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 바슐라르의 사상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3부 언어와 기호의 관계
16화 이미지의 4원소 -가스통 바슐라르와 현대미술- 불, 공기
<불의 정신분석>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김병욱 옮김. 2019, 이학사
바슐라르는 불을 ‘이중의 상징’으로 보았다. 불은 따뜻함과 생명력을 주지만 동시에 파괴와 죽음을 내포한다. 그는 이 양가성을 통해 창조의 욕망을 읽어냈다. 바슐라르에게 불은 ‘정신의 불꽃’이다. 상상력은 불을 통해 사물의 심연에 닿는다.
미술가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 1915-1995)의 ‘불로 그린 그림들’은 바슐라르적이다. 부리는 플라스틱을 불로 태워 형체를 왜곡시키며, 불이 가진 창조와 파괴의 긴장을 시각화했다. 불은 그의 붓이자 철학이었다. “불은 물질의 심리학이며, 인간 욕망의 현상학”이다. 불을 통해 그리는 행위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욕망과 존재의 탐색이 된다.
불은 인간들의 축제를 물질화한다. 아무리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더라도, 미식의 가치가 영양의 가치보다 우선하며, 인간이 자신의 에스프리를 발견한 것은 기쁨 속에서지 고통 속에서가 아니다. 잉여의 것을 정복하는 것이 필요하는 것을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정신적 흥분을 준다. 인간은 욕망의 피조물이지 필요의 피조물이 아니다. 41쪽. 2장 "불과 몽상"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현상학적 모순들 가운데 하나는 인간 사유의 마술적 활동의 승리라 할 알코올의 발견이 가져다주었다. 화주cau-de-vie, 그것은 불의 물eau de feu이다. 그것은 혀를 태우고, 조그만 불똥에도 불이 붙는 물이다. 그것은 초산처럼 용해시키거나 파괴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태우는 것과 함께 사라진다. 그것은 생명과 불의 화합communion이다. 155쪽. "알코올:타는 물"
바슐라르는 네 원소 중에서 불을 가장 ‘인간적’인 원소로 보았다. 불은 공기와 달리 보이지 않는 초월의 상상력이 아니다. 물처럼 감정의 깊이를 반사하는 원소도 아니며, 대지처럼 묵직하게 존재를 버티는 원소도 아니다. 불은 인간의 욕망, 파괴, 창조, 충동, 생명력의 이미지다.
바슐라르는 “불은 인간을 닮은 원소”라고 말한다. 불은 타오르고, 삼키고, 빛나고, 재가 된다. 그 변화의 속도는 인간의 감정과 닮아 있다. 우리에게 대입해보자. 꿈(희망, 갈망, 욕망)을 꾸고 그 불씨는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우리를 삼켜버리고, 그 시간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던 불길.
"불"이 우리 인생과 닮아있다고 실감한다. 불의 예술인 멋진 유리조형물로 완성되든지, 허망한 재가 되든지, 바슐라르의 불에 대한 심리학을 읽으며 그 안의 여러 구절은 우리 인생을 불에 대입시켜보게 된다. '우리'뿐 아니라 '나'를 불에 비교해도 그렇다. 타오르던 불꽃은 이미 재가 되었다고 여겼던 어떤 불씨,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남아있다가 황혼녘에 다시 살아나 지금 이런 글을 쓰고있지 않은가!
바슐라르에 따르면 불은 “파괴하면서 창조하고, 소멸하면서 재탄생하는 이미지”이다. 상상력을 가장 다층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불은 우리 안에서 타오르며, 그 빛으로 세계를 다시 본다.
불의 심리학 — 파괴와 창조가 공존하는 이중성
바슐라르는 불의 이미지에는 언제나 ‘양가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따뜻함과 위로, 격렬함과 폭력, 빛과 그림자, 창조와 파괴, 시작과 끝, 불은 모든 것을 동시에 포함한다.
불은 인간 영혼의 이중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원소, 불은 창조의 가장 오래된 은유이며, 파괴의 가장 빠른 상징이라고 하는 바슐라르의 논지를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술은 언제나 이 양가성 위에서 움직인다. 한 작품은 어떤 것을 태워 없애면서 동시에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예술가의 손에서 ‘파괴’는 창조가 되고, ‘소멸’은 이미지의 탄생이 된다. 이 점에서 바슐라르의 불의 철학은 20세기 현대미술의 가장 과감한 실험들과 직접적으로 만난다.
알베르토 부리 ― 불로 그린 그림들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 1915–1995)는 ‘불’이라는 원소를 회화의 언어로 확장한 대표적 작가다. 작품을 붓 대신 불로 그린다. 부리는 자루, 목재, 플라스틱, 섬유를 불로 태우거나 눌러 재료의 표면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알베르트 부리 <플라스틱 연소> 혼합재료, 페인팅. 1955. 구겐하임 뮤제움, 뉴욕, 미국
https://www.guggenheim.org/teaching-materials/alberto-burri-the-trauma-of-painting/techniques (교육용 제공)
부리는 플라스틱을 실제로 태워 녹아내린 자국과 구멍, 번진 연기의 흔적을 화면에 남긴다. 이때 불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가 된다. 불이 어떻게 타오르고 어떻게 사그라지는지에 따라 작품의 형상이 우연하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부리의 태움 작업은 인간의 통제와 불의 자율성이 뒤섞인 상상력의 극한이다. 그의 작품은 “물질이 스스로 변형되는 순간”을 기록한다.
불의 흔적은 ‘상실’이 아니라 ‘탄생’이다
부리의 작업을 보면, 구멍, 찢어짐, 그을림, 재로 변한 물질이 남는다. 전통회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파괴다.
바슐라르는 그 반대를 말한다.“불은 사라짐에서 새로운 형상을 낳는 원소이다.”
불로 인해 생긴 상처는 오히려 새로운 이미지의 탄생지가 된다. 이것은 생명과 예술 모두에 적용된다. 우리가 잃을 때 비로소 얻는 것, 버릴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 소멸 속에서 다시 생겨나는 것들. 부리의 화면에서 불은 죽음이 아니라 변신의 에너지다. 불은 물질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다른 상태’로 번역한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흔적의 미학, 상처의 미학, 변형의 미학에 서 있다.
불이 산을 활활 불태울 때 우리는 안타까움으로 가슴을 태운다. 시간이 지나 봄이 되면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뽀족이 고개를 내미는 자연의 놀라운 복원력을 경험한다. 예술도 그렇다. 캔버스를 불로 태울 때 모두들 깜짝놀라지만 그 결과는 강한 메세지를 담은 하나의 작품이 된다. 불은 변신의 에너지다.
불의 상상력과 현대미술 ― 욕망의 전기(電氣)
불은 상상력의 가장 빠른 이미지이자, 가장 ‘격렬한’ 감정의 언어이기도 하다. 불의 이미지는 현대미술에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이브 클랭의 불 그림들
왼쪽 <F101> 패널에 탄 판지. 62.5 x 52cm. © The Estate of Yves Klein c/o ADAGP, Paris.
오른쪽 <FC17> 탄 판지에 건조안료, 합성수지. 106 x 94cm © The Estate of Yves Klein c/o ADAGP, Paris ©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Humlebæk, Danemark 장기 대여품.
이 모든 작업은 불의 철학적 의미, 즉 힘·속도·변형·폭발·소멸·에너지라는 상상력의 요소들을 다룬다.
예술가들에게 불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이미지를 탄생시키는 가장 원초적 에너지다.
불은 상상력의 가장 밝은 얼굴이자, 가장 어두운 그림자이다
바슐라르는 <불의 정신분석>을 “욕망의 철학”이자 “창조의 심리학”으로 썼다.
불은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창조의 욕망이자, 우리의 그림자를 비추는 파괴의 내면이다. 불이 남긴 상처는 단지 소멸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는 생성의 자리이다.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은 불이 남긴 빛과 그림자를 하나의 이미지로 묶는 일이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그 불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는 순간을 발견해왔다.
<공기와 꿈> - 운동에 관한 상상력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정영란 옮김. 2017. 이학사
공기의 시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예술
공기는 상승, 투명성, 초월의 상상력을 제공한다.
공기는 가장 가벼운 원소이지만, 바슐라르에게는 가장 시적인 물질이다. 그는 공기를 ‘상승하는 상상력’이라 부른다. 구름, 바람, 하늘, 새, 비행…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현실을 초월하려는 욕망의 표상이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피레네의 성>은 바슐라르가 말한 공기의 상상력과 잘 맞닿아 있다. 바위가 하늘에 떠 있는 그림은, 중력의 법칙을 거부한 ‘상승의 꿈’이다.
그림 1.
url을 클릭하여 이미지를 정당하게 감상하세요. 공정 이용(fair use) 작품입니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캔버스에 유채, 200×145cm. 1959. 이스라엘 뮤제움, 예루살렘, 이스라엘.
또한 이브 클랭의 <르 뢰프 뒤 비드(Le Vide, 공허)> 전시 역시 ‘공기의 미학’을 극단적으로 구현했다. 전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관객은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느꼈다. 바슐라르가 “공기는 부재의 시학이다.”라고 말한 대목이 여기서 실현된다.
그림 2.
이브 클랭 <공허> 1958년 4월 28일부터 5월 15일까지 파리의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
https://www.littleartnecdotes.com/le-vide-1958/
빈 공간이다. 이 작품이 전시되는 동안 알베르 카뮈도 관람객으로 방문하여 방명록에 기록을 남겼다.
"avec le vide, les pleins pouvoirs"(공허와 함께, 온전한 힘으로).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가득 채운다.
바슐라르의 네 번째 원소 ‘공기’는 대지·물·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대지는 무게, 물은 감정, 불은 욕망이라면, 공기는 비가시성·가벼움·상승·해방을 상징한다. 그는 공기를 “가장 시적인 원소”라고 불렀다. 공기는 형태를 갖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이미지적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만져지지 않지만 감지되고, 무게가 없지만 운동을 만들어낸다. 바슐라르에게 공기는 상상력의 해방 그 자체다.
상승하는 상상력 ― 날아오르려는 인간의 꿈
만약 당신이 역동적인 꿈들은 꾸는 가운데 이러한 최소한의 경사로, 눈으로는 결코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아주 약간만 기울어진 이 같은 길을 만나게 된다면, 날개들이, 당신 두 발에 조그만 날개들이 솟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발꿈치는 날아오르고, 가벼우며, 섬세한 활력을 얻을 것이며, 그 발꿈치는 곧 아주 간단한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하강을 상승으로, 걷기를 도약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은 가볍고, 모든 신성한 것은 섬세한 발로 달린다" 라는 "니이체적 <미학>의 첫 번째 명제"를 당신은 체험하게 될 것이다. 77쪽. 제1장 "공중을 나는 꿈"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언제나 위로 향한다. 인간은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꿈꾼다.'
공기의 이미지는 ‘상승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위를 향해 바라보고, 비행을 꿈꾸며, 하늘을 동경한다.
새들이 우리의 상상력에 위대한 도약의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 새들이 가진 화려한 색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논지로서 제시하려 한다. 새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은 원초적으로 새의 비상이다. 역동적 상상력에 있어서 비상은 으뜸가는 아름다움이다. 133쪽 "날개의 시학"
상승의 이미지는 예술 전반에서 반복된다. 하늘로 솟는 첨탑, 비상하는 새, 구름 위에 앉은 천사, 공중에 떠 있는 돌 -이 모든 것은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인간의 오래된 바람의 흔적이다.
바슐라르의 공기 철학은, 예술가가 물질의 무게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할 때 어떤 이미지가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브 클랭 ― 보이지 않는 것의 신뢰, 공기의 예술
이브 클랭(Yves Klein)은 바슐라르적 공기의 시학을 가장 급진적으로 실천한 예술가다. 그의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위에 있다.
이브 클랭 <공중으로의 도약> 1960. 젤라틴 실버 프린트, 25.9 x 20cm.
권리와 복제 © Yves Klein, ADAGP, 파리; 사진: Shunk-Kender © Roy Lichtenstein Foundation.
1960년 10월, 클랭은 사진작가 해리 슌크와 장 켄더를 고용하여 작가가 올해 초에 시도했다고 주장하는 2층 창문에서의 점프 장면을 재현하는 사진을 제작했다. 이 두 번째 점프는 파리 교외 퐁트네오로즈의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아래 거리에서 작가의 친구들이 방수포를 들고 떨어지는 그를 잡아주었다. 두 장의 네거티브 필름(하나는 클랭이 뛰어내리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방수포가 없는 주변 풍경)을 인화하여 완벽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만들었다. 클랭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환상을 완성하기 위해 파리 신문 가판대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가짜 신문을 배포했다. 예술가의 획기적인 행동은 대량 생산 형태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었디. (메트로폴리탄 뮤제움 콜렉션 설명 참고)
이 유명한 사진 속에서 클랭은 거리의 2층 높이에서 공중으로 뛰어내린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몸은 허공 속에서 멈춰 있고, 그 아래의 땅은 텅 비어 있다. 이 이미지가 강렬한 이유는 ‘믿음’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클랭은 실제로 보호막 위로 점프했고, 사진은 조작되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공기를 믿는다'는 메세지다.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바슐라르가 말한 공기의 상상력,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신뢰하는 태도다.
클랭의 전설적인 전시 <공허>(위 그림2) 또한 비어 있는 방을 작품으로 제시하며 공기와 에너지, 보이지 않는 것의 진동을 경험하게 한다. 바슐라르가 말한 대로 공기는 부재의 시학, 부재를 통해 존재를 느끼게 한다. 클랭은 '부재의 미학'을 예술로 시각화했다. 누구나 존재를 가장 확실히 느낌은 부재를 통한 경험이 많을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우리 속담도 있지않은가.
우리는, 넓게는 동양사람은 형태가 없는 빈 공간을 훌륭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동양화에서 비어있는, 색칠하거나 형태를 그리거나 하지 않은 빈 화면을 하늘이라 알고, 바다라 알고, 강물이라 안다. 안다기 보다는 느낀다. 서양화에서는 형태가 없는 곳엔 흰색을 칠한다. 채색의 색이 없는 경우에 그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흰색을 칠한다. 바슐라르가 이 책에서 "공기"를 논한 것은 동양화의 여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중국 산수화나 조선 산수화를 많이 보아온 나로서는 자연스럽게 "여백"을 떠올렸다.
마그리트 ― 공중에 떠 있는 돌, 생각의 비중력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공기의 철학을 초현실의 방식으로 확장한다. ‘공기’를 실체가 아니라 사유의 공간으로 다룬다. 특히 <피레네의 성>(위 그림1)에서 거대한 바위가 허공 위에 떠 있는 모습은 중력을 거스른 상상력의 대표적인 시각화다. 이 이미지는 말 그대로 '논리가 끊어진 장소'다. 바슐라르가 말한 공기의 초월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마그리트는 작품을 통해 묻는다.
“우리의 현실감각은 왜 항상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하는가?”
마그리트의 공기 이미지는 결국 사유의 해방이다.
공기의 예술은 비가시성의 예술이다
공기의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기 때문에 더 많은 신뢰, 감각, 사유를 요구한다. 클랭은 빈 방과 공중 점프로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존재를 말했다. 마그리트는 허공에 떠 있는 돌로 중력을 벗어난 사고를 그렸다. 바슐라르의 철학은 이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에 언어를 제공한다. 공기는 사라짐의 이미지이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존재를 본다고.
공기의 상상력은 예술가가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공기가 비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그 세계의 상상력을 보지 못한 것이다.
공기는 상상력의 마지막 단계, 자유의 공간
바슐라르는 네 원소 중 공기를 가장 ‘높은’ 단계에 두었다. 공기는 인간의 상상력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자유·해방·초월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공기는 형태가 없지만, 그 속에서는 모든 상상이 가능하다. 공기는 비어 있지만, 그 안에는 가장 많은 세계가 담긴다.
이브 클랭의 점프, 마그리트의 허공의 돌, 바슐라르의 투명한 이미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순간, 상상력은 가장 멀리 날아오른다.”
바슐라르의 4 원소론은 단순한 상징체계가 아니라, 감각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잇는 다리다. 그의 상상력은 '사유하는 이미지'이며, '이미지를 낳는 사유'다. 미술가가 붓을 들 때, 그는 단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 방식을 부여한다.
불, 물, 공기, 대지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정과 세계관이 투사된 존재의 물질적 언어다. 바슐라르의 철학은 언어 이전의 세계, 즉 이미지의 근원적 층위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현대미술에서 재료, 질감, 물성의 탐구가 중요해진 이유는 바로 바슐라르적 감수성 덕분이다. 결국 예술은, 불의 열정과 물의 깊이, 공기의 자유, 대지의 무게를 동시에 품은 인간의 꿈이다.
그가 말했듯, 상상력은 물질의 언어로 말하는 영혼이다.
불은 예술의 열정,
물은 감정의 흐름,
공기는 자유의 상상력,
대지는 존재의 무게를 상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를 떠올리면 늘 두 개의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실험실에서 정밀하게 기체를 다루는 과학자, 다른 하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불꽃을 응시하는 시인이다. 그는 이 둘을 모두 살았고, 어느 쪽에도 갇히지 않았다.
가난한 우체국 직원에서 불·물·공기의 철학자로
바슐라르는 프랑스 샹파뉴의 작은 마을 바르쉬르오브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0대 대부분을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낮에는 편지를 분류하고, 밤에는 물리학과 화학 교재를 펼쳐 독학하던 시절. 누군가는 더 나은 직업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 말했겠지만, 바슐라르에게 공부는 ‘더 나은 존재’를 위한 일이었다. 그는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대학을 졸업했고, 40대가 되어서야 철학자가 되었다.
이성과 꿈의 전원을 교대로 켜두는 사람
바슐라르는 현대 과학철학의 핵심 개념인 ‘인식론적 단절’을 말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빛날 때는 실험실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의 언어로 말할 때였다.
“나는 이성과 꿈을 동시에 사랑한다.”
이 문장은 그의 내면을 가장 정확히 보여준다. 바슐라르는 현실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과학을 공부했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시와 상상력을 탐구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느냐보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꿈꾸느냐였다.
‘상상력’이란 단어의 의미를 뒤흔든 사람
바슐라르의 상상력이 독특한 이유는, 상상력을 정신의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원동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미지는 관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그 반대를 말했다. 이미지는 존재의 진심에서 솟아오른다. 이미지는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물질과 감각의 첫 움직임에서 생겨나는 흐름이다. 이미지의 가장 깊은 고향을 물·불·공기·대지 같은 원초적 물질에서 찾았다. 이를 ‘상상력의 원소학’이라 불렀다.
불을 보면 우리는 이유 없이 뜨거워지고, 물을 보면 알 수 없는 슬픔이 떠오르며, 공기를 보면 자유를 꿈꾸고,흙을 보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심리학·시학·철학·예술이 만나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바슐라르는 평생 ‘불꽃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시인이었고, 평생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불의 철학을 쓰기 위해 그는 되풀이해서 불꽃을 바라보았고, 물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강가를 걸었으며, 공기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사유는 책상 앞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세계로부터 철학을 배웠다. 그의 글은 읽으면 설명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들어온다. 철학의 언어를 시의 리듬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리라.
바슐라르가 남긴 가장 큰 유산 – 이미지의 자유
바슐라르가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의 사상은 지금도 미술·사진·영화·문학 이론에서 계속 인용된다. ‘상상력’이라는 단어의 존엄을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그에게 상상력은 도피가 아니라 생성이었고, 왜곡이 아니라 진실이었으며, 허구가 아니라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물질·시간·기억·감정·초월을 말할 때, 어딘가에 바슐라르의 흔적이 스며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은 불꽃만이 아니며, 물은 단순한 흐름이 아니며, 흙은 땅만이 아니며, 공기는 공허하지 않다. 그 모든 것 안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깨어난다.
바슐라르는 물질로부터 영혼을, 영혼으로부터 이미지를 끌어올린 사람이었다.
4부 역사성과 윤리
17화. 조르조 아감벤과 크리스토퍼 울
다음 주 수요일(12/3) 연재 4부17화부터는 다시 멤버십 글로 발행합니다. 이미 월회비를 지불하신 멤버십 구독자분들께 대한 예의를 지켜야할 것 같아서요. 일반글로 발행하면 그분들이 멤버십 구독하는 의미가 없을테니까요.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