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글쓰기 연습
달걀로 바위깨기가 가능할까?
바위에 셀 수 없이 많은 달걀을 던지면 오랜 세월이 지나며 깨진 달걀 굳은 것을 새들이 와서 쪼아먹고, 더깽이 진 찌꺼기들이 햇빛에 갈라지다 비에 불어나다 그러면서 바위를 못살게 굴어 바위에 눈꼽만큼의 영향이라도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소설쓰기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소설을 쓰는 것은 가능할까?
달걀로 바위깨기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나를 지레 질리게 만든다.
그래도 나는 소설쓰기를 시도해본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한 소설 만들기를 시작했다.
소설에 대해 오래전부터 남몰래 꾸어오던 꿈이 있다.
배우지 않고, 길들이지 않고도 순전한 감성으로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 패배하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는 일이다. 만사 제쳐놓고, 살림 팽개친 채 매달리지 않고도 온전히 내게 주어진 한가로운 시간만 잘 챙겨서도 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는 일이다. 배움의 길에서 혼신을 다한 지식인들에게, 하루 25시간을투자하는 성실파들에게 가소롭게 들릴, 누가 들어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나의 수줍은 꿈이다. 세상 다 살고 간 후에 무덤 가에 피어나기도 어려운 아주 요원한 꿈이다.이 가소롭고, 황당하고, 요원한 꿈을 위해 나는가끔 내 방식 대로 습작을 한다. 미련한 곰의 재주부림 같은 습작이리라.
사물을 하나 정해 정밀 묘사를 한다.
나뭇잎에 대한 색깔을 적어나가기 시작하면, 초록에서부터 한도 끝도없는 온갖 색깔을 다 쓰게되는데, 붉은 녹슨 빛깔이라거나, 우거지 낀 오이지 빛이라거나, 애벌 칠한 철제품의 은빛이라거나, 백여가지도 넘는 나뭇잎 색깔들을 적어낸다.
어찌 색깔 뿐일까. 그 모양새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수십가지 형상을 연습장에 적어본다. 이러면서 나는 인상파 화가들이 나뭇잎 하나에 열 두가지 색깔을 다 들여놓는 채색을 이해하기도 했다. 점묘법으로 화폭을 채운 쉐라의 그림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적어놓은 나뭇잎의 색깔, 내가 적어놓은 나뭇잎의 모양을 화폭에 그리자면, 온갖 색깔들이 다 필요하고, 그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담으려면 수없이 많은 점들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다.
나무 하나의 모습을 공책 몇 쪽인가를 채우며 쓰는 연습이 끝나면 전체적인 얼거리를 만들기 위한 연습을 한다.인터넷의 여기저기에 소설쓰기 교실이 산재해있지만, 콘텐츠를 보는 것에 그쳤을 뿐, 한번도 그 문을 열어본 적은 없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짐작은한다. 우선 소설이 무언지 가르쳐 줄테고, 그 짜임새를 가르쳐주며, 골격 만들기에 살 붙이고 옷 입히기까지 친절히 가르쳐 줄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에도 갖춰야할 필수적인 구조가 있고, 그것에 벗어나면 무너질 위험이 있는 것이 소설이리라.
가끔은 나도 그 비법을 배우고싶다. 들여다보고싶은 유혹을 무시할 때의 기분은 꼭 당선될것만 같은 복권을 사지않고 돌아서는 기분이다.
나는 아직 누구의 그림도 들여다 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가 끄적끄적 장난질하는 연필장난의 그림, 미술학원에발을 들여놓지 않은 아이의 그림을 좋아한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 아이 자신만의 표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글을 쓰고싶다. 처음 잡아본 연필로 그린 그림 같은 글, 누구도 손질해주지 않은 크레파스의 첫 색칠 그림, 순전한 아이의 그림처럼 아무것에도 영향받지 않은 내 글을 쓰고싶다.
그러나 내 나이. 아무리 부정한다해도이것 저것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내 그림이나 글에는 데쟈뷰 현상이 나타나리라. 남이 쓴 글들도 이미 많이 읽었으니 무의식 중의 흉내내기가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흘깃이나마 들여다보았던 이론서들의 귀절들이 내 글쓰기를 간섭하기까지 한다. 연주를 듣고 ‘아, 저 사람은 아무개에게서 사사받았구나’하고 금방내 알아차리게 되는 악기 연주, 역시 같은 결과의 그림, 그런 모양새를 남에게 확연히 나타내는 글이 아니라, 도대체 이건 뭘 알기나하고 쓴거야 뭐야,하는 황당함을 듣더라도 나는 순전한 나의 글을 쓰고싶다.
내 나름대로의 글쓰기 연습 계획을 짠다. 예를 들어 ‘나뭇잎’같은 한 단어의 정밀묘사 연습이끝나면 소설습작에 들어간다.
여자인 내게 가장 유리하고 편안한 여성적인 글쓰기로 중편소설을 쓴다. 단편보다 긴 것이 중편이라는 오류를 경계하며 중편에 합당한 구조물을 세우고 여성의 섬세한 감각으로 야무진 집을 짓는다. 이 글쓰기가 방금 끝났다. 탈고후에 드는 허전한 마음은 감히 작가연(作家然)하는 건방짐이리라.
전혀 이질적인 것에 대한 적응을 위해서, 그리고 또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지 실험으로 남성적인 글쓰기를 연습한다. 일인칭 남자 주인공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으로 단편을 쓴다. 곁눈질로 보아온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을 테마로 잡고 시작했는데 완성까지 끌고가기엔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상상력을 풍부히 하고, 파스텔조의 빛고운 묘사를 위해 동화쓰기도 연습한다. 동화를 쓰는 사람들을 나는 늘 존경해왔다.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진자들이 부러웠다. 나도 아름다운 동화를 쓰고싶다는 생각을 자주했으나 어른의 찌든 때를 벗겨내기란 쉽지않은 일이었다.
실제 습작에 들어가기 이전의 계획짜기도 나혼자로선 힘에 겨운 일이다. 슬쩍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는다면 진일보하련만, 내 고집은 터무니없이 미련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글쓰기 연습에서도 그 미련한 고집을 부리며 혼자 끙끙 앓고 있다. 중편, 단편, 동화를 한 작품씩 쓰고나면 다음엔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소설속에서의 대화를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쓰면서 훈련한다. 시나리오는 단 한 컷도 빗나가선 안되고, 글을 읽는 이가 스크린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똑 같은 느낌을 가져야하므로 아주 능숙한 글쓰기가 요구된다. 글로서 영화의 화면을 그리는 것이니 어려울 수 밖에.
배움도 짧은 내가 글쓰기 연습부터 혼자 꿍꿍이 속으로 계획을 짜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글쓰는 작업이 피를 말리는 치열한 작업이라고 한다. 글쓰기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된다는 사람들도 많다. 허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찌어찌해서 어디까지 쓰기 연습을 하고 다음엔 또 이렇게 해야지, 이런 계획안을 세우는 일부터가 아주 즐겁고 행복하다. 쓰는 일이 고통이면 당장에 집어던져버릴 것이다. 잡문을 쓰든 작품을 쓰든 쓸 때의 내마음은 행복에 젖어있다. 써내려가는 동안 무지몽매한 내 머리를 쥐어뜯는 일이 자주 생기지만, 그 순간을 극복했을 때의 성취감이란…!!!
아이가 젖을 먹으며 영양가를 따지고 자신의 체격이 어떻게 자랄 것인가를 따지지 않는 것처럼, 나는 글쓰기가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에 쓴다. 글을 써서 발표한 후 내게 다가올 어떤 결과는 쓰기가 끝났을때 부수적으로 오는 것이지, 그 결과를 위해서 쓰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 아니라 행복한 유희인 나의 글쓰기 연습이다. 성공한 대가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가소롭게 웃어넘길 ‘글쓰기가 즐겁고 행복한 유희’라는 말은 방금 마악 입문한 초보자들이나 느끼는 감정일는지.
<행복해지는 약> 수록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