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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03. 2021

여행, 자가격리

 기록은 멋진 기행문은 아닙니다. 그냥 일상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여행을 다녀왔다. 독일 에르딩과 스위스 취리히.

지금은 자가격리중이다. 비행기 탑승 72시간 전에 코비드 19 pcr검사에서 음성이 나왔고, 귀국후 재검사에서도 음성이 나왔지만 해외입국자이기 때문에 14일 격리중이다. 보건소의 담당 직원이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온다. 격리중 얼마나 힘드시냐고, 우울하지는 않느냐고, 심리전문 상담사가 있으니 어려운일은 곧 연락해달란다.


자가격리.

이 기간이 나에게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시기인지 짐작도못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여 차마 나는 자가격리가 좋다라는 말을 함부로 뱉기가 어렵다. 그러나 평생을 갈지자로 달려온 내게 강제로 내려진 이 쉼의 시간은 우울증 유발기간이 아니라 나의 삶을 제대로 누리는 축복의 시간이다. 온전히 나의 시간을 누리는 이 평화로움! 그렇다고 그동안 나의 관계자들과 부대끼면서 느껴왔던 시간이 괴로웠다는 뜻은 아니다. 혈족과 지인들 속에서 기쁨을 나눴고, 행복했다. 다만, 지금 누리는 이 격리기간은 내 스스로 챙기지 못했던 시간들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좋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립기도 하다. 이런 이중적인 감정!


뮌헨.

뮌헨 지도로 만든 나의 북아트 작품. 지도 뒷면에 즐겨 갔던 장소의 이름들이 적혀있다.


에르딩에 있으면서 뮌헨에 3번 나갔었다. 목적없이 시내를 배회한 하루, 온라인 예매가 잘 안돼서 기차표를 사러 역에 갔던 하루, 그리고 ‘뮌헨의 마리’를 만나러 갔었다. 이게 무슨 여행이람?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하기 전인 2019년 연말~2020년 연초에 다녀온 후 오래간만에 갔다. 남들처럼 즐거운 관광여행이 아닌, 그러나 그곳이라면 설렘으로 가슴이 콩닥거리는 여행이었다.


남편이 작년 독일의 마지막 날, 메르켈 총리가 코비드 19 팬데믹을 발표한 이튿날, 3월15일 코로나 전쟁터가 된 독일을 탈출한 이후로 1년 4개월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냉장고의 내용물들을 다 쏟아버렸다. 이것이 아주 큰 일이었다. 그냥 쓰레기 통으로 직행할 수 없는 음식물과 포장용기를 분리해서 다양한 용기들을 잘 씻어서 버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냉동고는 서랍이 열리지가 않아 코드 빼고 난 후 3일째되는 날에야 열렸다.


비즈니스 출장 목적인 남편은 독일의 수해로 세상이 떠들석하던 그 날 기차로 뮌헨에서 뒤셀도르프를 갔다. 예정대로라면 6시간이면 숙소에 도착하는 건데, 우여곡절 끝에 13시간 만에 목적지에 닿았고, 1박2일이던 계획을 하루 더 연기해야 했다.

우리 부부의 여행이 이런 상황이니 남들이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나는 괜한 심술로 남편에게 빈정댄다. “당신은 대 부호로군요. 여름별장에 가정부까지 데리고 피서다니니 말이요.” 뮌헨의 최고 기온은 섭씨25도 정도였고, 최저는 12~18도 정도였으니 이보다 더 좋은 피서지가 있을까?


‘가정부’라함은 자존감없는 나를 칭함이 아니다. 내가 자청한 자부심 강한 자리다. 당뇨환자인 그는 요즘 말인 ‘삼식이’를 넘어 저혈당으로 인한 간식까지 ‘오식이’인 셈이다. 먹거리 챙기는 일이 죽지않는 중요한 방법이라 내가 함께 한 것이다. 그는 당뇨와 내장지방과의 혈투에 몸을 내맡긴 불쌍한 남자이니 곁에서 보살펴야한다는 나의 선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따라 나선 것이다.

‘혈투’라니? 이런 상황을 말한다. 배둘레를 줄이려고 만보 걷기를 하면 저혈당이 와서 단당을 급하게 흡입해야하고, 독약 같은 단당을 마구 흡입한 결과로 배둘레는 그대로 당당히 버티고있으니 이건 당뇨와 내장지방과의 혈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당뇨병이라하면 혈당이 높은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저혈당이 더 무서운 병이다. 혈당지수가 그대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는.


뮌헨은 잊지못할 추억의 도시이다. 그곳에서 전혜린과 헤르만 헤세의 발자국을 찾아다니며 여러 해를 보냈던 곳이다. 꿈을 꾸기도 했고, 외로움을 곱씹기도 했던 도시, 우리 가족의 일상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맺혀있는 곳이다.

시청사가 있는 마리엔 플라츠(광장)를 내려다보며 브런치 작가 ‘뮌헨의 마리’씨와 마주앉아 담소를 나눴다. 암투병중인 그녀가 다른 암환우들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자신의 투병기를 낱낱이 기록하는 마음씀이 참 곱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다고 한다. 나는 완독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마도 투병중에 완독할 것 같다.


2021년 7월 뮌헨 마리엔 플라츠.


에르딩.


에르딩(Erding, 에르딩이 정확한 발음은 아니다. 현지인들 말할 때는 에딩, 에어딩,이렇게 들리지만 우리 식구들은 문자 그대로 에르딩이라고 한다.)


독일 뮌헨 공항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한국에  알려진 에르딩어바이쓰 비어(Erdinger Weissbier) 유명한 동네이다. 이곳에서 5년을 살았다. 1, 3 아들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었다.

매일 새로운 세상을 만났으며, 많은 꿈을 꾸었던 곳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들을 솜이 물에 젖듯이 빨아들였고, 몸과 마음도 함께 성장하던 시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40대 중반에 접어든 나로서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시기이기도했다. 결국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지만… 이뤄낸 것이 없어도 에르딩이라는 장소와 시간은 내 인생의 소중한 한 토막이다.


, 한 가지 남은 것이 있다면 내 생애 첫 책을 출간한 것이 에르딩시절이다. 여러 편의 서간문을 한국에 있는 남편이 출판해주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편지글들이었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지금은 사라진 책, 내게 한 열 권쯤 남아있는 책, 막내아들의 그림을 표지로, 노르웨이 오슬로의 비겔란트 공원에서 찍어온 구스타프 비겔란트의 조각품들 사진을 삽화로 쓴 책이다. <독일에서온 편지, 그리고 사랑>이라는.


에르딩의 고샅마다 내 삶의 흔적이 묻혀있는 그곳과 나는 아직도 인연을 끊지 못하고 드나든다. 익숙한 장소들, 낯익은 얼굴들, 꽁꽁숨겨둔 나의 흔적들을 만나는 설렘은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철이 바뀔 때마다 역향수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곳에서 많은 글을 썼고, 서툰 그림도 그렸다. 공원의 나무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며 잎새마다 새겨놓은 나의 언어들도 소환해본다. 그 잎새들 다 모아 한 줄 글로 엮고, 잔 가지에 매달아 큰 기둥에 붙이는 놀이에 빠진다. 에르딩은 내게 그런 곳이다.


남편은 에르딩집 거실 소파에 쭉 뻗고 누워 잔디밭 위에 떠있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이 참 편안하고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그도 아직 에르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7월 에르딩(독일 뮌헨공한 근처 도시)


취리히.


3박4일간 다녀왔다. 취리히 쿤스트 하우스에 전시관람을 갔고, 쓸데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하루는 호텔에서 책을 읽으며 온전히 쉬었다. 아인슈타인이 다녔던 에테하(ETH) 대학이 있는 취리히. 에테하 대학에서는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아이들 데리고 유럽으로 갈 때 남편은 아들을 에테하에 보내고싶어 하기도 했었다.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였지만. 스위스의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할 수 없어서 포기하기도 했고, 독일의 건전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독일로 간 것이다.

그때는 서울발 취리히행 직항이 있었다. 아들들이 유럽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취리히였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여행을 갔었다. 이번에는 혼자 취리히 거리를걸었다. 아이들과 함께 갔던 뮤직숍은 대대적인 공사중이라 문을 닫았다. 호수는 여전히 그곳에 있고 유람선도 떠다녔지만 배를 타지는 않았다.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수면을 넋놓고 보고있자니 어찌나 강한 빛이 나를 쏘아대는지 나는 빛을 맞아 하늘로 증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거리마다 온통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렸다. 발짝을 뗄 때마다 아이들의 발자국이 아른거렸다. 혼자 걷는 거리에서 나는 20년도 넘은 그 세월로 돌아가 아이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마침내는 아이들과 함께 취리히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에미란 그런 것이다!


쿤스트 하우스는 그 옆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금년 10월17일에 개관한단다. 내가 목적하고 갔던 르네 마그리트의 <리스닝 룸 ListeningRoom>은 새 건물로 옮길 준비중이었다. 취리히 쿤스트 하우스에서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풍경화 특별전, 클림트 전이 진행중이었다. 하루종일 쉬엄쉬엄 실컷 관람했다. 얻은 것이 많은 관람이었다. 계획은 하루만 쿤스트 하우스를 가고 이틀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려던 거였는데 이틀을 나갔다. 스위스의 교통카드 One day card 때문(덕분)이었다. 독일에서는 데이 카드가 어느 시간에 사든지 이튿날 아침 06시까지 유효하다. 그런데 스위스에서 표를 사고 자세히 보니 24시간 유효한 것이다. 내가 오후 2시에 표를 샀는데 이튿날 오후2시까지 유효하다고 쓰여있다. 그 표 한장을 가지고 내가 낮에 쿤스트 하우스를 다녀오고, 저녁에 남편이 사람 만나러 나갔다 오고, 이튿날 내가 다시 취리히 시내를 산책하고 2시까지 호텔로 돌아왔다.

오래된 부부란 이렇다. 함께 다니는 것보다는 각자 편한 대로 혼자 다닌다. 표값도 절약하고 말이다. 얼마나 함께 하고싶었던 사람이던가! 일년에 반을 해외출장 다니던 남편, 그나마 국내에 있을 때도 집에 머무는 시간은 짧고 지방출장을 자주 다니던 남편, (베이비붐 세대들은 이렇게 일했다. 미친듯이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가 오늘이다.) 어느 날인가는 그의 다리가 부러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던 남편, 그러나 이제는 함께 있는 것에 목매지 않는다. 그는 글, 일생의 대역작을 쓰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나는 미술관 순례에 시간을 보낸다.

(표 한장을 가지고 두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 범법, 규칙 위반인지는 모르겠다. 동시간에 두 명이 쓰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한 명인데, 괜찮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런던에 있을 때는 내가 데이티켓 끊고 나갔다가 일찍 들어오면 그것이 아까워 역에서 표사려고 하는 학생에게 물려주기도 했었다. 아들이 깜짝 놀라며 그것은 범법이라고 했다. 표 한 장을 팔 수 있는 것을 못 팔게 한 것이니 범법이란다. 그 논리도 이해는 간다. 그럼 나도 취리히에서 범법을 했던 것인가? 그러나 표를 팔면서 사용자를 명기한 것이 아니니 괜찮을 것 같다.)


이번 여행은 여행도 아니다. 여행은 일탈이 매력인데 이번 여행은 그냥 일상이었다. 일년 넘도록 비워둔 집의 냉장고를 정리하고 방치되었던 이불빨래를 하러, 당뇨병 환자인 남편의 먹거리를 챙기러 다녀온 살림살이 시간이었을 뿐이다.


무게감 없어서 휴대하기 편한 책 두 권을 읽었다. 조르쥬 바타유의 <마네>와 미셸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부피는 얇은데 읽기에 녹록한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쳇말로 머리에 쥐날 지경이었던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보다는 한결 수월하다.


*여행지의 유용한 정보, 멋진 방문처, 맛집, 신비로운 문화 이야기를 기대하고 읽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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