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레비나스와 마르크 샤갈

얼굴과 빛, 타자를 향한 예술의 윤리

by morgen

4부 역사성과 윤리

19화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마르크 샤갈 - 얼굴과 빛, 타자를 향한 예술의 윤리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 ‘보는 자’의 자리를 잃는다. 그의 그림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부른다. 색채는 다가오고, 얼굴은 말을 걸며, 빛은 존재의 질서를 넘어 어디선가 스며든다. 낯선 감응 앞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유가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타자와 윤리의 철학자다. 레비나스에게 철학은 존재를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타자가 나에게 도착하는 순간을 사유하는 일이었다. 그의 철학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얼굴, 책임, 초월이다. 놀랍게도 샤갈의 회화 세계와 깊이 공명한다.

샤갈의 대표 작품 몇 점을 따라가며, 레비나스의 윤리 철학이 어떻게 회화 속에서 감각적으로 현현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얼굴 — 나를 깨우는 타자의 등장

레비나스 철학에서 ‘얼굴’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다. 얼굴은 나의 인식과 개념을 거부하며, 그 자체로 나에게 윤리적 요청을 던진다. 레비나스는 <윤리와 무한>에서 '얼굴은 나에게 나를 죽이지 말라고 말한다'고 했다. 윤리가 법이나 규범 이전에, 타자의 현존 앞에서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임을 말해준다.

네모 -전쟁 이야기들은 실제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게 어렵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95쪽

레비나스 -봄은 존재를 흡수하는 대표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얼굴과의 관계는 곧바로 윤리적인 것입니다. 얼굴은 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적어도 그 의미가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96쪽

레비나스 -얼굴과 대화는 묶여 있습니다. 얼굴은 말을 합니다. 얼굴은 말하는데, 모든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시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97쪽 <윤리와 무한-필립 네모와의 대화> 김동규 옮김. 2020. 도서출판100


샤갈의 <푸른 연인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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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ikiart.org/en/marc-chagall/blue-lovers-1914

마르크 샤갈 <푸른 연인들> 1914. 판지에 유채, 49 x 44 cm. 개인 콜렉션.


이 그림에서 얼굴은 현실의 색을 따르지 않는다. 푸른 얼굴은 감정 묘사라기보다, 이해될 수 없는 타자성의 색채에 가깝다. 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만,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거리감 속에서 우리는 소유할 수 없는 관계를 마주한다.

샤갈의 얼굴은 심리적 초상이 아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나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얼굴이다. 이 얼굴 앞에서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이미 관계 속에 들어온 주체가 된다.


여러 해에 걸쳐서 읽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책들.(언젠가 책 리뷰를 쓸지도...)


사랑 — 합일이 아닌 초월의 관계

<생일>에서 샤갈은 사랑을 그린다. 이 사랑은 안정된 지상에 머물지 않는다. 연인은 공중에 떠 있고, 몸은 현실에 닿아 있으나 관계는 이미 중력을 벗어난 듯 보인다. 레비나스에게 사랑은 ‘하나 됨’이 아니다. 그는 사랑을 타자의 무한성을 인정하는 관계로 이해했다.

레비나스 -타인의 근접성은, 타인이 나와 공간적으로 가깝다거나 부모처럼 가깝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한 -내가 그에게 책임이 있는 한-그가 나에게 본질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110쪽

저는 마치 타인과 근접해 있는 중에 -내가 타인에 대해 형성한 이미지를 넘어서- 타인의 얼굴이, 타인 안에 표현된 것이(그리고 이런 점에서 대체로 얼굴인 인간의 몸 전체가) 타인을 섬기도록 내게 명령하는 듯이, 사람-사이의 관계를 분석합니다. 111쪽. <윤리와 무한-필립 네모와의 대화> 김동규 옮김. 2020. 도서출판100


<생일>의 공중 부유는 바로 이 초월성을 시각화한다. 사랑하는 이는 결코 나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닿으려는 움직임이다. 샤갈은 이 불가능한 움직임을 ‘떠 있음’으로 그려낸다. 여기서 사랑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고, 바로 그 미완성 속에서 윤리적 긴장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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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9360

https://www.wikiart.org/en/marc-chagall/the-birthday-1915

마르크 샤갈 <생일> 1915. 판지에 유채, 80X99cm.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미국.


이 그림은 샤갈의 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그림 중 하나지만, 분위기는 단순한 행복에 머물지 않는다. 화면 속에서 남자는 공중으로 몸을 기울이며 연인에게 입맞춤을 한다. 여인은 땅 위에 서 있지만, 이미 중력을 벗어난 듯 보인다. 일상의 사랑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초월한 관계를 보여준다.

방 안은 소박하지만, 인물들은 현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사랑은 이곳에서 안정이나 소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떠오르는 움직임이다.

샤갈은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몸이 떠 있는 불안정한 순간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포착한다. 이 그림에서 공중 부유는 환상이 아니라, 타자에게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몸짓처럼 읽힌다.


시간 — 타자와 함께 열리는 기억의 구조

레비나스는 시간에 대해 독특한 사유를 남겼다. 시간은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시간은 고립되고 홀로 있는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의 관계 자체임을 보여주는 데 이 강의의 목적이 있습니다.33쪽.<시간과 타자> 강영안,강지하 옮김. 2024. 문예출판사.

샤갈의 <나와 마을>을 보면, 이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작품 <나와 마을>에서 과거와 현재, 인간과 동물, 기억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겹겹의 관계로 구성된다. 회상의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와 다시 만나는 시간,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시간이다.

샤갈에게 고향 비테프스크는 과거에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타자의 공간이다.

레비나스의 시간 개념은 여기서 살아난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통해 발생한다.


2004년 "색채의 마술사 샤갈" 전시회 도록. 서울 시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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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8984

https://en.wikipedia.org/wiki/I_and_the_Village#/media/File:Chagall_IandTheVillage.jpg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 캔버스에 유채, 191 x 150 cm. 뉴욕 현대미술, 뉴욕, 미국


샤갈의 <나와 마을>은 그의 회화 세계를 여는 대표작이다.
화면 중앙에는 사람과 동물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 응시는 대립이나 지배가 아니라, 관계의 시작처럼 보인다. 인간과 동물, 현재의 나와 기억 속의 고향이 한 화면 안에 겹쳐 있다.

그림에는 명확한 원근법이 없다. 집들은 뒤집히고, 크기는 뒤섞이며, 현실의 질서는 해체된다. 대신 기억과 감정이 화면을 조직한다. 고향 비테프스크는 실제 장소라기보다, 되돌아갈 수 없기에 더 선명해진 기억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샤갈은 이 작품에서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뿌리, 유대적 정체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논리 대신 상징과 색채로 풀어낸다. 그림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존재하며, ‘나’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의 얼굴 — 예술이 증언이 되는 순간

<하얀 십자가>에서 샤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리지만, 그림은 종교적 구원 서사로 읽히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싼 것은 유대인 박해의 장면들이다. 불타는 집, 도망치는 사람들, 뒤엉킨 역사적 폭력이 담겨있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미학적으로 소비하는 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나는 중립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하지 -않음 속에서 근접성은 결코 충분히 가깝지 않다. 이 무관심하지- 않음 가운데서는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가 지워지지 않으며, 주체의 격변화 불가능성도 지워지지 않는다. 299쪽.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다. 무관심하지-않음, 말함, 책임, 다가감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자인 나의 해방이다. 내가 출현하는 방식은 출두다. 나는 격변화할 수 없는 소환의 수동성 속에―대격으로―나를 위치시킨다. 이것이 자기다. 300쪽.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문성원 옮김. 2021.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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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rtic.edu/artworks/59426/white-crucifixion

마르크 샤갈 <하얀 십자가> 1938. 캔버스에 유채, 154.6 × 140 cm. 아트 인스티튜트 시카고, 시카고, 미국.


<하얀 십자가>는 샤갈의 작품 중 가장 어둡고, 동시에 가장 강력한 증언의 그림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인물은 예수이지만, 전통적인 기독교 구원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유대인의 기도 숄을 두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유대인 박해 장면들이 병치되어 있다.

불타는 회당, 도망치는 사람들, 파괴된 마을의 풍경은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던 반유대주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화면을 감싸는 흰빛은 위안의 빛이 아니라, 모든 폭력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차가운 빛이다.

샤갈은 이 작품에서 고통을 미학화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고, 외면하지도 않는다. 다만 고통받는 얼굴을 우리 앞에 놓는다. 이 그림은 종교화라기보다, 역사 앞에서 침묵하지 않으려는 예술의 윤리적 태도에 가깝다.

이때 예술은 위안이 아니라 증언이 된다. <하얀 십자가>의 빛은 구원의 빛이 아니다. 고통을 가리지 않는 빛, 책임을 요구하는 빛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윤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예술은 타자를 향해 열린 감응이다

샤갈의 회화는 세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를 타자의 얼굴 앞에 세운다. 레비나스의 철학 역시 개념의 완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철학을 응답의 시작점으로 되돌려놓는다. 빛은 존재를 장식하지 않고, 얼굴은 해석을 거부하며, 시간은 관계 속에서 열린다.

샤갈과 레비나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예술은 윤리의 다른 이름이다.
타자를 다시 보게 만드는 순간, 그 감응의 자리에서 윤리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

기억과 빛으로 타자를 그린 화가

마르크 샤갈은 어느 한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화가였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대인으로 자랐고, 파리에서 예술가가 되었으며, 망명과 귀환을 반복하며 평생 경계 위의 삶을 살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떠 있다. 사람이, 동물이, 집이, 마을이 공중에 부유한다. 중력은 느슨해지고, 시간은 뒤섞이며, 현실과 꿈의 경계는 흐려진다. 샤갈은 현실을 재현하지 않았다. 대신 기억이 어떻게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지를 그렸다. 비테프스크, 그의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잃어버렸기에 더 강렬해진 타자의 공간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종종 현실의 색을 벗어난 얼굴을 하고 있다. 푸른 얼굴, 붉은 몸, 초록빛 연인들. 색채는 감정 표현이 아니라 영성의 언어다. 샤갈에게 색은 설명이 아니라 감응이다. 큐비즘과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사조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샤갈의 회화는 형식의 실험이 아니라, 관계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 떠나온 고향, 박해받는 이웃, 성서 속 인물들. 샤갈은 이 모든 타자들을 하나의 화면 안에 불러들인다. 그들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존재하게 만든다. 샤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그 세계 안에 불려 들어간 존재가 된다.


샤갈과 유사한 작가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1840-1916)-형식이 아니라 감응의 계보

오딜롱 르동 <눈을 감은 여인> 1890. 캔버스에 유채, 44x36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프랑스,


오딜롱 르동의 〈눈을 감은 여인〉은 바깥 세계를 보지 않는 얼굴을 통해, 오히려 내면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여인은 눈을 감고 있다. 눈감음은 피로나 거부의 표현이 아니다. 현실을 잠시 유예한 상태, 다시 말해 외부 세계의 소음을 끄고 내부의 감각에 귀 기울이는 자세에 가깝다.

화면은 어둡고 단순하다. 구체적인 배경은 지워지고, 얼굴은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떠오른다. 얼굴은 개별적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state)처럼 보인다. 말해지지 않은 생각, 형체 없는 꿈,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감정들이 이 얼굴에 스며 있다.

르동은 이 작품에서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는 화가였다. 눈을 감은 얼굴은 바로 그 의지를 상징한다. 세상을 보기 위해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를 감각하기 위해 눈을 감는 것. 르동에게 예술은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 너머의 가능성을 불러내는 통로였다.

이 작품이 샤갈과 깊이 닿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샤갈의 인물들 역시 종종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중에 떠 있거나, 비현실적인 색을 띠거나, 꿈과 기억 속에 머문다. 두 화가 모두 ‘깨어 있으면서 꿈꾸는 상태’를 화폭에 옮긴다.

차이가 있다면, 르동의 세계는 침묵에 가깝고, 샤갈의 세계는 서사에 가깝다.
르동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내면의 이미지를 붙잡고, 샤갈은 기억과 사랑, 고향과 신앙이라는 이야기들을 색채로 풀어낸다. 둘 다 현실의 표면 아래에 있는 세계,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르동의 <눈을 감은 여인>은 샤갈의 회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샤갈의 인물들이 현실의 중력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르동이 보여주었듯이 현실을 그대로 보지 않는 용기가 예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시작된 철학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얼굴 앞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한 질문으로 수렴한다.
“나는 타자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서, 20세기 유럽의 가장 폭력적인 역사를 통과했다. 나치 수용소에서 포로로 지낸 경험, 가족을 홀로코스트로 잃은 상처는 그의 사유를 추상으로 두지 않았다. 그에게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묻는 사유였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론을 배웠지만, 곧 그 한계를 감지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철학은 너무 쉽게 타자를 침묵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감히 방향을 틀었다. 존재보다 먼저, 인식보다 먼저, 윤리가 먼저 와야 한다고.

그의 대표 개념인 ‘얼굴’은 시각적 대상이 아니다. “나를 해치지 말라”, “나에게 응답하라”는 침묵의 명령이다.
윤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규범 이전에, 계약 이전에, 말 이전에.

레비나스에게 인간은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타자에게 불려 나오는 존재다. 주체는 완결되지 않았고, 항상 흔들린다. 흔들림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이다. 그의 문장은 종종 어렵고, 때로는 고집스럽다.

사유의 중심에는 단순한 윤리적 직관이 놓여 있다.
“타자의 고통 앞에서 중립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체계라기보다 태도에 가깝다. 타자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타자 앞에서 멈추는 법을 가르치는 철학이다.



4부 역사성과 윤리

20화 테오도어 아도르노 -게르하르트 리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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