래 그림은 그의 자화상이다.

https://www.francis-bacon.com/news/rarely-seen-triptych-publicly-exhibited-christies

Francis Bacon, ThreeStudies for a Portrait, 1976. Oil on canvas.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https://www.francis-bacon.com/artworks/paintings/homage-van-gogh

Homage to Van Gogh 1960 Oil on canvas 86 x 86 cm. Göteborgs Konstmuseum, Göteborg


1997년 뮌헨의 Haus der Kunst의 전시회에 걸렸던  베이컨의 고흐 초상화. 명화라고는 몇몇 종교화와 인상파 화가들 밖에 몰랐던 내게 충격을 준 그림이었다. 그 전시회에 99점의 베이컨 그림이 걸렸는데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반 고흐를 저렇게 묘사하다니 놀라지 않았겠는가?

뮌헨 현대미술관에서. 2020년 1월2일 촬영. room 15에 전시되어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 영국의 정치인, 철학자, 대법관, 특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명언  "아는 것이 힘이다"로 알려진 사람 프란시스 베이컨, 나는 그 베이컨만을 알고 있었다.


동명이인, 그림을 그리는 다른 프란시스 베이컨은 그의 전시회를 보게된 1997년 1월에나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과의 첫 만남은 놀라웠지만, 조금씩 알게된 그에 대한 스토리가 쌓여가면서 나는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이 풀어놓는 철학적 개념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림을 통해서 알려주는 여러가지 철학적 개념들이 더 쉬웠다.

우리나라에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리움 미술관에 <방안에 있는 사람>이 걸려있다.(지금도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다.)

몇년 전에 미술계의 큰 뉴스였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경매가격은 놀랍다. 뭉크의 절규를 뛰어넘은 경매 최고가였다. 자본주의에서 작품 가격을 논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작품을 어떤 사람은 재산 목록에 추가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감상 목록으로 꼽을 것이다. 작품 가격과 예술적 가치의 균형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은 예술적인 가치를 높게 평하고 싶다. 소유할 수도 없고, 거실에 걸어두고 감상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가 미술사의 흐름중에 큰 획을 그은 거물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 글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름을 알렸을 뿐, 그의 작품 세계는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그에 대한 연구는 다른 글에서 이어질 것이다.



다음 글 발행은 철학자 질 들뢰즈의 책 리뷰 <감각의 논리> 를 쓰려고 합니다. 이번 글에서 부족한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이야기를 보충할 계획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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