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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May 21. 2023

김환기의 파란 점-천지인天地人

이 글은 화가 김환기의 작품에서 단색화, 파란색, 점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그의 구상화와 다양한 작품들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미술행위가 사물의 재현에서 시작하여 마음속 생각을 그리는 추상표현주의로 변화하게 되었고, 그 이후 우리가 미술의 본질에서 너무 멀리 왔다, 다시 미술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 이후 회화에서 일체의 환영적 요소가 사라지고 단순한 화면구성과 단색의 회화가 등장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 대두된 미니멀리즘 아트, 모노크롬입니다.

미니멀리즘은 인간으로서의 작가 자신을 지우고 재료의 물성과 작품의 존재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작가는 아이디어만 제시하고 작품은 공장에 맡겨 산업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합니다. 이는 결과적인 작품만 보는 시각적인 서양의 미술이지요.

한국에서도 미니멀리즘, 모노크롬은 1970년대 초반에 싹트기 시작하여 중반에 접어들면서 큰 물결을 이루게 되는데 우리는 모노크롬이라고 칭하지 않고 “단색화” 라고 합니다. 모노크롬Monochrom을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한가지 색깔, 단색인데요, 서양의 모노크롬 회화와 한국의 단색화에는 실제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노크롬과 단색화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한국의 단색화는 서구에서 출발했지만 40여년 연륜이 쌓이면서 한국의 독자적 양식으로 꽃을 피우고 뿌리 내렸습니다. 1990년대까지도 "Korean Monochrom Painting"이라 하던 것을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서양에서도 이를 발음 그대로 “단색화 Dansaekhwa” 라고 일컬으며 한국의 독창적 사조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모노크롬과 단색화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서양의 모노크롬, 미니멀 회화가 시각적이라면 한국의 단색화는 정신성, 촉각성, 행위성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지닙니다.  미니멀리즘이 사물의 물성에 접근한다면 단색화 미술은 예술과 자신과의 합일을 이루는 몰아지경의 정신상태에 이르고자 합니다.

미니멀리즘이 머리에서 나오는 개념을 중시한다면 단색화는 몸에서 나오는 기를 중시합니다. 결과적인 작품뿐 아니라 수행과도 같은 구도적인 작업과정을 중시합니다.

미니멀리즘의 ‘텅 빈 회화’와 달리 단색화는 치열한 사유와 노동의 흔적, 침묵의 깊이가 우러나옵니다.  

이렇게 모노크롬 혹은 미니멀리즘과 단색화의 다른 점들을 이야기했는데요, 어떻게 해서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작업 방식이 다른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신성과 촉각성과 그리고 행위성이 단색화의 고유한 특성인데요, 이건 작업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십, 수백 번 작가의 손을 반복적으로 거쳐서 드러난 색의 결이 오롯이 느껴지는 단색화만의 특성, 같은 검정색 흰색이라도 한번의 붓질로 그린 것과, 수십 번 겹겹이 칠한 색의 밀도는 같을 수 없겠지요?

한국의 단색화가들은 자기만의 표현 기법을 찾기 위해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평생 수행하듯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정신적 초월 상태를 캔버스에 고스란히 옮긴 것입니다. 마치 수도승처럼 제 몸을 혹사하면서 오랜 세월 손의 노동을 바탕으로 자연의 이치를 담는 작업을 지향해왔습니다.

그려진 형체에 의의를 두기보다는 그리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정신을 중시 여기는 작품이 바로 단색화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단색화 설명을 하면서 왜 그렇게 수행이라거나 정신성이라는 말을 강조했는지 직접 작품을 감상해보시겠습니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김환기 작가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유학한 후, 해방 후에는 한국 최초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한국 모더니즘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마흔 네 살에 파리로 유학을 갔는데요, 달 구름 새 산, 이런 한국의 자연과 달항아리 같은 고미술의 모티프들을 반구상으로 그렸고. 반추상의 유화와 질감이 두드러진 마티에르 작품들도 그렸습니다.

50세가 되던 1963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가서 힘이 넘치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회화들을 보고 뉴욕행을 단행합니다. 뉴욕시기에는 물감의 번짐 효과, 수채화 같은 맑고 투명한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1970년부터는 캔버스 크기가 아주 커지고, 전면점화가 주를 이루고 완전추상으로 변합니다. 이 때,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라는 시를 마음속에 노래하며 만든 시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탄생하죠.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Where, in what from, Shall we Meet again.> 1970.

캔버스에 유채. 236x172cm. 개인소장. 1970년 한국일보 제정 한국미술대상 제1회 대상 작품.


이 작품은 전면 점화입니다. 김환기의 점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봅니다.


김광섭의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6월 일기에는 마산에서 친구가 보낸 편지에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고 했다. 뻐꾸기 소리를 생각하며 하루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고 씌여있습니다. 그리고 9월 일기에는 친구들, 죽은 친구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 일기 내용을 생각하며 그림을 볼까요? 이 많은 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생각이 나시죠?

<저녁에>라는 시에 나오는 하늘의 별, 별은 하늘에 있죠? 친구의 편지에 쓰여진 뻐꾸기 소리, 뻐꾸기는 땅에 속하구요, 늘 그리운 친구들은 사람입니다. 예, 이렇게 김환기의 그림에 찍혀있는 점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의미를 품은 점들이죠, 천지인天地人이 들어있는 우주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뻐꾸기 소리를 짚어보면, 소리에는 파장이 있잖아요? 이 점들의 엷은 번짐현상이 마치 소리의 파장같이 느껴지지 않나요? 이렇게 많은, 화가의 가슴속에 가득찬 상념들을 캔버스에 점으로 옮기면 캔버스가 점점 채워지면서 가슴 속에 있던 생각들은 차츰 비워지게 되는 일종의 구도적인 작업이 바로 이 점화입니다. 작품과 작가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지요.

김환기에게 점은 새로운 추상을 위한 조형의 출발점이었고, 그에게 점은 지상의 뻐꾸기 노래, 천상의 별,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동양철학인 천지인의 합일입니다.

<하늘과 땅> 1973 24-IX-73 #320  263.5 x 206.5cm.  현재 호암미술관 전시.

김환기작가의 작품 경향은 울림을 연상시키는 서정성과 소재와 형식의 특성에서 우러나는 한국적 요소, 자연에 대한 시적이고 관조적인 태도가 특징입니다. 파리 시기를 거치면서 주로 푸른 색채로 일관되었는데요, 한국의 파란 가을하늘, 동해바다의 푸른 물빛이죠.

1957년 니스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한 김환기는 자신의 작품의 주요 색인 푸른색 과 흰색이 한국의 자연과 도자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다.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 아니라 동해 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니스에 와서 지중해를 보 고... 다만, 우리 동해 바다처럼 그렇게 푸르고 맑지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결을 좋아합니다.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백의민족이라 부르도록 흰빛을 사랑하고 흰옷을 많이 입었습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사는 우리들은 푸른 자기 청자를 만들었고, 간결을 사랑하고 흰옷을 입는 우리들은 흰 자기 . 저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김환기,「片片想」,『사상계』, 1961,9월호.

1973년부터는 주로 세 가지 이상의 빛깔이 중첩된 파란색을 사용해 색을 단순화시키고 대신에 화면에 선을 도입하여 구성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가 작고하기 1년전에 제작한 이 작품 <하늘과 땅>은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한국의 파란 가을하늘, 동해바다의 푸른 물 색인 한국적 파란색으로 거대한 화면을 하나하나 점으로 찍으면서 작가의 가슴속에 있는 상념들이 캔버스에 옮겨집니다. 김환기의 점화들이 그렇듯이 캔버스가 점점 채워지면서 가슴속의 생각들은 차츰 비워지게 되는, 일종의 구도적인 작업입니다. “무념무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일종의 수행과정이지요. 이점이 바로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다른, 서양의 모노크롬과 다른 한국 단색화의 특징입니다. 완벽한 단색의 추상화인 이 작품은 가운데 낮은 구릉의 능선같은 흰 선들 때문에 마치 하늘과 땅을 그린 듯 보입니다.


저녁 하늘의 별은 한 시인(김광섭)의 시詩가 되었고, 노래(유심초)가 되었고, 그림(김환기)이 되었습니다. 예술적인 영감은 여러 사람들의 가슴속을 옮겨다니며 새로운 창작품을 만들어내지요. 여러분은 이미지를 볼 때 그 이미지에서 언어적인 단어들을 추려낼 수 있으신가요? 반대로 문자, 말 등 그 언어에서 이미지가 그려지는지요? 리듬이 흥얼거려지는지요?

소설을 읽을 때 그 내용이 내 눈앞에 영화장면으로 쫘악 펼쳐지고, 그림 감상할 때 그림이 주는 메세지가 몇 개의 키워드로 읽혀지기도 하지요. 그 낱개의 단어들을 모으면 詩가 됩니다. 두서없이 흥얼거리는 리듬을 노트에 정리하면 음악이 됩니다.  해보세요!



지금 호암미술관에서 김환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김환기-단색화, 환기블루, 점, 詩, 이런 것을 엮어서 생각해본 것입니다. 작품앞에서 작품을 함께 감상하며 설명하면 더 좋았을테지만... 아쉽게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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