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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Jun 24. 2024

서양미술의 자포니즘

일본 예술에 대한 서양의 매혹은 각각 쉬느와즈리Chinoiseries와 튀르케리Turquerie로 알려진 중국 및 중동 장식 예술에 대한 초기 유럽 패션을 따랐다.


튀르케리(turquerie) 양식

튀르케리(turquerie)는 16~18세기 서유럽에서 발달한 튀르키예 스타일의 예술이다. 많은 서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중심에 있던 튀르키예의 이국적이고 아직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에 매료되었다. 음악, 미술, 건축 등 튀르키예의 제품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유행했다. 이 현상은 프랑스-오스만 동맹(1536년)으로 오스만 제국과 유럽 국가 간의 상업 및 외교 관계와 함께 발전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스타일뿐만 아니라 생산 방법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특히 그림은 생생한 색상과 강한 대비로 오스만 제국을 묘사하여 이국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쉬느와즈리(chinoiseries) 양식

17세기 유럽에 나타난 중국 스타일 현상으로 18세기에 동아시아 지역과 무역이 증가하면서 대중화되었다. 장식예술, 정원, 건축, 문학, 연극, 음악 분야에서 동아시아 전통을 유럽식으로 해석하고 모방한 양식이다. 18세기 미술 시장에서 주로 거래되었던 품목들은 귀족 저택의 쉬느와즈리 실내 장식을 위해 사용되던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병풍 그리고 옻칠 공예품 등이었다.

특징은 화려한 장식, 소재 중점, 비대칭성, 자연과 여가의 즐거움에 초점을 둔 로코코 스타일과 유사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다가 차츰 그 인기가 사그러들었다.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1839-1842)으로 무역이 중단되었고, 동양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었다.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초 미술계를 신고전주의 미학이 주도하면서 로코코 미술과 유사한 쉬느와즈리 양식은 점차 소멸되었다. 중국과 일본 유물의 거래가 중단되었다.

19세기 말, 다시 영국과 중국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시누아즈리 양식이 부활했다.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영광을 영국에서 다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자포니즘 (영Japonism, 프 japonisme)

프랑스 사회에서 자포니즘 초기에는 중국과 일본은 하나의 문화권으로 인식되었다. 중국과 일본이 미학적 가치를 공유한다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유물들은 동북아 문화를 대표하는 중국것으로 보여 쉬느와즈리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 공예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프랑스 사회는 일본 미술과 쉬느와즈리를 분명하게 구별하기 시작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미술품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확산됐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절단이 처음으로 참여하여 일본 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쉬느와즈리와 자포니즘의 구분이 명확해졌다. 1862년  런던 만국박람회 때는 일본 주재 영국 대사가 주선했고, 1867년 파리 박람회는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중국의 사상, 정치 제도, 풍속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지식 사회는 중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일본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영국이 응용미술 개혁에 몰두한 반면, 프랑스는 응용미술의 질을 높이는 데 몰두했다. 이런 경향으로 프랑스 예술품은 영국 산업에 가려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박람회에 전시된 일본 공예품들은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새로운 디자인의 원천이 되었다.

박람회 참가는 일본이 세계 무대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다. 유럽에 일본 사물에 대한 감각을 확립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이 서구에 문호를 개방했을 초기에는 주로 외교관들이 방문하였다. 외교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이국적인 일본 문화를 소개했다. 그 무렵 서구의 문화는 여러가지 의미로 전환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이래 쌓아온 가치관은 그리스도교이며, 유럽 백인남성이며, 중산층 계급 이상의 지배층에 부합한 가치관이었고, 그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여러 종류의 이의가 제기되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이 봉기했던 프랑스 혁명 이래, 19세기는 각국에서 정변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로, 이 혼돈 속에서 유럽은 일본과 만난 것이다. <자포니즘, 환상의 일본>마부치 아끼코 지음/ 최유경 역. (주)J&C, 2004.12쪽.


왼쪽; 가츠시카 호쿠사이 Katsushika Hokusai <붓꽃과 메뚜기> 1833. 채색퍈화. 파리 기메박물관.

오른쪽; 펠릭스 브라크몽Félix Bracquemond <오리들Sarcelles> 1853 동판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위의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브라크몽의 판화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전경, 중경, 원경을 순차적으로 배치하는 서구 회화의 전통적인 선 원근법 대신 브라크몽의 판화에서는 전면에 여러 개의 대상들이 수직적으로 배치된 방식이 사용되었다. 화면 전반부에 위치된 대상들이 테두리에 의해 잘려진 형태로 배치되면서 서로 비대칭적인 형상을 띠고 있다. 사물의 양감이 현격히 축소되면서 평면적인 화면이 전반부에 배치된다.

모티프의 차용 혹은 모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자포니즘 연구가들은 "차용"과 "모방"을 부정한다. 1850년대 이후 프랑스 모더니즘 작품들과 일본 우키요에 판화 간의 양식적 유사성은 한 쪽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시각 예술의 발전이 같은 방향으로 진행된 결과라고 한다. 컨버전스(convergence)의 개념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일본 예술품에 대한 국제 구매자를 유인하려면 차별화되고 식별 가능하며 이국적이며 유럽인에게 매력적인 공예품을 만들어야 했다. 외국 바이어의 수요에 맞춰 공예품이 점점 더 많이 생산되었고, 이러한 전문 미술품 시장은 더욱 비즈니스 지향적으로 변했다. 일부 예술가들은 외국 바이어의 요구에 적응하려는 노력으로 일본 미술의 아름다움을 잃고 일본 미술의 품질이 저하되었다고 한탄했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에밀 졸라Emile Zola> 1868, 캔버스에 유채, 146.5 x 115 cm.

오르세이 미술관, 파리, 프랑스.


왼쪽 배경에는 풍경과 나뭇가지 위의 새를 묘사한 일본식 병풍의 한 면이 보인다. 오른쪽 배경에는  우타가와 쿠니아키(Utagawa Kuniaki II)의 우키요에 작품 <아와지방 스모선수 오나루토 나다에몬(Ashû Ônaruto Nadaemon)>(1860)과 마네의 <올랭피아Olympia>가 나란히 담긴 액자가 걸려있다. 이러한 오브제는 배경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초상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마네가 <올랭피아>를 내걸었을 때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고 비난을 받았으나 졸라는 마네를 옹호했다. 마네를 위해 출판한 브로셔(1866)에서 졸라는 <올랭피아>가 마네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마네는 졸라의 열렬한 지지를 고마워하며 이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제안했다.

배경의 양쪽 두 그림은 선명한 세로 선을 그으며 또 하나의 직사각형을 만들어낸다. 그 검은색 직사각형을 배경으로 에밀 졸라의 상체가 그려져있다. 액자 속 스모선수가 걸친 가운과 졸라의 까만색 코트가 서로 연관된 느낌이다. 작가가 의도한 구성인지, 우연인지 자료를 찾지는 못했지만 감상자의 눈에는 두 사람의 검은 의상이 서로 연관되어 눈에 들어온다(개인의견).


왼쪽; 클로드 모네 <초록 드레스의 카미유> 1866. 캔버스에 유채, 231x151cm.

쿤스트할레(미술관) 브레멘, 독일.

오른쪽;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La Japonaise> 1876.

캔버스에 유채. 231.8×142.3 cm. 보스톤 미술관, 미국


화가의 아내 카미유 모네의 전신 초상화이다. 1876년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빨간색 기모노(우치카케 uchikake), 일본식 다다미 매트, 벽을 장식한 부채들, 이 작품은 첫 눈에 자포니즘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카미유는 원래 검은 머리인데 금발 가발을 쓰고 있다. 유럽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이는 이 그림이 진정한 일본화가 아니라 일본 문화의 차용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카이유의 빨간색 로브에 사무라이 자수를 세심하게 묘사했는데 사무라이의 얼굴을 캔버스 중앙에 배치했다. 검은 머리카락, 엄숙한 표정, 허리띠에 찬 검을 꽉 쥐고 있는 사무라이를 그렸다. 카미유가 부채를 들고 웃고 있는 모습과 강하게 대조된다. 카미유가 오른손에 들고있는 부채는 프랑스 국기 색상이다. ‘일본'이라는 설정속에 서구적 정체성을 심어놓은 그림이다.

“그래, 잡동사니야. 변덕에 불과해. 살롱에 <카미유(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를 출품한 적이 있었는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 그러자 쌍이 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어. 굉장한 의상을 보여주면서 어떤가 하더라고. 금실자수가 놓여 있었는데, 어떤 곳은 옷 두께가 몇 센티나 되었어.”
이 작품은 그의 첫 번째 아내의 초상화로, 갈색머리였는데 그 날은 금발 머리를 하게 하였다고 가르쳐 주었다. 마부치 아키꼬 <자포니슴, 환상의 일본> 62, 63쪽.

<자포니즘, 환상의 일본>마부치 아끼코 지음/ 최유경 역. (주)J&C, 2004.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수련과 일본식 다리 Water Lilies and Japanese Bridge> 1899.

캔버스에 유채.  90.5x89.7cm. 프린스턴 대학 미술관, 뉴저지, 미국.


<수련과 일본식 다리>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다.

1899년 여름, 처음으로 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탐구하여 빛이 얼룩진 표면, 아치형 인도교와 주변 식물에 대한 18개의 풍경을 그리는 연작을 시작했다. 그 해 여름에 위의 그림을 포함해 12개의 그림을 완성했다. 그는 이듬해 파리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포함한 그림들을 전시했다.

1883년에 모네는 노르망디 국경 바로 건너편에 있는 시골 마을 지베르니로 이사했다. 1893년에 작은 시냇물이 포함된 인접한 지역을 구입하여 이국적인 식물, 잔잔한 물이 있는 아시아풍 정원을 조성했다.  지베르니 정원의 목조 다리는 판화로 묘사된 일본 정원에서 영감을 얻었다.

위의 작품은 모네가 다양한 날씨와 조명 조건에서 동일한 시각으로 그려온 약 12개의 그림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이 일본식 회화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캔버스 위쪽에 캐노피처럼 매달려있는 다리가 일본식 다리일 뿐이다. 푸른 다리의 곡선과 나뭇잎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보는 사람을 푸르른 물 풍경에 몰입시킨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기 조건을 포착하려는 모네의 프로젝트는 인상주의 스타일의 특징이 되었다.

(이 그림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소장처 기재에 오류를 의심받기도 합니다.  각각의 그림을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소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판화의 경우도 소장처가 여러곳일 수 있습니다.)


우키요에 판화는 귀중한 수입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포장재로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유럽 예술가와 미술 수집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곧 그 자체를 위해 수입되었다. 1840년대 이후 파리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미술 시장에서 거래된 일본 판화들은 대부분 개별적인 작품 형태가 아니라 앨범으로 엮여 출간된 판화집이었다. 반 고흐는 일본 판화에 매료되어 일본풍 회화를 많이 그렸다.


왼쪽;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빗속의 다리, 히로시게 이후 Bridge in the Rain,After Hiroshige>, 1889. 캔버스에 유채 73.3x53.8 cm. 반 고흐 뮤제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오른쪽;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신 오하시(大橋)와 아타케의 소나기 Sudden Shower over Shin-Ōhashi bridge and Atake> 1857. 목판화(우키요에)와 채색프린트.  34x24.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고흐의 그림을 보자마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흐가 사방에 저 한자를 그리느라고 얼마나 애썼을까. 뜻도 모르고 그렸을 글자를 나보다 더 잘 썼다(그렸다). 원본에 없는 다른 인쇄물에서 본 문자를 그린 것이다.

모방한 원작 채색판화 작품에 더 많은 색상을 추가했고,  인물과 모양도 약간 재작업했다. 그러나 고흐가 항상 자신의 감성을 작품에 주입했던 스타일을 따르는 대신 원작을 잘 따라 그렸다. 목판화의 모양이 표준 크기의 캔버스에 직접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에 고흐는 테두리(진한 빨간색)를 추가했다. 고흐는 밝은 색상과 독특한 구성인 일본 목판화를 존경했다. 원본보다 색상은 더 강하다. 히로시게의 목판화에서 특이한 색상 조합을 연구하고 모방함으로써 반 고흐는 보는 사람의 강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하이쿠 시인과 우키요에 예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인 <신 오하시와 아타케의 소나기>에서 가는 빗줄기의 선은 어려운 목판 기법이다. 그림의 주제인 스미다가와(스미다강 隅田川) 오하시(대교大橋)는 에도 백경 중에 하나이다.

검은 하늘에 비가 쏟아지자, 갑작스러운 폭우에 여러 인물이 포착된다. 검은 우산을 쓴 두 여성은 바람에 맞서고, 우산이 없는 한 남자가 밀짚 망토를 머리 위로 끌어당기고 있고, 세 남자는 한 우산을 쓰고 바쁘게 가고 있다. 강에는 뱃사공이 있다. 먼 제방은 실루엣으로 묘사했다.  히로시게의 작품은 일본의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처럼 시민들의 일상생활도 포착했다. 1887년 반 고흐는 이 판화에 매료되어 유성 페인트로 모방했고, 이 이미지에 대한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였다.

이 판화 프린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 호놀룰루 미술관, 대영 박물관, 도쿄 국립 박물관, 의회 도서관 및 미니애폴리스 예술 연구소에서 찾을 수 있다.

제목의 아타케는 먼 강둑에 표시된 지역의 비공식적 지명으로, 이곳에서 막부 배 창고 앞에 정박해 있던 거대한 막부 선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왼쪽; 빈센트 반 고흐 <탕귀 영감 초상 Portrait of Père Tanguy> 세번 째 버전. 1887. 캔버스에 유채. 92x75cm. 로뎅박물관, 파리, 프랑스

오른쪽; 두번 째 버전. 65x51cm. 스타브로스 니아로코스 Stavros S. Niarchos 컬렉션.


페르 탕귀Père Tanguy(Julien François Tanguy,1825-1894)는 프랑스 미술품 상인, 갤러리 소유자, 미술품 수집가이자 인상파 그림의 최초 구매자 중 한 명인 후원자이다. 그는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 고흐는 파리에 도착한 후 1886부터 1888년 사이에 탕귀 초상화를 3개 그렸다. 그림은 눈에 띄는 붓놀림과 평면적인 공간과 대조되는 보색을 강조하는 신인상주의 기법을 보여준다. 그림 속 탕귀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친절한 얼굴 표정이다. 두 손을 다소곳이 아래쪽으로 모으고 있다. 친절함과 겸손함을 모두 표현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 자세가 마치 부처와 같은 모습이라고 했다. 반 고흐가 탕귀를 일본 현자로 표현하며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한다.

고흐는 앤트워프에 살고 있을 때 처음으로 우키요에를 접했다. 탕귀 초상화 배경의 판화는 고흐 형제가 수집한 일본 판화 중 일부다. 일본 문화를 신화화하는 경향이 있었던 반 고흐는 일본의 삶과 예술가를 이상화했다. 세 개의 초상화 시리즈 중 하나인 그림 왼쪽 작품(로뎅미술관 소장)을 탕귀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왼쪽; 메리 카사트 Mary Cassatt <편지 The Letter> 1890-1891. 회백색 종이에 에쿼틴트(aquatint 요판인쇄). 이미지 34.5×21.1cm. 종이 43.7×29.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오른쪽;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마츠바야의 세야마, 카무로 이로카, 유카리 Seyama of the Matsubaya, kamuro Iroka and Yukari> 1793. 목판화. 38.7x25.3cm. 보스톤 미술관, 미국.


인상주의자들은 일본 판화에 관심을 가졌다. 1890년 파리에서 열린 우키요에 전시회를 방문한 후 메리 카사트는 컬러 에칭에 장식 패턴과 평평한 공간과 단순화된 인물을 묘사했다. 카사트는 원래 여성들, 실내에서 아이들과 놀거나 몸단장을 하는 여성들을 주제로 삼았는데 우키요에도 이런 주제를 주로 다뤘다. 카사트는 자연히 우키요에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1890년부터 컬러 판화를 시작했다. 위 그림 <편지>는 일본 예술의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생생한 인쇄잉크를 사용해 드레스와 벽지 패턴 등 우키요에의 형식적 요소를 따랐다. 동일한 시트에 연속적으로 인쇄된 세 개의 판을 통해 정교한 패턴화가 이루어졌다.


왼쪽;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목욕통 The Tub> 1886. 카드보드지 위에 파스텔. 60x83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오른쪽;우타가와 쿠니사다1 Utagawa KunisadaI <현대 꽃 콘테스트시리즈의 국화 Chrysanthemum from Contest of Modern Flowers> c.1820, 목판화, 종이에 수묵과 채색. 39.2 x 26 cm. 보스톤 미술관, 미국.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선보인 이 파스텔화는 1880년대 중반 드가가 몸을 씻는 여성을 주제로 제작한 7점의 시리즈 중 하나이다. 드가는 이미 약 10년 동안 일련의 모노타입을 통해 이 주제를 탐구했다.

드가의 목욕 시리즈에 그려진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그려오던 낭만적인 목욕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일부 비평가들은 드가가 묘사한 목욕 시리즈의 여성들을 동물성의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세는 고대의 웅크린 아프로디테의 자세에서 나왔다고 한다.

왼쪽 드가의 그림은 일본식 구성장치를 사용하여 목욕하는 여성을 묘사했다. 목을 적시는 여성을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으로 묘사했고, 주변에 펼쳐놓은 사물들은 평면적인 형태이다. 욕조의 곡선은 여성의 등 부분까지 이어지고, 왼팔의 수직선은 그림 오른쪽 선반 가장자리와 평행을 이룬다. 입체적인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전통적인 명암대비를 사용하지만 추상적인 표면 디자인이 공간을 평면화한다.


오른쪽 쿠니사다의 그림은 일반 가정용품으로 둘러싸인 목욕하는 여성을 보여준다.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있는 물을 데우는 도구와 목욕용 수세미를 보자. 드가의 작품만큼 시야각이 높지는 않지만 여성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드가는 목욕용품을 놓은 선반으로 공간을 직선 분할했고,  쿠니사다는 내부 공간을 층을 이루며 대각선으로 분할했다. 여자를 둘러싼 공간과 사물을 활용하여 인물의 시각적 프레임을 구축한다. 색상의 반복과 단순화된 모양은 명암대비의 부족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표면 패턴을 만든다.


폴 고갱 Paul Gauguin <설교 후의 환상 Vision after the Sermon/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캔버스에 유채. 72.2×91cm . 국립현대미술관, 에딘버러, 스콧트란드.


1888년에 브르타뉴 퐁타방에서 제작된 이 그림은 고갱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브르타뉴 지방 의상을 갖춰입은 여성들이 방금 들은 설교 내용을 환상으로 보고 있다. 굵은 나무 기둥 넘어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이미지가 그려져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후 밤새도록 신비한 천사와 씨름을 했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이다(창세기32:22-32).

고갱은 비서구 문화와 예술 형식을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이 그림을 일본 예술에서 직접 차용했다. 고갱의 칠보 미술(Cloisonnism)의 밝은 색상과 평면적인 형태는 일본 판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그림에서는  두 가지 구체적인 일본 자료를 사용했다. 오른쪽 상단의 야곱과 천사의 모습은 호쿠사이의 스모 선수 판화에서 파생됐고, 평평한 붉은 땅과 급격하게 호를 그리는 나뭇가지의 전체적인 구성은 히로시게의 목판화 <가메이도 매화공원 (亀戸梅屋舗, Kameido Umeyashiki )>을 반영한 것이다. <가메이도 매화공원>은  반 고흐도 복사한 판화이다 .


아래는 호쿠사이의 여러 스모선수 이미지들.


왼쪽은 히로시게 판화, 오른쪽은 반 고흐의 그림

수수께끼와 신비로운 이 대담하고 실험적인 구성은 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선언하는 선언문이 되었다. 놀라운 색상, 대담한 윤곽, 고의적으로 납작한 모양으로 고갱은 표현 목적을 위해 왜곡하고 과장할 수 있는 예술가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으며, 관찰된 현실보다는 아이디어와 상상의 세계에 기반을 둔 예술에 대한 관심을 선언했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현실과 상상을 결합을 시도했다. 실제 여성과 그들이 상상하는 영적 경험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 나무의 굵은 대각선 줄기로 구성을 나누었다. 1889년부터 다양한 전시회에서 선보였으며 혁신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었다. 고갱의 고의적인 형태와 색상 왜곡은 전통적인 회화뿐만 아니라 인상주의와 같은 보다 현대적인 자연주의 양식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왼쪽;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디반 자포네 Divan Japonais> 1892-3. 컬러 석판화. 80.8x60.8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오른쪽; 토슈사이 샤라쿠  Toshusai Sharaku <가부키 배우 오타니 오니지 III 얏코 에도베이 역 Kabuki Actor Ōtani Oniji III as Yakko Edobei> 1794, 목판화 인쇄. 38.1x35.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로트렉의 포스터는 몽마르트의 작은 일본식 카페 콘서트인 디반 자포네(Divan Japonais)를 광고 한 것이다. 전경 에는 야성적이고 음란한 춤을 추는 것으로 유명해진 친구 제인 에이브릴의 실루엣이 있다 . 그녀의 동반자는 작가이자 '라 레뷔 바그네리엔 Revue Wagneriénne(독일 음악가 바그너에 대한 예술적 철학적 사상을 다루는 프랑스 잡지)'의 창립자인 에두아르 뒤자르댕Edouard Dujardin이다. 포스터의 왼쪽 위에는 얼굴없는 여인이 서있다. 샹송가수 이베트 길베르 yvette guilbert이다. 그녀는 대규모 기업에 고용돼있기 때문에 얼굴을 광고할 수 없었다. 로트렉은 길베르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긴 장갑으로 얼굴없는 가수의 정체가 길베르임을 알렸다.

'디반 자포네'는 툴루즈 로트렉이 자주 방문했던 19세기 후반 파리의 많은 카페 콘서트 중 하나였다.


오타니 오니지 3세는 연극 '사랑하는 아내의 유색 고삐'(Koi nyōbō somewake tazuna)에서 사무라이의 하인 역할로 묘사되었다. 3/4 시점으로 보이는 배우의 멍한 얼굴, 곤두서는 머리카락, 더듬으며 뻗은 손은 이 사악한 심복의 무자비한 성격을 포착한다. 샤라쿠는 가부키 캐릭터의 본질적 특성을 포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연기한 것으로 유명한 배우들의 개성도 드러냈다.

샤라쿠는 1794년 5월 마치 외계에서 온 생물처럼 일본 목판화계에 돌입해 불과 10개월 만에 약 140점의 목판화를 만든 뒤 갑자기 신비롭게 사라졌다. 미술사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아르누보와 관련된 많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툴루즈 로트렉도 일본 예술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포스터는 평평한 형태, 강력한 윤곽 디자인, 검은색 형태의 드라마틱한 사용 등에서 가부키 배우들의 일본 판화의 강력한 영향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림들과 달리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는 일본 목판화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연예계를 위한 값싸고 대량 생산된 홍보 수단이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KATSUSHIKA HOKUSAI <후카가와 만넨바시 시타Fukagawa Mannenbashi Shita, 후지산 삼십육경시리즈 중> 1830-32. 목판화 25.7x38.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후카가와는 현재의 도쿄도 교토구의 지명, 만넨바시는 후카가와를 흐르는 오나기강과 스미다강이 합류하는 도쿄도 교토구에 위치한 다리로 오늘날에도 후카가와 만넨교(Fukagawa Mannen Bridge)로 부른다. 목판화에는 다리 위에서 후지산이 보인다고 제시되어 있지만, 불행하게도 현재는 건물들 때문에 높은 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이 우키요에 작품은 원근법을 사용하여 풍경의 광활함과 깊이를 표현한다. 브릿지의 크고 둥근 곡선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리바닥의 밑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강 위에 떠있는 배에서 만넨다리를 올랴다보는 구성이다. 후카가와 지역이 해수면보다 낮은 곳이기 때문에 다리 양쪽에 제방을 쌓은 후 고가도로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다리는 더 높고 커 보인다. 다리 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주민들의 분주한 일상이 느껴지고, 다리 아래의 모습도 후카가와의 생활모습을 보여준다. 오나기강은 지바현 교토쿠에서 에도까지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건설한 인공수로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건설했다고 한다. 그림 왼쪽의 선박이 소금과 다양한 물건들을 운반하는 것이다. 한가로이 낚시하는 사람까지 그려넣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 일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림 속 후지산의 존재는 크지 않지만, 강 위에 떠있는 두 배의 뱃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은 교량너머 후지산을 향하고 있다. 감상자의 시선을 산을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구성이다.

원근법의 탁월한 사용과 판화 제작자의 섬세한 기술(흐림 또는 그라데이션)이 있어 강의 공간적 깊이와 하늘의 넓은 공간을 표현한다. 다리는 마치 초상화의 대상이 된 듯 위엄있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호쿠사이는 말년에 한동안 만넨교 주변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KATSUSHIKA HOKUSAI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후지산 삼십육경시리즈 중> 19세기. 우키요에. 49x26 cm. 대영박물관, 런던, 영국.


후지산 삼십육경 시리즈의 모든 이미지에는 산의 모습이 담겨 있다. 후지산은 다양한 날씨와 계절, 멀고 가까운 모든 방향에서 그려진 주인공이지만 후지산이 항상 화면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원근법으로 작게 묘사된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후지산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거대한 하얀 파도이다. 작은 산이 마치 파도에 먹힐 것 같은 느낌이다. 후지산은 일본에서 종교적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색 목판화로 하늘과 물을 묘사한 색상은 베를린 블루(프러시안 블루)이다. 베를린 블루는 값싼 안료로 호쿠사이는 이 안료를 풍부하게 사용했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우키요에에서 자연은 인간 활동의 무대로만 표현되었으나, 호쿠사이의 이 작품에서는 자연 풍경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곧 배를 삼킬것 같은 높은 파도는 마치 날카로운 발톱같은 거품을 내뿜으며 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강조한다. 자연의 힘에 비하면 인간의 존재는 보잘것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파도 왼편에는 제목과 호쿠사이의 서명이 있는데, '北斎改爲一筆' (호쿠사이였던 이츠가 그림)라고 씌여 있어 이전에는 호쿠사이였던 예명을 이츠 (爲一)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드뷔시 (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의 라 메르 La Mer(바다)와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데어 베르그 Der Berg(산)에 영감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부채를 든 여인 Lady with Fan> 1917-1918. 캔버스에 유채.

100.2x100.2cm. 개인소장.


첫눈에 클림트 그림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의 유명한 <키스>가 그렇듯 노란색 배경은 클림트 황금기 그림을 연상시킨다. 클림트가 사망한 직후(1918) 그의 작업실을 촬영한 사진에는 이젤에 두 개의 그림이 있었다. <부채를 든 여인>과 여성 미완성 초상화이다.

이 그림 배경은 중국풍 모티브로 장식되었다. 큰 봉황은 불멸, 재생, 행운을 상징하고, 밝은 분홍색 연꽃은 사랑과 불변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긴다리 학과 금꿩도 있다. 배경의 모티브는 우키요에(일본목판화)처럼 패턴이 평탄하다. 클림트 스타일로 회자되는 당초무늬 선, 곡선 패턴, 꽃 이미지들은 일본작가 오가타 고린Ogata Kōrin(尾形光琳, 1658-1716)의 판화와 유사하다. 클림트의 작품에 여인 초상화가 많은데 그의 아시아 유물 콜렉션에는 비진가bijin-ga(미인화) 우키요에 초상화가 많았다.

모티브는 일본스타일인 반면 색상은 중국스타일이다. 금박같은 배경, 중국 도자기의 크롬 노란색, 코발트 블루, 붉은 황토색을 모방했다. '비엔나 문화연구소'(1915년 설립) 회원인 클림트는 작품에 이 조직의 신념을 드러냈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등이 회원인 비엔나 문화연구소는 서구의 문화적 우월성을 거부하고, 평화와 평등주의적인 세계 문화를 옹호하는 그룹이다. 클림트의 이 그림은 아시아의 회화적 전통이 동등하게 결합된 그림이다.

또한 그림에서 보듯 장식 요소를 통해 순수 예술과 공예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클림트가 이 두 가지를 결합한 것은 20세기 초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예술 공예 운동의 원동력을 반영한다.


일본은 1854년 미국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여 자치적인 고립을 해제한 후, 일본이 다른 나라들에 더 잘 알려지기 시작했다.

모네, 드가, 반 고흐 등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은 일본 예술의 열성적인 수집가였지만 그들의 작품에 미치는 영향의 성격은 다양했다. 티쏘(James Tissot)와 같은 일부 예술가들은 자포니즘에 매료되어 모델들을 일본식 의상으로 묘사하고, 작품에 '오리엔탈' 소품을 눈에 띄게 전시하기도 했다. 드가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비대칭 구성에서 공중 관점에 이르기까지 회화에 대한 일본 접근 방식을 채택하여 미묘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다.

자포니즘은 일본 미술의 도상학이나 개념을 유럽 미술과 디자인에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합은 종종 진정한 영향만큼이나 일본 문화에 대한 유럽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인상파 및 신인상주의 예술가들과 미학 운동의 구성원들은 표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환상적인 그림이라는 르네상스 전통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예술가들은 우키요에 일본 목판화의 생생한 색상과 새로운 관점에 매료되었다. 자포니즘의 매력은 역설적이었다. 그것은 이국주의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서구 예술적 이상의 유기적 표현으로 빠르게 동화되었다. 일본 스타일의 요소는 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영국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본 미술이 서양에 미친 영향은 일찍이 1860년대부터 나타나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현대 미술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이 글에서는 미국의 자포니즘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는 컬러 석판화와 목판 인쇄에 대한 광범위한 기술적 실험을 자극했다. 아르누보를 옹호하고 장식예술을 개혁하는 데 있어서 일본색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좀더 알고싶은 독자에게 아래 글을 소개합니다.

https://brunch.co.kr/@erding89/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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