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4부 역사성과 윤리
18화 <호모 사케르>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2008. 새물결
연재가 끝난 브런치북 "경계, 누가 이 선을 그었을까?"를 쓰는 동안 계속 조르조 아감벤을 읽어왔다. 그러던 중에 아감벤의 철학과 연결되는 크리스토퍼 울의 미술작품에 대한 글("그림 속 철학, 철학 속 그림" 17화)을 썼다. 지금은 미술작품을 떠나 순전히 조르조 아감벤에 집중한다.
경계에 대한 연재글이 아니어도, 미술과 철학의 연결점을 찾고자하는 시도가 아니어도,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고, <예외상태>를 읽는 것은 시대의 요구처럼 느껴졌다. 마치 읽어야 할 의무감이 있는 것같았다. 그리고, 읽은 이야기를 곁사람들에게 말해야 될 것같았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함께 읽으면 좋을 것같은 책이다.
이 책은 읽는 내내 묘한 감정을 준다. 어떤 문장들은 지나치게 단단하고, 어떤 문장들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결국 하나의 문장이 또렷하게 남는다.
'정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벌거벗은 삶’을 만들어내는 권력이 있었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이 한 문장을 끝없이 변주하는 책이다. 이러한 진술은 단지 고대 로마법이나 철학적 개념을 다루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국경과, 사회의 경계와, 타자에 대한 시선까지 직접 겨냥한다. 철학적 여정을 가능한 한 부드러운 언어로 따라가보려는 시도다.
아감벤은 삶의 가치를 좌우하는 정치적 현실과 주권의 구성체 내에 내재된 갈등을 직시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독자는 책의 활자에만 눈을 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크게 떠야한다.
책 속에는 여러 철학자들의 이론이 인용돼있다. 아감벤은 인용출처를 기록해놨지만 그것은 아감벤이 읽은 책이름과 페이지 수이고, 한국어 번역서와는 제목과 페이지 수가 다르다. <호모 사케르> 속의 인용문은 리뷰에 재인용으로 표기했다. (참고로, 내게 있는 책이 인용으로 쓰인 경우엔 한국어 번역서에서 직접 인용하여 덧붙인다.)
아감벤은 로마법 속의 기묘한 인물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출발한다. 어떤 죄를 지어 공동체에서 추방된 존재로, 누구든 그를 죽일 수는 있지만, 종교적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호모 사케로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156쪽.(패스투스의 논집 <말의 의미에 대해> “성산(聖山 Sacer mons’)”항목에서 재인용.)
아감벤은 이 기묘한 규칙을 단순한 고대의 잔뼈 같은 사례로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 속에서 서구 정치의 구조적 비밀을 발견한다. “법에 의해 포함되면서 동시에 배제된 삶” “죽일 수 있으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삶” 호모 사케르는 법의 경계 위에 선 인간이다. 법 바깥으로 추방되었지만, 추방을 결정한 존재는 법 자체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이 모순적인 위치를 두고 “포섭적 배제(inclusive exclusion)”라고 부른다. 배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배제는 권력의 구조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런 사람이 있는가? 아감벤의 대답은 단호하다. “있다. 아주 많다.”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는 개념은 이 책의 핵심이다. 아감벤은 서문에서 이 고전적 구분을 꺼내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어에는 ‘삶’을 뜻하는 단어가 둘 있다. zoē(순수한 생물학적 삶), bios(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된 삶).
조에zoē는 모든 생명체(동물, 인간 혹은 신)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켰다. 반면 비오스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33쪽
서양 정치는 처음부터 bios, 즉 ‘형식지어진 삶’에 관심을 두어 왔다. 하지만 그 기반에는 늘 zoē, 즉 벌거벗은 생명이 있었다. 정치는 늘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해 왔다. 시민, 국민, 구성원, 노동자, 투표권자… 이 명칭들에서 밀려나면 무엇이 남을까?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만 남는다. 아감벤은 이 생명을 국가가 언제든 포획할 수 있는 가장 취약한 지점이라 말한다.
호모 사케르의 지위를 규정하는 것은 본래 그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성함의 본래적인 양가성이 아니고, 그가 사로잡혀 있는 이중적 배제 그리고 그가 노출되어 있는 폭력의 특수한 성격이다. 이러한 폭력 -누구라도 처벌받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살해-은 희생 제의로도 또 살인으로도 정의될 수 없으며, 사형수에 대한 사형 집행으로도 또 신성 모독으로도 정의될 수 없다. 175-176쪽
우리 사회의 특정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난민 심사에서의 거절, ‘보호소’라 불리는 계산된 공간들. 이들은 종종 시민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며, 단지 ‘머물러 있는 자’로 취급된다. 법의 안에도 밖에도 속하지 않는 이 상태를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이라 한다. 이 생명이야말로 근대 국가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부 1장 “주권의 역설”에서 아감벤은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카를 슈미트의 잘 알려진 명제를 다시 불러온다.
“주권자는 상황을 그 전체성 속에서 수립하며 보장한다. 주권자만이 이런 궁극적인 결정권을 독점한다. 국가 주권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57쪽.(칼 슈미트 <정치신학>pp.39-41 재인용. 한국어번역본 <정치신학>(김항옮김,2010, 그린비) 16쪽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이 말은 단순한 법철학적 문구가 아니다. 비상사태, 긴급조치, 국가안보라는 이름 아래 법은 쉽게 중단될 수 있다. 모순적인 것은, 법이 중단되는 그 순간, ‘그 중단을 결정하는 권력’은 오히려 더욱 강해진다는 점이다.
아감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거벗은 생명’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예외상태는 법이 완전히 사라진 공간이 아니다. 법이 자신의 경계를 스스로 그어놓고, 그 밖의 삶을 몰아내는 공간이다.
오늘 세계의 수많은 현상이 새롭게 보인다. 팬데믹 당시의 봉쇄, 출입국 금지, 검역 절차, 국경 통제… 이 모든 장면은 단지 정책이 아니라 법·권력·생명이 교차하는 정치적 순간이다. 책은 예외 상태에서 우리의 법적 보호가 얼마나 취약한지, 강압적인 세력이 예외적인 상황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악용할 가능성을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주권 권력의 침해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예외 상태의 정상화에 저항하는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도록 장려한다.
아감벤 사유의 정점은 3부 7장 "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에 있다.
(참고; 노모스NOMOS는 고대 그리스어로 법, 규칙, 관습을 뜻하며, 철학, 종교,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연(Physis)'과 대비되는 인위적이고 규범적인 질서를 의미함).
아감벤은 생명정치가 다양한 문명에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탐구한다. 건강, 민족성, 이민, 복지에 관한 규범이 어떻게 가치의 위계를 형성하여 누가 생명, 권리,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지 관찰하도록 한다.
그는 아우슈비츠, 난민캠프, 수용시설을 단지 역사적 비극이나 특수한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캠프는 현대 정치의 기본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수용소란 무엇인가? 수용소에서 그런 일들을 가능케 하였던 법적, 정치적 구조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수용소를 역사의 사실이자 이미 과거에 속하는(물론 여전히 재생될 가능성이 있지만)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정치적 공간의 숨겨진 모형이자 노모스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316쪽
캠프란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법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권력이 더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그곳에서 인간은 시민도, 죄수도, 보호대상도 아닌, 오직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로만 남는다.
외국인보호소나 이주노동자 합숙소, 난민 심사 대기 공간들을 떠올려보면 이 말이 단지 철학적 비유가 아니라 현실적인 설명임을 깨닫게 된다. 아감벤은 캠프가 예외적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경계의 장치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진짜 얼굴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는 새로운 수용소뿐만 아니라 국가 속으로의 생명의 기입에 관한 항상 새롭고 점점 더 착란적인 규범적 정의들을 예견해야 한다. 이제 국가 공동체 내부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수용소는 전 세계의 새로운 생명정치적 노모스이다. 331-332쪽
(아감벤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을 함께 읽어도 좋겠다.)
아감벤은 생명정치적 틀이 민주 사회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촉구한다. 국가 권력의 범위, 그것이 개인의 행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정치에 관심없어. 나는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어." 이런 생각으로 살고있는 독자들은 이 책을 손에 잡고 펼치는 순간부터 계속 작가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아감벤은 우리가 정치와 얽힌 삶의 실마리를 탐구함으로써 권력, 자유, 규제적 제약에 직면한 인간 삶의 본질적 가치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집단 통치와 개인의 자유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을 이해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 이는 <호모 사케르> 전체에 걸쳐 공명하는 주제다.
<호모 사케르>는 단순히 주권론을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더 깊은 지점에서,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누구를 공동체의 ‘안에’ 두고, 누구를 ‘밖에’ 두는가?
국가는 어떤 삶까지 인정하고, 어떤 삶은 포기하는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벌거벗은 생명’은 어디에서 등장하는가?
책의 후반부에서 아감벤은 흥미로운 결론을 내린다. 정치의 최종 목표는 특정한 집단에 더 많은 권력을 주는 것도, 더 촘촘한 법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과 법 사이의 경계 자체를 다시 그리는 것”이야말로 미래 정치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철저하게 분리된 영역, 세밀하게 관리되는 국경, 정치적·법적 정체성으로만 인정받는 인간 존재… 아감벤은 모든 구조적 장치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장 단순한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역시 여러 장면과 얼굴들이 스쳐 갔다. 낯선 땅에서 체류 자격을 기다리던 사람들, 언어가 통하지 않아 행정의 복도를 서성이던 기억, 한국 사회에서 ‘외부인’으로 규정된 사람들, 그 속에 내가 본 또 다른 나의 모습들.
<호모 사케르>는 바로 이런 경계의 순간을 바라보게 한다.
내가 누구를 타자로 만드는지, 내가 어떤 권력의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는지, 내가 어디까지를 ‘우리’라 부르고 어디부터를 ‘그들’이라 나누는지. 이 책은 읽는 이를 불편하게도 만들고, 조용히 흔들어놓기도 한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책이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가?
<호모 사케르>는 난민·무국적자·수용소·팬데믹 등 현대 문제의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
현대 사회가 어떻게 포용과 배제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지를 강조하며, 권리, 시민권, 인간 존엄성에 대한 논쟁에서 포용과 배제라는 개념이 지속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드러낸다.
난민이 인간의 권리를 가장 강하게 상징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못해 가장 법 밖에 있는 자가 된다는 역설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인다.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다. 권력과 법, 생명과 인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적 응시. 그 응시는 사유를 넘어,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조용히 바꾸어놓는다.
작가 조르조 아감벤에 관한 소개는 17화에 있다.
4부 역사성과 윤리
19화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마르크 샤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