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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ul 10. 2021

에드와르 마네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비전문가의 그림 감상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5월1일부터 8월29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코로나 시기임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든다. 언론 기사는 이번 전시회에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 >이 왔다는 것을 빠트리지 않는다.


 지난 달에 한국전쟁(6.25) 71주년이 지났다. 그에 앞서 남편의 71번째 생일도 지났다. 그는 생후 9일째 신생아로서 6.25를 만났다. 매년 생일이 되면 출산의 경험이 있는 내가 남편보다 더 시어머님의 고통에 이입된다. 생후 열흘도 채 안된 아이를 품고 굴 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다니, 그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시어머니를 품에 안아주고싶다. 그냥 안아주고싶다. 아쉽게도 이미 영면에 들어가신 분을 실제로 안아줄 수는 없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전쟁의 학살 그림들이 있다. 처형, 학살, 전쟁, 이런 이름이지만 그 구성이 비슷비슷한 세 화가의 그림을 살펴본다. 순차적으로 보도록 한다. 먼저 고야의 그림이다.


Goyay Lucientes, Francisco

https://www.museodelprado.es/coleccion/obra-de-arte/el-3-de-mayo-en-madrid-o-los-fusilamientos/5e177409-2993-4240-97fb-847a02c6496c

El 3 de mayo en Madrid o"Los fusilamientos" 5 월 3 일 마드리드 또는 "처형" 1814. 268 x 347 cm. Museo del Prado, Madrid


1808년에 있었던 프랑스군에 대항한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 봉기에 대한 역사화이다.

이 그림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역사적 사건이 얽혀있다. 나폴레옹의 세력이 유럽을 뒤흔들던 시대가 이 그림의 기초가 된다.


1805년에 영국과의 해전에서 나폴레옹 군대는 영국의 넬슨제독에게 크게 패한다. 트레팔가 해전이다. 런던을 여행한 사람들은 내셔날갤러리 앞 트레팔가 광장에 위풍당당히 우뚝 서있는 넬슨장군의 동상을 보았을 것이다.

이후 프랑스는 영국에 대해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그때 나라 경제를 해상무역에 의존하던 포르투칼은 이에 따르지 않고 영국과의 교역을 계속한다.  화가난 나폴레옹은 포르투칼 침공을 선포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의 머리속에는 프랑스군대가 포르투칼에 가는 동선이 그려질 것이다. 스페인을 거쳐야 한다. 이미 청일전쟁의 역사적 경험이 있는 우리들에겐 이 침략전선이 더 확실히 그려질 것이다.

스페인은 길만 내주면 되었는가? 아니다. 먼길이므로 필연적으로 프랑스군의 스페인 주둔이 이뤄졌다. 게다가 스페인의 왕정이 탄탄하지 못했다. 스페인왕 카를로스 4 대신에 나폴레옹의 형을 왕으로 임명했다. 어느 역사를 보든지 주둔군이 남의  빌려쓰는 손님의 예의를 얌전히 지키는 일은 없다.  때도 프랑스의 스페인 주둔군의 만행은 결국 스페인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프라도미술관에 고야의 그림  점이 나란히 걸려있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스페인군은 막사내에서 꼼짝도 않고 아무런 전투력도 없는 시민군만이 프랑스군에게 대항했다. 부정부패의 귀족들은 프랑스군에게 협력했다. 소요는 곧 진압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잡혔다. 위 사진의 왼쪽 그림이 5월2일 장면이다. 오른쪽 그림은 5월3일 총살장면이다.

역사 이야기는 덮어두고 그림에 집중한다.

총을 겨누고 있는 쪽은 질서있고 체계가 갖춰진 군대의 모습이다. 총살 당할 사람들은 무질서한 혼란의 상태이다. 그 중에 흰 옷 입은 사람이 눈에 띠는데 이 사람을 잘 관찰해보자. 양팔을 벌린 모습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이다. 손바닥에는 못자국까지 그려져있다.

왼쪽 구석의 그림자를 보면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피에타의 모습으로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이 자신을 희생해서 스페인을 구해냈다는 메세지가 담겨있다.


Edouard Manet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https://www.manet.org/the-execution-of-emperor-maximilian.jsp

 'The Executionof Maximilian', 1868-9 Oil on canvas, 252 x 302 cm   Kunsthalle Mannheim, Germany


고야의 <1808년5월3일>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다. 이 또한 역사화로서 그림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본다.

19세기 제국주의 식민지 영토 확장으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1861년 영국, 스페인과 연합하여 멕시코에 군대를 파견했다.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산만해진 틈이었다. 1864년 프랑스가 멕시코를 지배하게 됐다.  오스트리아 태생 대공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요셉이 맥시코 황제가 됐다. 프랑스의 꼭두각시 황제인 것이다.

프랑스의 지배력은 점점 약해졌고, 남북전쟁이 끝난 미국은 프랑스군에게 철수를 요구했고, 1866년 나폴레옹은 이에 따라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 버려진 막시밀리안 황제는 맥시코 민족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1867년 6월19일 맥시코 중부 케레타로에서 장군 2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림을 살펴본다. 사형당하는 그룹과 총을 겨눈 병사들이 옆으로 나란히 선 구도이다. 병사들이 장총으로 희생자들을 건드릴 정도로 양쪽 사이에 간격이 없다. 다만 사람의 크기를 조금 작게, 조금 크게 그렸을 뿐 거리를 볼 수 없다. 재현에서 사실적인 공간의 원리를 해체했다.

앞서 감상한 고야의 그림에는 양쪽 그룹이 마치 영웅과 악당같은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마네의  그림에는 화가의 입장이 나타나지 않는 객관적인 보도와 같다. 그럼에도 막시밀리안 처형에 대해 4개의 회화와 1개의 석판화를 만든 것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한 마네의 암묵적인 비판이다. 1879년까지 공개 전시가 거부되었다.


https://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edouard-manet-the-execution-of-maximilian#

'The Execution of Maximilian'about 1867-8 Oil on canvas,193 x 284 cm
The National Gallery, London


마네가 죽은후 유족들은 캔버스를 조각내어 따로 팔았다. 드가(Degas)가 인수했던 조각을 1918년에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구입해 전시했다. 조각을 별도로 전시하다가 1970년대 후반에 위 사진처럼 하나의 캔버스에 결합했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구도가 독특하다. 위에 설명했듯이 양쪽 그룹의 거리 간격이 없고, 총을  병사들은  모습을 그림 앞면에 크게 배치했다.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는 집총한 병사들의 뒤편에 서있게 된다. 감상자를 그림속 현장에 참여시킨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 내가 서있는  역사 이야기가 더욱 실감난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Execution_of_Emperor_Maximilian#/media/File:Execution_of_maximillian_mejia_miramon.png

Print of the execution of Maximilian in Santiago de Querétaro, Mexico.

석판화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검열되었으며 마네가 사망 할 때까지 공개적으로 인쇄되지 않았다.


Pablo Picasso

https://www.pablo-ruiz-picasso.net/work-4020.php

Massacre in Korea. 1951. Oil on Plywood.  110X 210. Musee Picasso, Paris


피카소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1월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해 같은 해 5월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전에서 공개했다. 위에서 본 고야의 작품과 구도가 같다.

이 그림은 누가 봐도 민간인 학살이다. 그것은 설명이 필요없이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 민간인 학살의 주체가 어느 군대인지는 설왕설래만 요란할 뿐,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이 모두 다르다. 피카소가 공산당 당원이었다는 것을 내세워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군이 개입한 황해도 신천 양민학살이라는 설과, 노근리 양민학살이라는 설이 있다.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반미작품으로 반입이 금지되어있었다. 그림 해석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념논쟁으로 이견들이 속출했다.

신천의 좌우익 주민들의 충돌로 3만5천여명의 주민들이 사망했는데 북한이 미군의 신천학살이라고 주장했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그 말에 따라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반미작품이다, 공산당이 씌운 반미 프레임이다, 양측의 주장은 강하나 관람객인 나로서는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이 모호하다.

생각을 단순히 '피카소와 전쟁'으로 좁혀본다. 피카소는 평생동안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직접 전쟁에 참여하거나 군복무를 하지는 않았지만 예술가로서 작품속에 전쟁을 그렸다.  유명한 <게르니카> <납골당>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전쟁을 모티프로 삼은 그는 나중에 '반전과 평화' 이미지를 그렸다.

피카소 박물관 측은 이 그림의 역사적 사실관계가 모호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념을 넘어 인권을 호하는 피카소의 가장 중요한 평화주의적 작품  하나"라고.



전전 세대와 전후 세대가 섞여서 사는 이 시대에, 사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직접적인 전쟁이 없더라도 국제적으로 보자면 전쟁은 진행중인 이 시대에, 우리들 각자는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여러 해 전에 나의 숙모님이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는 가족들과 조문객들로 장례식장은 북적거렸다. 나는 약간 치매기운이 있는 고모님을 옆에 모시고 있었는데 고모님은 많이 불안해하셨다. 안심시키려고 손을 꼬옥 잡아드렸다. 알고보니 숙모님(고모에게는 친정 올케)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불안해진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 났나봐. 젊은이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네. 식구들이 여기 이렇게 다 모여있으면 어떡해. 우리도 빨리 피난을 가야지. 저봐, 군인들이 저렇게 떼져 다니잖아."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상황이 고모님에게는 똑같은 옷을 입은 군인들로 보였나보다. 웅성거리는 모습들이 난리가 나서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나는 고모님을 꼭 안아드렸다. 괜찮다고, 난리난 게 아니라고, 안심을 시켜드렸다. 괜히 멍해진 내가 특별한 방법도 몰라 그냥 "난리 안났어요."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난리 안났어요." "난리 아니에요."


슬펐다. 숙모님이 돌아가셔서 슬픈 것 보다는, 고모님이 치매걸린 것 보다는, 전쟁의 트라우마가 슬펐다. 치매걸려서 많은 기억을 다 잊으신 분이 60여년 전에 겪은 전쟁의 기억이 살아있다니.......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봤다. 철학자는 왜 예술론을 파고드는가? 철학이 인간 삶의 본질을 논함과 같이 예술도 우리들의 삶이 모티프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들은 왜 역사화를 그릴까도 생각해봤다.  화가란 자신이 속한 시대에 남들보다 더 정교한 현미경같은 눈을 들이대고 관찰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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