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의 그림 읽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3/3c/William_Henry_Fisk_The_Secret.jpg
윌리엄 헨리 피스크 <비밀> William Henry Fisk <The Secret> 1858. 캔버스에 유채.
로이 마일즈 Roy Miles 개인소장.
그림 속엔 사랑하는 남녀, 나무 덤불 사이에 숨어 엿보는 소녀, 저 멀리 뒤쪽에서 팔을 휘젖는 배불뚝이 남성이 등장한다. 좀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뚱뚱한 남성 옆쪽으로 소풍객들이 풀밭에 자리잡고 앉아있다. 아마도 한 가족의 나들이인 것 같다. 여기서 장성한 딸은 자리를 이탈하여 몰래 남자를 만나고 있다. 남자의 차림은 꽤 부자로 보인다. 비밀스러운 만남에 푹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덤불 속의 아이를 보자. 동그란 눈이며 갑자기 올라간 손이며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이다. 왜 놀랐을까? 남녀가 몸을 밀착시키고 껴안은 모습이 소녀를 놀라게 한 것일까? 이런 상상은 가족에게서 벗어나 숲속을 향하는 언니를 소녀가 살곰살곰 따라와 엿보는 중에 맞닥뜨린 상황일 것이다. 이런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의 순진함이리라.
달리 생각해보자. 소녀가 엿보는 것이 아니라 밀회를 지켜주는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 숨겨진 덤불 속 연인들은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다. 언니는 이번 가족 소풍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미리 알렸다. 몸을 숨길만한 작은 덤불들이 에워싼 장소이니 사람들 눈을 피해 만나자고 둘이는 계획을 세웠다. 엄한 아버지에게 들키면 큰일날 테니 동생에게 망을 보아달라고 부탁했다.
덤불 속 소녀의 놀란 눈을 보라. 눈동자의 방향이 남녀를 향해 있지 않다. 곁눈질이다. 저쪽에서 아버지가 쫓아오는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연인들은 아버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앗, 이쪽으로 오시네.’ 다급한 소녀는 ‘안돼, 안돼’하고 급박한 손짓을 한다. 아버지는 ‘너희들 거기 있는 것 다 알아.’하며 밀회를 말리는 듯 팔을 휘저으며 뒤뚱뒤뚱 쫓아온다. 이 구성은 마치 시간 속에 정지된 순간을 얼어붙게 한 것처럼 비밀과 발견 사이의 긴장감을 능숙하게 포착했다.
작가 피스크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정기적 전시를 할 때 그곳에서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와 친구가 되었다. 라파엘 전파 초상화의 특징 중 하나는 꽃으로 뒤덮인 배경인데 피스크의 <비밀>도 그와 비슷하다. 숨어있는 한 쌍의 연인들을 초록의 배경으로 감쌌다. 촘촘하게 채워지고 세심하게 재현된 자연의 자세한 부분은 역시 세심하게 칠해진 인공의 세부 사항과 뒤섞여 있다.
<비밀>은 인류를 매료시켜온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 욕망, 배신이라는 주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도록 초대한다. 능숙한 붓놀림과 세심한 디테일을 통해 작가는 우리를 열정과 위험이 얽혀 있는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우리를 그 불가사의한 매력에 사로잡히게 한다.
피스크의 <비밀>은 관람자들의 상상을 풍부하게 해준다. 엽편소설 한 편 쓸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밀회가 들통나게 되면 연인들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것이다. 아니, 배짱이 커진다. 아예 잘됐다. 기왕에 들킨 것이니 정당화시키자는 용기가 난다. 어떤 스토리가 맞을까? 정답은 없다. 덤불 숲속으로 스며든 피스크의 연인들, 밀회는 애틋하다.
작가 알기
윌리엄 헨리 피스크(William Henry Fisk, 1827. 영국 호머톤 출생, 1884.11.13 영국 햄프스태드 사망)는 일생동안 화가, 제도가, 교사로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또한 런던과 지방에서 인기 있는 대중 강사였으며 예술에 관한 작가이기도 했다.
아버지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로얄 아카데미 스쿨에 다녔다. 1843년에 왕립외과대학의 해부학 제도사(anatomical draughtsman)가 되었고, 새와 침팬지의 근육 조직에 대해 색연필 그림을 많이 남겼다. 1846년부터 전시를 시작했으며 1849년에 발모럴Balmoral에 초대되어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수채화를 그렸다. 그 결과 4점의 작품이 선택되어 왕실 컬렉션에 남아있다.
1856년에서 1863년 사이에 그가 브리티시 인스티튜트British Institute에 전시한 작품은 주로 풍경화와 정물화였다. 1850년대 후반부터 1873년까지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시했던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주제로 점점 더 관심을 돌리면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다. 1850년대 후반에 그는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와 동조했고 그룹의 회원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비밀 The Secret>이 가장 라파엘 전파 작품 스타일이다. 1860년대에 피스크는 사우스 켄싱턴 뮤제움(현재 Victoria & Albert Museum)에서 남부 법원의 상층부를 둘러싸고 있는 아케이드 켄싱턴 발할라Kensington Valhalla를 장식할 작품을 의뢰받았다. 일련의 위대한 예술가 초상화의 일부로 로렌조 기베르티Lorenzo ghiberti(1378-1455)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를 묘사하는 모자이크 디자인이다. 기베르티 그림만 모자이크로 복제되었지만 피스크의 전체 크기 유화 그림은 둘 모두 박물관에 남아있다. 1863년에 그린 피스크의 그림- 로베스피에르가 암살 위협을 받은 희생자의 친구들로부터 편지를 받는 그림이 프랑스 혁명 박물관(Le musé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에 남아있다. 그 그림으로 인해 피스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전시 경력은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1873년에 왕립 아카데미에 마지막으로 제출하면서 끝났다. 피스크는 1884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하이게이트 묘지 서쪽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