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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울과 아감벤 -역사의 잔해, 윤리의 시작

12월 3일에 대한민국에서 읽는 책과 예술작품.

by morgen

4부 역사성과 윤리

17화 조르조 아감벤과 크리스토퍼 울 -역사의 잔해 위에서, 윤리가 시작될 때


(브런치 연재 약속을 지키기위해 며칠 전부터 조르조 아감벤을 읽었다. 아감벤의 <예외상태>를 다시 훑어본다. 정상성의 붕괴가 곧 "예외 상태"의 일상화라고 한다. 법과 무법의 경계가 흔들리는 공간이 곧 "예외 상태"라고 한다. 12월 3일에 읽기 딱 좋은 책이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증언은 말할 수 없는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 다시 들춰보아야 할 책이다.)


언어가 무너지고, 이미지가 흔들리고

1980년대의 뉴욕을 떠올리면, 한 도시가 내는 소음보다 더 큰 사회적 진동이 있었다. 범죄율이 치솟고, 경제는 표류하며, 인종 갈등은 도시의 허파를 따라 금이 갔다. 자본은 도덕의 속도를 앞질렀고, 거리 곳곳에서 쏟아지는 광고의 언어는 의미보다 욕망을 더 많이 팔았다.

그 한복판에서 크리스토퍼 울(Christopher Wool, 1955- )은 말이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시대를 보았다. 언어는 명령어가 되었고, 간판처럼 반복되며, 때때로 폭력처럼 들렸다. 울은 고장 난 언어들을 캔버스에 그대로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반면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 )은 철학을 통해 같은 시대의 균열을 읽었다. '정상성과 예외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연구하고, 말해질 수 없는 것, 증언할 수 없는 것, 남겨진 잔해의 윤리를 탐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르고 작업했지만, 역사의 잔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동시대의 두 증인이 되어 있다.


울의 회화 : 말의 잔해로 남은 시대

울의 대표작은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SELL THE HOUSE SELL THE CAR SELL THE KIDS(집을 팔아요 차를 팔아요 아이들을 팔아요)"

1968년의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지옥의 묵시록>(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1979)에서 나온 대사지만, 울이 이 문장을 끊김 없이 연속으로 박아넣자 그것은 더 이상 영화의 문장이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의 심리적 붕괴, 자본의 폭력, 도덕적 공황이언어 형태로 폭발한 것에 가깝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철학자나 예술가도 예외는 아니다. 시대를 보는 눈이 누구보다 더 예민한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대를 묘사한다. 글로, 소리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결코 보편적인 아름다움 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까지도 그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넣는다.


그림 1. url을 클릭하여 이미지를 정당하게 감상하세요. 공정 이용(fair use) 작품입니다.

https://www.guggenheim.org/teaching-materials/christopher-wool/words?gallery=wool_L2

크리스토퍼 울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88. 원본 강철에 페인트. 알키드 에나멜, 스텐실 처리. 71.8 x 65.4cm. 스테파니 시모어 콜렉션/브란트 파운데이션 그린위치, 코네티컷, 미국.


가족·집·존재를 사고파는 시장의 언어, 재난 상황에서의 인간의 절망, 모든 것에 대한 윤리적 마비를 드러낸다. 울은 전쟁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전쟁 이후 남은 말의 잔해를 보여준다. 언어는 역사보다 먼저 붕괴한다는 사실을 그의 회화는 증언한다.

아감벤은 <예외상태>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외(상태)가 기초하고 있는 긴급 상태는 어떠한 법률적 형식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많은 저자들은 예외상태에 관한 이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법과 정치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이 '예외상태'라는 개념 자체를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13쪽

울의 문장은 바로 그 경계의 흔들림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말이 법적 의미도, 도덕적 의미도 잃어버린 자리에서 악몽처럼 반복된다.


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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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미술관> <조선과 서양의 풍속화, 시대의 거울> 출간작가. 북아트강사. 미술관 도슨트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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