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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y 26. 2022

청기사파, 아우구스트 마케

아우구스트 마케 <숲길 위의 커플> 1913. 판지에 유채. 61.5x81.5cm. 렘부르크 미술관, 뒤스부르그, 독일.


나무가 무성한 숲속 길을 한 쌍의 커플이 나란히 걷고있다. 독일 표현주의 화가 마케(August Macke)의 종이 판지에 그린 그림이다. 화가의 다른 그림들에 등장하는 모델들도 저렇게 남자는 정장차림, 여자는 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거의가 다 모자를 썼다. ‘모자’는 마케 그림의 주요 모티프로서 모자 가게 진열장을 들여다보는 여인들의 그림도 여러 장 남아있다.

그는 유럽이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이 그림처럼 자연과 인간을 주제로 고요하고 행복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색감은 표현주의 특징처럼 다채롭지만 직선으로 화면을 분할하는 대신 부드러운 선을 사용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자연과 인간을 어떻게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숲은 무성한 듯 푸르고 나뭇잎도 몽글몽글 탐스럽게 부풀어 오른다. 걷는 길은 앞이 틔어 있지 않아 몇 걸음 더 걸으면 이 한 쌍의 커플은 숲속으로 숨어버릴 것만 같다. 빛을 받은 큰 나뭇가지는 여기가 숲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표식처럼, 길 안내처럼 밝고 환하게 빛난다.

보라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풍성한 나뭇잎 모둠인지 빈 공간인지는 애매하지만 아마도 공간을 묘사한 것 같다. 공간의 깊이가 느껴지고 그 깊이는 숲의 깊음을 상징한다. 노란 땅 위에 보라 색으로 길게 누운 그림자를 보자. 보색 관계의 색으로 그림자를 칠하는 인상주의 그림이 생각난다. 사람들이 왜 아우구스트 마케를 두고 후기 인상주의와 표현주의와 야수주의의 조합이라고 평했는지 알려주는 그림이다.

마케는 표현주의 운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칸딘스키의 철학적 구성에 특별히 관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림은 재현적이고, 생생하게 다채로운 개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세부 사항에 많이 연연하지 않고 완성된 구성을 함께 만들어내는 색상 부분에 더 중점을 두었다. 풍경 사진 찍는 것을 즐기던 마케는 자연 환경의 멋진 배경과 인물이 잘 조화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다.

표현주의 그림의 다채로운 색상처럼 사람들의 개성도 다양하고, 각기 다른 색이 어우러져 그림 한 폭이 완성되듯이 각기 다른 개성들이 어우러져 잘 조화된 한 쌍을 이룬다. 이 그림을 통해 문득 든 생각은 결국 ‘인간’에 머문다.


햇살좋은 5월의 테게른제(Tegern lake). 12.05.2022

아우구스트 마케는 아내와 함께 1909년 10월 31일에 테게른 호수에 왔다. 첫 번째 거주지는 빌라 브랜드였으며 크리스마스 이후 그들은 슈타우다커(Staudacher) 집으로 이사했다. 마케는 테게른 호수에서 1년동안 살았고 첫 아이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후에 그곳에서의 생활을 "목가적인 1년"이라고 회상했다. 호수의 조용하고 사색적인 시간은 창작에 많은 영감을 주었고, 그는 이곳에서 약 200여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비오는 날의 렌바흐하우스, 뮌헨. 25.05.2022

표현주의 Expressionism. c.1890-present

미술작품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는데 그 재현이 여러 방식들로 변화하게 되었고, 작품은 재현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표현주의 양식이다. 화가는 관찰한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표현주의는 특정 운동이 아니라 개인의 표현 스타일이다. 인상주의 다음에 등장한 현상으로 인상주의와 구분해보자면, 인상파는 자연(햇빛의 효과)만 재현하려고 했던 반면 표현주의 화가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보다 능동적이고 주관적인 형태의 현대미술이다.

화법의 특징은 강한 윤곽선과 대담한 색상이다. 구성은 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두꺼운 임파스토 페인트, 붓놀림은 느슨하고 자유롭다. 상징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감정적 스타일이 눈에 띈다. 그림을 통한 내면의 메시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표현주의는 독일 드레스덴(다리파 Die Brücke / The Bridge 1905-1913), 베를린(신 즉물주의 Die Neue Sachlichkeit /The New Objectivity 1920년대), 뮌헨에서 뿌리를 내렸다.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 / The Blue Rider 1911-1914. 뮌헨

뮌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912년 선언문 표지에 있는 칸딘스키 그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96년 뮌헨에 정착한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는 뮌헨에 자신의 미술학파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 화가 프란츠 마크도 중요한 창립 멤버였다. 설립된 지 3년 밖에 되지 않은 그룹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그림을 남겼고 미술 평론가들로부터 독일 표현주의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룹에는 알렉세이 야블렌스키(Alexei von Jawlensky),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프란츠 마크, 아우구스트 마케와 같은 많은 전위 예술가가 포함되어 있다.



왼쪽; 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III 콘서트> 1911. 캔버스에 유채. 77.5x100cm.

오른쪽;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댄서 알렉산더 사카로프본> 1909. 판지에 유채. 69.5x66.5cm.


렌바흐하우스의 칸딘스키 그림 방


왼쪽; 아우구스트 마케 <모자 가게> 1913. 캔버스에 유채. 54.5x44cm.

오른쪽; 프란트 마크 <푸른 말> 1911. 캔버스에 유채. 112x84.5cm.


작가 알기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1887.01.03 독일 메스헤데 출생, 1914.09.26 프랑스 피르테 레주르뤼스 사망)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이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핵심 그룹인 청기사파의 창립 멤버이다.

그가 태어난 후 가족은 바로 쾰른으로 이사했고, 13살 때 본으로 이사하여 그곳 직업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학문에 관심이 없었고 스케치를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건축가이며 아마추어 예술가인 아버지의 스케치는 마케에게 예술적 영향을 주었다. 친구 투아르의 아버지가 입수한 우키요에(일본판화)와 1900년 바젤에서 만난 뵈클린(Arnold Böcklin)의 그림도 마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에 다녔지만 마케는 그곳 교육이 상당히 구식이라 여기고, 진보적인 야간 미술교육원에서 다양한 그림과 판화작업을 배웠다. 1906년부터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후 튀니지에서 폴 클레(Paul Klee)와 루이스 모일리에(Louis Moillier)와 함께 색상에 대해 연구하며 유익한 2주를 보냈다. 1908년 첫 번째 파리 여행을 했다.

1910년 마케는 프란츠 마크(Franz Marc)를 통해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만났고 그들은 청기사파의 비객관적 양식과 은유적 관심사를 공유했다. 브라크(Georges Braque)와 피카소가 형태에 집중하기 위해 색상을 갈색과 회색으로 제한하는 동안 청기사파 화가들은 색상을 강조하고 상징적 의미의 추상을 시도했다.

마케는 생생한 풍경, 인물, 비유적인 장면을 만들기 위해 단순한 형태에 다양한 색상을 선호했다. 1911년에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청기사파 연감>의 출판에 자금을 기부했고, 이 책에 대한 에세이도 썼다. 1912년 파리에서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를 만난 것은 마케의 작품 활동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 만남 이후 마케는 들로네의 오르피즘(Orphism) 영향을 받았다. ‘오르피즘’은 입체파의 분파인데 정통 입체파가 엄격한 선의 구성을 중시한 반면 오르피즘은 화려한 색채를 추구했다.

마케의 작품은 다른 표현주의 작품에 비해 긴장감이 적다. 20세기 대도시 생활의 빨라진 속도나 시골 풍경의 평온함 모두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고요한 토론,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 야생 동물 관찰, 산책, 심지어 윈도우 쇼핑을 묘사한다. 인간이 만든 평화롭고 쾌적한 환경에서 현대적이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가 사망 전에 선택한 후기 그림들을 사람들은 후기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파의 조합이라고 평했는데 그의 작품 대부분에 넘쳐흐르는 밝은 색상 때문이었다.

1914년, 전쟁은 한창 피어나는 젊은 화가 아우구스트 마케의 생명을 앗아갔다.  친구 오토 솔타우(Otto Soltau)와 프란츠 마크처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했다.



https://brunch.co.kr/@erding89/189

https://brunch.co.kr/@erding8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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