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세계유명미술 특별전 "불멸의 화가 반 고흐"
1888년 가을,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반 고흐는 지누 부부를 모델로 여러 점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중 <조셉 미셸 지누의 초상>은 남편 조셉을 단독으로 그린 드문 작품이다. 반 고흐가 이 시기 보여준 강렬한 붓질과 색채 실험이 잘 드러나는 예로, 한 인물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와 감정을 표현하려 했던 그의 예술적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흐의 작업실에는 저녁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가스등을 설치했다. 초상화의 배경이 독특한 황록색으로 모델이 선명하게 돋보인다. 이는 황록색 빛을 내는 가스등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조셉 미셀 지누의 초상> 1888. 캔버스에 유채 65.3x5.44Cm.
크뢸러뮐러 미술관, 오테를로, 네덜란드.
화면에는 중년의 남성이 정면을 응시하고 앉아 있다. 그는 반쯤 감긴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을 가진 채, 말수가 적고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격처럼 보인다. 이 남성은 실제로는 카페 주인이자 마을의 소시민이었지만, 반 고흐의 눈에는 단순한 인물 이상의 존재로 비쳐졌던 듯하다. 그는 이 초상화를 통해 지누라는 인물 안에 깃든 삶의 피로와 자존심, 고요한 인내의 정서를 전달하고자 한다.
색채는 반 고흐 특유의 강렬함과 대조를 이루며 감상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배경에는 짙은 녹색과 노란색이 섞여 가스등 아래에서 빛이 번지는 듯한 인상을 주며, 인물의 얼굴과 어깨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붓터치는 매우 두텁고 거칠며, 특히 수염과 눈 주변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마치 화가가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얼굴을 빚어낸 듯한 질감은 이 인물에 대한 정서적 몰입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지누는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다. 흰색 셔츠에 어울리는 밝은 넥타이, 그리고 일요일에나 입을 법한 말쑥한 외투는 그가 자신의 외모를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는 아마도 그가 초상화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음을 것이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런 외면적 치장보다는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심리를 포착하고자 했다. 표정은 담담하지만,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웅크리고 있다. 눈빛은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한 이중적인 뉘앙스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단지 한 인물을 묘사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인물이 속한 시대와 계층, 고흐 자신이 인물에게 부여한 존재적 의미를 담은 정신적 초상화다. 반 고흐는 모델을 단순한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지누의 외모 이면에 감춰진 삶의 결을, 내면의 무게를 보았다. 그 무게를 색과 선, 질감으로 전환하여 화면 위에 심어두었다.
이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19세기 아를의 작은 카페에서 묵묵히 삶을 견디던 한 남자의 얼굴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독과 품위를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반 고흐는 ‘보통 사람’을 통해 ‘비범한 진실’을 그려냈다. 이 그림은 단지 인물화가 아니라, 삶의 얼굴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에게 말없이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
폴 고갱 <조셉 미셀 지누의 초상> 1888. 캔버스에 유채 40.5 x 32 cm.
반 고흐 뮤제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고갱의 붓 아래에 나타난 조셉 미셸 지누는 반 고흐가 그린 지누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같은 모델,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그렸는데도, 고갱의 지누는 마치 무대 위에 놓인 상징처럼 보인다. 고갱 특유의 상징주의적 화풍과 구조적 절제를 통해 ‘인물’보다는 ‘형상’으로 지누를 재구성한다.
지누는 화면의 오른쪽에서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다. 몸은 약간 긴장된 듯 보이지만 얼굴은 차분하게 정면을 향한다. 이 구도는 인물에게 움직임의 리듬을 부여하는 동시에, 고갱이 평면성과 정적인 긴장을 동시에 활용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색채는 반 고흐처럼 감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절제되고 납작하게 칠해진 색면은 인물을 하나의 구성요소로 끌어내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지누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졌던 ‘말 없는 웅변’은 고갱의 그림에서는 ‘침묵의 형식’으로 전환된다. 지누를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구조물처럼 다룬다. 그 어떤 내면의 흔들림도 드러나지 않는다. 고갱은 인간의 심리를 직접 드러내기보다, 그것을 색채의 배치와 화면 구성을 통해 암시하는 데 주력한다.
주목할 부분은 그림의 오른쪽 상단이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어색한 공백은 고갱이 작업을 중단했거나 혹은 일부러 남겨둔 공간일 수 있다. 고갱 회화의 상징성, 완결보다는 암시를 중시하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그는 때로 완성보다 ‘열린 해석’을 더 중요시했다.
그림을 보면 무언가 단단하게 다듬어진 조각상을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다. 인간의 감정보다는 형태와 구조가 중심인 이 초상화는, 고갱이 얼마나 ‘내면’보다는 ‘표면의 상징성’을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셉 지누라는 한 사람의 초상이라기보다, 고갱 회화 언어의 한 표현처럼 읽힌다. 그는 말한다. 인간은 곧 형식이며, 형식 안에 의미가 깃든다고.
왼쪽; 빈센트 반 고흐 <마담 조셉 미셀 지누(마리 줄리앙, 1848~1911)> 1888/1889.
캔버스에 유채. 91.5 x 73.7cm, 메트로폴리탄 뮤제움, 뉴욕
오른쪽; 빈센트 반 고흐 <장갑과 우산을 들고있는 지누부인> 1888.
캔버스에 유채, 92.5 x 73.5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반 고흐는 지누 부인의 초상을 여럿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888년 말에서 1889년 초 사이에 제작된 <마담 지누의 초상>으로, ‘아를의 여인(L’Arlésienne)’이라는 부제가 붙기도 한다. 명칭 자체가 마담 지누를 하나의 도시적 상징, '아를'이라는 공간의 여성적 이미지로까지 확장시키며 해석할 여지를 제공한다.
마담 지누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테이블 앞에 정면을 향해 고요히 앉아 있다. 표정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단순한 카페 주인의 아내라기보다, 아를이라는 도시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고흐는 그녀를 일상에서 데려와 고요한 상징으로 재현한다.
무엇보다 색채의 사용이 인상 깊다. 마담 지누의 옷은 검정색이지만, 그것이 결코 어둡지 않다. 차분하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화면 전체는 매우 생동감 있다. 이는 고흐가 정적인 구성 안에서 강렬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여성에 대한 고흐의 시선을 반영하기도 한다. 고흐는 마담 지누에게서 단순한 외형의 아름다움이나 장식을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면의 평온함, 삶의 인내, 여성적인 지성과 체념을 발견하고자 했다. 조용하지만 힘 있는 여성 초상으로 느껴진다.
이 그림을 보며 고흐가 일상의 인물들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마담 지누는 거창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붓끝에서 그녀는 도시의 상징, 여성적 존엄의 표상이 된다. 고흐는 '아를의 여인'이라는 타이틀에 그 이상의 무게를 실어 주었다.
폴 고갱 <아를의 나이트 카페> 1888. 황마에 유채, 73x92cm. 푸쉬킨 미술관, 모스크바.
아를에서 고갱과 반 고흐는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고갱은 반 고흐의 두 그림을 재해석하여 '밤의 카페'와 '마담 지누의 초상'을 한 화폭에 담았다.
1888년 11월 초,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써서 고갱이 이미 그렸던 나이트 카페를 그림으로 그리려 한다고 알렸다. 지누 부인은 아를에 있는 카페 '드 라 가르'의 주인이었는데, 반 고흐가 묵었던 곳이다. 그곳에는 매춘부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고갱은 이 중 세 명을 위 그림의 배경에 묘사했다.
고갱은 나중에 캔버스를 개작하여 맨 왼쪽에 인물을, 그리고 매춘부들과 대화하는 남자를 추가했다. 이 두 인물과 지누 부인은 반 고흐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미 등장한다.
작품에는 대리석 테이블과 당구대 가장자리, 두 군데에 서명이 있다.
왼쪽; 폴 고갱 <마담 지누 스케치> 1888. 목탄, 56 x 48.4 cm. 개인 소장
오른쪽; 빈센트 반 고흐 <마담 지누> 1890. 캔버스에 유채, 63x47cm. 크뢸러 뮐러 뮤제움, 오테를로, 네덜란드
왼쪽 고갱의 스케치에서 어두운 선은 고갱이 가장 집중했던 구도를 나타낸다. 위에 있는 고갱의 <아를의 나이트 카페> 그림 이전의 스케치로, 마담 지누의 어깨와 팔의 윤곽은 고갱이 그녀 뒤의 배경을 어떻게 구성할 지 계획하는데 영향을 준다.
코, 눈, 머리카락과 같은 핵심 요소 외에는 너무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얼굴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마담 지누는 뛰어난 인물은 아니지만 고흐와 고갱이 여러 번 그린 것으로 보아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외모인 것같다. 물론, 아를에 함께 살고있던 두 사람이 같은 내용을 그린 것이기도 하다.
고갱이 먼저 그린 것과 같은 형식으로 고흐가 후에 그린 것, 고흐가 먼저 그린 것을 보고 고갱이 그 후에 그린 것, 지누 부인은 두 화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택한 모델이었다.
항상 돈이 부족했고, 모델을 고용할 여력이 없어서 주변 지인들의 협조에 의존했다. 고흐는 고갱이 오기 전 노란 집으로 이사하기 전 몇 달 동안 마담 지누의 집에 묵었었다. 조셉 미셀 지누 부부는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카페 '드 라 가르'를 운영하고 있었다.
예술은 때때로 같은 사람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한다.
1888년 프랑스 아를, 두 화가—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는 같은 시공간 속에서 한 부부를 그렸다. 그들은 ‘카페 드 라 가르’의 주인이었던 지누 부부, 조셉 미셸 지누와 마담 마리 지누를 캔버스에 담는다. 그러나 완성된 초상화들은 서로 닮지 않았다. 아니, 전혀 다른 인물을 그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 세 그림은 하나의 삶을 세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예술적 기록이며, 동시에 두 화가의 세계관과 회화철학이 충돌하고 반응한 흔적이다.
반 고흐는 지누의 얼굴에서 무겁고도 묵직한 인간의 초상을 끌어올렸다. 붓질은 거칠고 강하며, 색채는 원색적이고 충돌을 일으킨다. 그의 캔버스에서 조셉 지누는 단순한 인물 이상이다. 그는 시대를 버티는 인간이며, 감정을 억제한 고요한 인내의 얼굴이다. 반쯤 감긴 눈, 담담한 표정, 두꺼운 선과 색이 어우러진 얼굴은 마치 “나는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흐는 지누를 살아 있는 육체로 그렸고, 그 육체 안에 쌓인 감정의 응축을 담으려 했다. 이는 단지 초상화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자 ‘삶의 흔적’에 대한 기록이었다.
반면 고갱은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의 지누는 감정보다 형식에 가깝다. 구도는 정적인 비대칭을 택하고, 색채는 납작한 평면 위에 조화롭게 분포된다. 미완성으로 남겨진 오른쪽 상단은 공백이 아니라 해석의 여지를 남긴 장치다. 고갱에게 있어 인물은 형이상학적 구조 안에 배치되는 상징이었으며, 감정은 암시되고 추상화된다.
이렇게 구성된 지누의 얼굴은 무표정하지만 불안하지 않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감정을 환기시킨다. 이는 고갱이 추구한 상징주의적 회화 언어의 전형이며, 인간은 한 명의 개인이기보다 하나의 형상, 하나의 기호로 존재하게 된다.
고흐가 마담 지누를 그릴 때, 그녀를 단지 아를의 카페 여주인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를의 여인(L’Arlésienne)’으로 추상화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구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검은 옷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녀의 표정은 정숙하고 단호하며,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담백한 침묵은 여성이 감내해온 삶의 무게를 상징한다.
고흐는 그녀의 외모나 장식에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삶의 리듬, 내면의 질서, 체념 속의 존엄을 화면에 새겼다. 테이블, 배경, 단정한 자세와 대비되는 화려한 색 구성은 그녀를 조용히 강조한다. 반 고흐의 눈에 여성은 고통의 존재가 아니라 품위의 존재였다. 이 그림은 여성적 감성과 인내의 미학을 담은, 고흐 회화의 섬세한 정점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림은 두 화가의 세계관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 고흐는 인간을 심리적 깊이로 본다. 존재는 고통을 겪으며 형성되며, 초상화는 내면을 증언하는 통로다.
고갱은 인간을 형식의 질서로 다룬다. 감정은 형태로 환원되고, 초상은 상징적 구조물이다.
같은 인물을 두고도 이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술이 결코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예술가는 언제나 그 사람을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감정과 철학으로 바라본다.
지누 부부는 아를의 평범한 시민이었다. 고흐와 고갱이라는 두 명의 예술가는 그들을 예술의 무대 위로 올려놓았다. 한 사람의 얼굴이, 또 한 사람의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의 힘이며, 초상의 진실이다. 조셉 미셀 지누 부부의 그림은 단지 19세기 말의 한 부부를 기록한 초상화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들이 ‘존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묻는 시각적 문답이다. 우리는 지누 부부 초상화의 시선을 통해, 한 인물의 초상을 넘어 삶과 인간, 예술의 깊이를 들여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