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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Feb 02. 2023

백정기 <악해독단嶽海瀆壇>

예술과 과학의 접목, 설치작품의 이해

<악해독단>은 본래 ‘오방토룡제’, 조선시대 서울의 동서남북 중앙의 다섯 방향에서 흙으로 만든 용으로 지내던 기우제의 제단 중 남방의 용을 모셨던 제단의 이름이다. 용산 미군기지 내에 유적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구체적 근거로 2000년대 초반부터 국립문화제연구소의 정식 조사가 진행, 2005년 악해독단의 주춧돌과 터를 발견했다. 제단의 주춧돌들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미군의 바베규그릴의  받침석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라져 유적의 보존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서울의 5개 방위중 남쪽은 풍수지리상 불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인데, 그에 더해진 바비큐그릴의 극심한 화기는 물과 관련된 기우제단과 상극을 이루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상징인 붉은 벽돌과 시멘트는 전통의 단절과 사람들의 무관심, 그리고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백정기 작가는 '악해독단'을 덮어버린 붉은 벽돌의 바비큐그릴을 우리가 허물어야할 거대한 벽이자 두고두고 기억해야할 치욕의 기념비로 인식했다. 사라져야 하지만 잊혀져서는 안되는 거대한 벽돌 기념비를 전시공간에 세우는데 재건하는 과정에서 벽돌의 틈은 바셀린으로 채웠다.

바셀린은 작가의 작업에서 보습과 치유를 상징하는 매체로 이용되어왔다. 시멘트 대신 바셀린을 통해 재건되는 벽돌 구조물은 단단한 견고성이 제거되고 소멸과 변화의 과정에 놓이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치유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다.


백정기 <악해독단> 2016.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 전시작품


용은 물의 왕. 1934년 조선총독부 자료 문헌에 묘사된 모습으로 토룡을 재현하고 몸통에 바셀린을 발라 흙을 마르지 않도록 보습한다.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방지하여 용의 기운을 강하게하는 주술적 장치이지만 동시에 과학적 현상을 가능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바셀린을 통해 유지되는 수분은 흙의 이온을 활성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전도체가 되어 토룡이 거대한 라디오 안테나가 되기도 하고 미세한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는 배터리가 되기도 한다. 이 작업은 현대와 그로부터 단절된 전통의 벌어진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이며 이는 관념과 실제,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의 태도와 맥락을 함께한다.

노자는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생명의 속성이고, 강하고 단단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다, 물이 충만한 상태는 약하지만 부드러워 다른 무리와 섞이는데 무리가 없지만, 반대로 메마른 상태는 강하지만 단단하게 굳어져 서로 부딪힐 뿐 섞이지 않는다고 했다. 토룡을 구성하는 흙은 대지를 상징하며, 기우제에서 토룡에 물을 뿌렸던 행위는 메마른 대지에 비를 내려달라는 주술적 목적을 가진다. 용의 입을 구성하는 버들 키도 기우제에서 ‘키 까부르기(우물이나 냇가에서 키에 물을 담아 키질을 함으로써 비가 내리기를 염원하는 행위)와 연관된다.

용의 뿔인 버드나무 가지도 본래 버드나무가 용이 변신한 나무라는 설화(삼국유사에 수록된 해통항룡)에서 비롯되었다. 말꼬리 털은 천마 즉 하늘을 달리는 말로서 번개와 구름 그리고 비를 관장하는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렇게 의미만으로 조합된 토룡이 용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형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토룡과 작품에 사용한 노란 왁스 디테일.

바셀린 자체는 물을 포함하지 않지만 보습이라는 기능을 통해 벌어진 틈(상처)을 치유하기 때문에 직가는 작업에 바셀린을 사용한다. 2007년 바셀린으로 만든 투구와 갑옷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8년 중동의 물부족 국가에서 진행된 기우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리움미술관의 '아트스펙트럼 2016'전시의 <악해독단>은 연결됨과 이어짐을 상징하는 전기 에너지, 라디오 전파와 같은 물리적 현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악해독단>이 이전 작품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셀린이 단지 치유를 의미하는 상징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토룡의 수분증발을 억제하여 전도체나 배터리로 기능케하는 ‘실질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토룡은, 마그네슘판과 동판을 직렬로 연결하는 그 중간에 소금물이 있으면 전기가 나오는 원리를 이용하여 흙을 소금물로 빚었다. 토룡의 전기에너지가 설치된 성장램프로 쑥을 키운다. 느티나무가 전파를 송출하면, 전도체 잉크로 그린 나무그림이 전파를 수신하여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벽에 나무그림 회화작품이 걸려있다.

라디오의 내용은 악해독단에 대한 서울대학 교수의 자문, 박사과정 학생들과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이고, 주파수만 맞추면 라디오의 청취가 가능하다. 토룡은 주술, 식물은 과학. 이 작품은 현대와 전통을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한다.


백정기 <악해독단> 나무, 목재, 전선, 송신기, 양초, 열전소자, 유리, 방열판.  2016. 리움 "아트스펙트럼" 전시.

백정기 작가는 분열된 사회를 메마른 대지로 상정하고 이를 해소해줄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느티나무를 마치 신이 깃들어있다고 여기는 당산나무처럼 육각 제단위에 모셨다. 육각 제단은 음양오행에서 물을 상징하는 숫자 6을 참고했으며, 물의 기운을 살리는 6개의 초를 주술적 장치로 사용했다. 신에 대한 공양을 의미하는 불백기쌀/불밝기쌀(불을 밝히기 위해 안치하는 쌀, 사진에서 초를 꽂아놓은 쌀)과 기도의 염원을 상징하는 촛불의 관념적 에너지는 열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에 의해 전류로 변환되어 라디오 송출기를 작동시킨다.

송출기에 연결된 느티나무는 악해독단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인터뷰를 라디오 전파로 송출하는 안테나 역할을 한다. 주술적 행위를 통해 과학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이 작업에서 관람객은 현대와 전통의 간극을 좁히려는 작가의 의도를 읽게된다.

작가는 예술가로서 늘 어떤 행위를 하고 있지만 단순히 예술적인 관념이나 미학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고민. 그때부터 과학적인 주제나 프로세스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백정기 작가.

2004 국민대학교 입체미술과 학사, 서울

2008 글라스고 미술학교 순수미술 석사, 글라스고, 영국.

수상 및 레지던시 

2015 두산 뉴욕 레지던시, 두산 갤러리, 뉴욕, 미국

2014 노마딕 아티스트 레지던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체나이, 인도

2013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2 송은미술대상(우수상), 송은아트스페이스, 서울, 한국

2011 아이파크 파운데이션 아티스트 레지던시, 커넥티컷, 미국




지방에 사는 우리는 서울 나들이를 갈 때마다 작은 오피스텔에서 묵는다. 창밖으로 남산이 보이고, 아래로 시선을 돌리면 미군부대 뜰이 보인다. 미군부대는 평택으로 이사갔다고 하지만 아직 그 터는 그대로 남아있다. 옆지기는 아이처럼 호기심이 많다. 자주 창밖을 내다보는데 미군부대의 빈뜰을 자세히 관찰한다. 그곳에 식물이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어느 날엔 건물 지붕이 누렇게 된 것이 땅에 파묻은 화학물질이 뿜어내는 독성의 영향인지, 그런 것에 관심이 많다. 나 또한 함께 창가에 서서 우리나라 수도의 심장같은 중심부를 넓게 차지한 그 터를 내려다본다. 도대체 저 땅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를 곰곰히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백정기 작가의 <악해독단>이 떠오른다. 그래, 누군가는 그 땅이 우리땅이라는 것을 잊지않고, 우리의 오래된 문화유산들이 훼손된 것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지.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아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물리적인 힘으론 불가능(?)하지만, 가슴속에 간직하고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래전 전시 설명을 했던 백정기 작가의 설치작품 <악해독단>을 소개한다.


남영동 오피스텔 창밖 풍경, 내려다 본 미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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