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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와 루치오 폰타나-절단의 미학, 해체의 공간

by morgen

3부 언어와 기호의 관계

<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에 업로드된 이미지는 인정된 퍼블릭 도메인이거나, 공정 이용(fair use)에 따라 저작권을 존중하는 공식 미술관 사이트 링크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지난 주 연재글을 발행하지 못하여 이번 글은 멤버십발행하지 않고 일반 발행합니다.)


14화. 자크 데리다와 루치오 폰타나 – 절단의 미학, 해체의 공간

우리는 언제부터 ‘캔버스’가 하나의 완결된 세계라고 믿어왔을까. 표면은 언뜻 매끄럽고 평온하지만,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 위에 칼날을 그었다. 색을 칠하는 대신, 색을 찢었다. 데리다가 언어의 ‘텍스트’를 해체하여 그 틈새에서 새로운 의미의 생성 가능성을 열었듯, 폰타나는 회화의 ‘표면’을 찢음으로써 예술의 경계를 다시 물었다.


절단, 균열, 그리고 존재의 틈

데리다의 철학은 ‘중심’과 ‘로고스’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데리다의 “의미는 결코 닫히지 않는다. 모든 흔적은 또 다른 흔적을 부른다.”는 말은 폰타나의 칼자국과 닮아 있다. 폰타나의 ‘공간 개념’ 회화는 붉고, 하얗고, 때로는 금빛의 캔버스를 날카롭게 가른다. 찢긴 틈 사이로 어둠이 드러난다. 어둠은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이다. 데리다의 해체가 부정이 아니라 ‘열림’이듯, 폰타나의 절단도 파괴가 아니라 창조다.

폰타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의 한계를 넘어 공간 속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의 칼날은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회화라는 언어의 문법을 해체하는 철학적 제스처였다.


표면 너머의 언어 – 데리다의 흔적(trace)

데리다에게 언어는 결코 투명한 창이 아니다. 말은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또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 ‘차연(différance)’이라고 한다. 의미는 언제나 지연되고, 완전히 도달되지 않는다.

폰타나의 캔버스 역시 닿을 수 없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앞에서 ‘보이지만 볼 수 없는’ 틈을 마주한다. 그 틈은 데리다의 ‘흔적(trace)’과 같다. 캔버스는 찢겼지만, 안에서 오히려 존재의 흔적이 드러난다. 찢김은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존재의 증거다. 데리다가 말한 ‘존재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결여 속에서 더 강하게 드러난다. 자크 데리다의 이론들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많은 연구자들이 쉽게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었지만, 선뜻 삼키지 못하고 계속 씹고만 있었다. 그럴 즈음 나는 루치오 폰타나의 그림 앞에서 데리다를 만났다. "이거다!" 찢음은 해체요, 찢은 틈속의 공간은 해체 이후다.


절단의 미학 – 공간의 언어로 말하다

폰타나의 작업은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문다. 붓 대신 칼을 들고,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린다. 데리다의 해체 역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철학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의 방식으로 언어와 예술의 문법을 뒤집었다.

폰타나의 <공간 개념, 기대들 Concetto Spaziale, Attese> 연작에서 칼로 그어진 선은 명확한 중심 없이 흩어진 기호들이다. 데리다에게 텍스트가 중심 없는 ‘차연의 장’이듯, 폰타나의 캔버스도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 절단의 순간, 우리는 하나의 표면이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되는 것을 본다. 그 사이, 어둠의 틈 속에서 공간의 존재가 깨어난다.

유명인의 이름과 더불어 함께 따라붙는 단어들이 있다. 톨스토이=부활, 헤세=데미안, 이중섭=황소, 이런 식으로 자크 데리다에는 "해체"가 첫 단어로 따라온다. 곰곰 생각해본다. "해체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해체"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폰타나의 작품 앞에서 해체 이후를 생각하게 된다. 해체 이후를 본다. 폰타나가 찢어놓은 틈에서 드러나지 않은 틈 속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데리다의 "해체"에서 "해체 이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림 1. url을 클릭하여 이미지를 정당하게 감상하세요. 공정 이용(fair use) 작품입니다.

https://sammlung.staedelmuseum.de/en/work/concetto-spaziale-attese

루치오 폰타나 <공간개념, 기대들> 캔버스에 유화, 4번 자름. 92 x 73cm. 슈테델 뮤제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독일


캔버스에는 네 번의 자른 자국이 있다. 수 세기 동안 회화에서는 원근법과 빛과 그림자의 조형을 통해 공간의 형상을 만들어 왔다. 폰타나는 캔버스를 깎아내는 행위, 즉 그림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행위, 모든 회화의 기본적 조건인 자른 자국을 통해 이러한 전통을 깨뜨린다. 캔버스를 부조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색채는 공간적 요소가 된다. 작품 뒤에는 새로운 상상의 공간이 펼쳐지고, 자른 표면을 통해 실제 공간과 하나가 된다.

자크 데리다는 <불량배들(Voyous)>에서 “경계는 주권을 세우지만, 동시에 그 주권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했다. 이 구절은 찢김이라는 경계 행위의 이중성을 철학적으로 보강해준다. 폰타나의 칼날이 캔버스의 주권을 해체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해설과 유사하다.

폰타나의 칼날은 데리다가 말한 구조속 ‘차연(différance)’의 시각적 은유처럼, 의미를 지연시키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중심의 의미가 확장되는 상황을 설명한다. 고정된 중심이나 궁극적 의미('초월적 기의')가 없다면 기호의 해석은 무한히 유연해진다고 주장한다.

"중심 또는 기원의 부재중에 모든 것이 담론-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합의하는 조건하에-이 되는 순간, 즉 중심 시니피에가 기원이든 초월이든간에 차이들의 체제 밖애 결코 절대적으로 현전하지 않는 시스템이 되는 순간이다. 초월적 시니피에의 부재는 의미 작용의 장과 활동을 무한히 넓힌다." <글쓰기의 차이> 442쪽.

이러한 생각은 의미를 발견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기존 관점에 도전하며, 의미가 언어 내에서 유희와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폰타나 작품속 ‘기대들(Attese)’은 바로 그 지연의 미학이다. '찢음'으로 표현한 절단은 완결이 아니라 다음 흔적의 약속이며, 그 틈 속에서 우리는 색이 말하지 못하는 언어를 듣는다. 모든 의미가 표면에서 전달되는 기존 회화의 관점에 도전하며, '찢김' 속 틈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그림 2. url을 클릭하여 이미지를 정당하게 감상하세요. 공정 이용(fair use) 작품입니다.

https://www.guggenheim.org/artwork/1335

루치오 폰타나 <공간개념, 기대들> 1965. 캔버스에 수성페인트 흰색. 130 x 97cm. 구겐하임 뮤제움, 뉴욕, 미국


‘차연(différance)’과 폰타나의 ‘기대들(Attese)’ — 지연과 틈의 미학

폰타나의 <공간 개념, 기대들 Concetto Spaziale, Attese> 연작은 절단의 반복을 통해 일종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리듬은 완결되지 않는다. 화면 위에 병렬된 칼자국들은 규칙처럼 보이지만, 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 간격을 가진다. 불균질성은 바로 데리다가 말한 ‘차연(différance)’의 시각적 등가물이다.

데리다에게 차연은 단지 ‘차이(difference)’가 아니라, 의미가 끊임없이 지연되고 미끄러지는 운동이다. 저서 <글쓰기와 차이>는 그 의미를 잘 전달한다. 의미는 결코 현재에 도달하지 않고, 늘 다른 흔적을 통해 지연되며, 그 지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폰타나의 칼날은 바로 이 ‘지연된 도달’을 시각화한다. 절단된 순간, 우리는 색면의 완결된 현재에서 벗어나, 그 너머의 어둠을 "기대(Attese)"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어둠은 닫히지 않고, 그 틈은 영원히 열려 있다. 데리다의 언어에서처럼, 폰타나의 공간에서도 의미는 도래하지 않고, 다만 흔적만이 남는다.

연작 제목 “Attese(기대들)”은 복수형이다. 하나의 기대가 아니라, 끝없이 연기되는 복수의 가능성이다. 데리다의 ‘차연’이 ‘지속적 지연’의 운동이라면, 폰타나의 ‘기대들’은 그 운동이 빛과 어둠의 물질로 구현된 공간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찢김은 언어의 부재가 아니라, ‘다음 의미를 향한 여백’이다. 바로 그 여백에서 회화는 철학으로, 색은 사유로 변모한다.


경계와 주권 ― 폰타나의 칼날이 묻는 지배의 틀

데리다는 <불량배들(Voyous)>에서 “경계는 주권을 세우지만, 동시에 그 주권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썼다. 주권은 질서를 세우는 힘이지만, 그 힘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경계’를 그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바로 불안의 시작이다. 경계는 권력의 표식인 동시에, 그것이 무너질 수 있는 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폰타나의 칼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한다. 캔버스는 회화의 ‘주권’이자 예술의 법전이었다. 그 위에 질서를 세우고, 아름다움을 정의하며, 의미를 통제했다. 그러나 폰타나는 그 주권의 표면을 가른다. 그가 찢는 것은 단지 천이 아니라, 예술 제도 자체의 주권적 경계다. 그의 절단은 폭력적이지만, 그 폭력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권의 재구성’을 향한 질문이다.

데리다가 ‘불량배(voyou)’라는 말을 통해 제도와 권력의 언어를 전복했듯, 폰타나의 칼날도 예술의 주류적 언어를 거부한다. 불량배는 법의 바깥에서 법을 드러내는 자이고, 폰타나는 회화의 바깥에서 회화를 재구성하는 자다. 그는 캔버스의 질서를 어기며, 그 질서를 다시 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절단은 무정부적 반항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공간의 선언이다 — “공간은 닫히지 않는다. 권력의 표면에도 틈이 있다.”

폰타나의 작품에서 이해를 도와준 나의 데리다 책들.

https://brunch.co.kr/@erding89/376


흔적과 빛 ― 부재 속에 드러나는 존재의 층위

<글쓰기와 차이>는 흔적(trace)은 부재의 표식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지연의 자취라고 말한다.
흔적은 사라진 것의 그림자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남긴 여백이다. 존재는 결코 완전한 현존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항상 어떤 결여와 함께 나타난다.

폰타나의 캔버스를 떠올려보자.
‘절단, 찢음'은 무엇인가를 없앤 흔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빛과 어둠의 층위다. 칼날이 통과한 자리에는 음영이 생기고, 그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보는 이의 시선은 찢긴 캔버스 뒤편의 어둠 속을 향한다. 틈은 공허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이 머무는 자리다.

데리다가 말한 ‘흔적의 논리’는 이 어둠(찢긴 틈) 속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존재는 결코 하나의 고정된 표면이 아니며,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가른다. 폰타나의 회화는 바로 그 ‘자기 절단의 존재론’을 보여준다.
찢김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문틈이다. 어둠과 빛, 부재와 현존이 교차하는 그 순간, 회화는 더 이상 색의 문제도, 형식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운동, 곧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는 언어다.


해체 이후의 공간, 존재의 틈에서 빛을 보다

데리다와 폰타나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동일한 질문으로 수렴한다.
“경계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배제하는가?”
“의미는 어디에서 사라지고, 어디에서 다시 생겨나는가?”

폰타나의 칼날은 데리다의 문장처럼 우리에게 ‘열림’을 가르친다. 찢김의 순간, 권력은 무너지고, 언어는 흔들리며, 의미는 지연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난다.
틈 속에서 빛이 들어오고, 우리는 비로소 사유의 깊이를 본다.
해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절단은 단절이 아니라 통로다. 그 길을 따라, 회화는 다시 철학이 되고, 철학은 다시 회화가 된다.


해체 이후의 세계

데리다는 말한다.

“해체란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읽는 일이다.”
폰타나의 절단도 마찬가지다. 찢김은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읽기’의 시작이다. 회화라는 텍스트를 새롭게 읽고자 했다. 더 이상 캔버스는 하나의 평면이 아니며, 그림은 단지 ‘표면 위의 색’이 아니다. 그곳은 ‘존재의 틈’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 틈에서 우리는 세계의 경계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본다. 데리다의 철학이 ‘언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면, 폰타나는 ‘공간의 경계’를 찢어냈다. 철학과 예술은 서로를 비추며, 완결된 세계 대신 ‘균열 속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다.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

루치오 폰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결합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예술 형식의 창시자다. 회화의 평면성을 거부하고 캔버스를 실제로 찢거나 구멍을 뚫는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 시리즈로 유명하다. 그의 작업은 회화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건축, 조각, 회화의 전통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그는 관람객을 새로운 감정과 감각적 경험에 몰입시키는 작품을 제작하며, 풍부한 연구의 길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시작으로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매료된 폰타나는 미국과 소련이 우주 경쟁에서 맞붙던 시대적 맥락에서 활동했다.

1940년대 후반, 종이와 캔버스 표면에 구멍을 뚫어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20년 동안 구멍을 자신만의 시그니처로 발전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공간 개념, 기대들>에서 폰타나는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후, 만능 칼을 사용하여 그림 평면을 위에서 아래로 자르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각 절개를 벌렸다. 마지막으로, 캔버스 뒷면을 검은색 거즈로 덮었다. 폰타나가 애정을 담아 "작은 캔버스"라고 부르는 검은색 거즈는 고정된 지지대를 제공함으로써 컷 가장자리의 변형을 방지한다. 그림 뒤편의 벽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작은 캔버스"는 또한 무한한 공간, 즉 눈에 띄는 제약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두운 공허함을 강조한다.

검은 빛은 폰타나가 어둠을 환기시키는 장소로 탈바꿈시켜 관람객들에게 완전한 감각적 자유 속에서 지각할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빛나는 공간"의 감정을 선사했다. 캔버스 바로 뒤, 그 너머에 신비로운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2004)

프랑스의 철학자. ‘해체(deconstruction)’라는 개념으로 서구 형이상학 전통의 중심 논리를 비판했다. 언어, 의미, 텍스트의 불안정성을 탐구했다. 그의 철학은 문학, 예술, 건축, 정치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데리다의 작품 <글쓰기와 차이>와 <문학의 행위>는 별도로 책리뷰를 쓸 예정이다.)



3부 언어와 기호의 관계

15화 가스통 바슐라르의 사상이 미술에 미친 영향 - 이미지 4원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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