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것, 생각해보니 그건 나에게 보내는 나의 메시지이다.
내 가슴이 나에게 외치는 소리, 내 머리가 자꾸만 손을 건드려 간지럽히니 끝내는 긁어야 시원해지는 치료방법이다. 자꾸만 가려운 것은 고질병이고, 긁고 또 긁는 것이 반복됨은 틱이다. 그렇게 치료받지 못한 틱을 나는 자제할 수 없다.
글을 쓰는 것은 뒤죽박죽 섞여있는 지식의 편린들을 뜰채로 떠올리는 낚시놀이다. 뜬금없이 떠오르다가는 까맣게 잊을만큼 가라앉은 언어들을 휘적휘적 저으며 찾아내는 보물찾기이다. 꾹꾹 눌러놓았던 언어들이 감정에 버무려진 채 침묵하다가는 난데없이 폭발해버리는 발산이다. 잔잔히 평화롭게 흐르던 언어들이 출렁이다가 범람하는 강물이다. 화석화된 언어의 돌무덤이 무겁게 나를 짓누를 때 낑낑거리며 쌓인 돌을 쪼개고 돌들을 캐내는 작업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올리는 것은 독자와 나의 소통이 아닌, 오직 나를 흔들어 깨우는 행위가 맞다. 공개 플랫폼에 글을 발행하는 것, 그동안 나는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 내 글인줄 알았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나를 깨우친다. 이건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것을!
쓰는 글들을 모두 브런치에 올리는 것은 아니다. 타인이 읽어도 괜찮을 글들, 함께 읽고싶은 글들을 올린다. 지식면에서 크게 오류가 없는 글들을 올린다. 말을 뱉고 지나면 확증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글은 활자로 남아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더구나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은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정이 격해서 쓴 글이라거나, 관심 분야의 지식으로 쌓아두고자 정리해 둔 글, 굳이 남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가족 이야기들은 걸러가면서 올린다. '밤에 쓴 편지는 아침에 찢어버린다'는 그 흔한 이야기처럼 써놓고 발행하지 않은 글들이 컴퓨터 문서에 쌓여있다. 불완전하여 남들앞에 내놓을 수 없는 수줍은 글들이다.
2020년3월27일 브런치에 첫 글을 발행했다. 지금은 256개의 글이 공개되었다. 3년여동안 256이라는 수치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적정 수치의 기준이 없으니.
많이 읽힌 글이 가장 잘 쓴 글도 아니고, 좋아요가 많은 글들이 가장 잘 쓴 글도 아니다. 짐작도 예측도 할 수 없는 독자들의 방문이다.
3년여동안 나의 구독자가 185명이다. 알고있던 지인은 옆지기 단 1명 뿐이다. 아마도 브런치를 떠난것 같은 구독자도 여럿있다. 구독자 등록은 했으나 재방문은 하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가 구독하는 작가는 26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정도면 구독을 유지하기에 적당하다. 내가 구독자로 등록한 작가들 26명, 나를 구독자로 정한 185명(글을 안 쓰는 분도 많다). 서로 구독자는 아니지만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과 댓글을 남기는 작가들의 브런치를 일일이 방문하여 글을 읽기로는 최적의 수치이다. 숫자가 더 늘면 나에겐 큰 부담이 될 것 같다. 내글을 읽은 작가들의 글도 읽어보고 싶으니까. 일일이 찾아가 읽는데 한계가 있다.
통계가 보여주는 조회수는 2023.04.25일 현재 누적 290,545회이다. 조회수의 허상을 블로그(브런치 아님) 운영하는 지인들이 깨우쳐준다. '글을 열었다고 끝까지 다 읽는 것은 아니다.'는 말은 참 잔인한 말 아닌가. 열어본 글은 끝까지 스크롤해가면서 다 읽는 나로서는 '조회수'가 실제 읽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 씁쓸하다.
브런치에 발행한 글 중에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글은 매거진 "책을 읽다"에 올린 책리뷰글이다. (이제보니 한동안 책리뷰를 쓰지 않았다.)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세익스피어 <멕베스> 순으로 조회수가 높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조회수 3000이 넘는 글에 좋아요는 30여개도 채 안되고, 댓글은 10개를 넘긴 것이 드물다. 젊은 지인들이 이 현상을 분석하기를 '학생들이 리포트 쓰느라고 검색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근거가 있는 말인 것 같다. 어느 날은 같은 검색어로 “감시와 처벌“이 수 십개가 기록된다. 몇몇 풍속화도 그렇다.
이런저런 말들에 대한 귀동냥과 나자신의 판단으로 이제는 통계에 나타나는 수치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수치가 아니라, 발행된 글을 끝까지 읽어주는 독자가 귀하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다섯 손가락,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이라도 끝까지 읽는 구독자에게 고맙고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미술관 도슨트로 일할 때 나의 모토가 이랬다. "한 사람 앞에서도 100명 앞에서처럼 열성적으로, 100명 앞에서도 한 사람을 대하듯 꼼꼼하고 신중하게." 매번 이런 신조로 관람객들을 대했다. 15년간 관람객이 1명이든 100명이든 구분없이 한결같이 알려줘야 할 것들을 설명했다. 그런 마음으로 브런치를 대한다. 누구에게 읽히기를 바라며 쓰는 것이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수단으로 글을 쓴다. 내가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쓰는 것이다. 그렇게 쓰는 글이 다만 몇 명 소수의 구독자와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기쁘고 또 기쁜 일이다.
지난 해 가을 안경을 새로 맞췄다. 평상시 쓰는 것과 글 읽을 때 쓰는 것, 이렇게 두 개를 새로 했다. 특 초고압축 렌즈 안경을 한꺼번에 셋이나 하기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돈울 아끼느라 썬 글라스는 새로 맞추지 않았다.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쓰기엔 이전 돗수로도 괜찮다. 읽고 쓰는 일을 언제까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침을 먹으며 옆지기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책을 못 읽게 되면 어떡하지?”
“소리로 들으면 되지.”
나는 이미 오디오 북을 듣고 있는데 원하는 책을 자유롭게 고르기는 어렵다. 아이패드로 읽는 e-book은 좋다. 편안한 큰 활자로 읽지만 그러려면 크기가 정해진 화면이니 계속 스크롤을 바쁘게 해야한다.
읽는건 그럭저럭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럼 글쓰기는???
다행히 컴퓨터 자판을 안보고 타이핑 할 수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글은 컴퓨터로 쓰면 될 것이다. 연필 쥘 힘이 약해져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못하면 어떡하지?”
“………”
아직은 읽고 쓸만하다. 아직은 생각이란 것도 하면서 산다. 아직은…
아직 할 수 있는 읽기와 쓰기 덕분에 부지런히 “브런치 스토리”에 드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