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물질의 색 - 흙
1부 자연과 물질의 색
1화 시에나 Sienna - 산화철이 만들어낸 시간의 색
색에는 이름이 붙기 전의 시간이 있다. 빛이 스펙트럼으로 분해되기 전, 화학식으로 환원되기 전, 그 색은 어디선가 채취된 물질이었다. 시에나(Sienna)는 그 사실을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색이다. 시에나는 물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땅에서 캐내어졌다.
그림 속의 시에나 - 색채보다 오래된 자연
르네상스 시기 화가이자 역사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시에나의 흙색을 가리켜 ‘테라 로사(terra rossa)', 붉은 흙이라 불렀다. 그것은 특정한 물감의 이름이라기보다 지중해의 땅 자체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석회암 위에 쌓인 토양이 오랜 시간 철 성분과 만나 산화되면서 만들어진 붉은 흙은, 비가 내려도 쉽게 씻겨 내려가지 않고 햇빛 아래에서 더욱 깊은 색을 드러낸다. 토스카나의 언덕과 올리브나무 사이, 돌담 아래에서 드러나는 이 색은 벽돌과 지붕의 색이기 이전에 땅의 본래 색이다. 시에나라는 색의 이름이 도시에서 왔다고 해도, 기원은 도시보다 훨씬 오래된 지질학적 시간 속에 있다. 인간은 그 흙을 캐어 물감으로 만들었을 뿐, 색 자체는 이미 땅속에서 완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 흙은 그림 속 색이 되기 전에 먼저 밭이 되었다. 물이 쉽게 빠지는 대신 햇빛을 오래 간직하는 성질 덕분에, 사람들은 땅에서 포도와 올리브를 길렀고 열매는 짙은 향과 맛을 품었다. 시에나의 붉은 빛은 결국 건조한 여름을 견디며 축적된 노동과 시간의 색이기도 하다.
14세기 시에나 화가 두치오(Duccio di Buoninsegna, 1255/1260년경-1318/1319년경)의 제단화 <마에스타>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금빛이 아니다. 금빛 아래에서 은근히 올라오는 따뜻한 갈색, 붉은 기운이 감도는 토양의 색이다. 시에나(Siena) 화파의 그림은 입체감보다 색의 울림으로 공간을 만든다. 피렌체화파가 인간의 몸을 연구했다면, 시에나화파는 빛과 영혼의 분위기를 탐구했다. 그 분위기를 가능하게 한 것은 특별한 안료가 아니라 특별한 흙이었다.
시에나(Siena) 지방에서 채취한 철 성분의 황토는 붉지도 노랗지도 않은, 마치 오래된 벽을 긁어낸 듯한 색을 만들어냈다. 색은 빛을 반사하기보다 흡수한다. 화려하게 빛나기보다 조용히 머문다. 시에나(Sienna) 색의 그림은 눈을 사로잡기보다 시간을 붙잡는다. 그 색은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온도에 가깝다.
두치오의 제단화에서 성인들의 의복, 배경의 바위 언덕, 인물의 피부 명암(언더페인팅)을 표현할 때 로우 시에나(Raw Sienna-황금빛 갈색)와 번트 시에나(Burnt Sienna-적갈색) 계열의 색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술사에서 두치오의 <마에스타>는 시에나의 흙으로 만든 물감으로, 시에나의 화가가, 시에나의 심장을 위해 그린 정체성 그 자체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두치오 디 부오닌세나 <마에스타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 마리아> 1308-1311. 나무판에 템페라, 214X412cm.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박물관, 시에나, 이태리.
'로우 시에나'와 '금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제단화 <마에스타>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의 작품으로, 금색 배경이 많이 쓰였다. 이때 로우 시에나(Raw Sienna) 특유의 황금빛 도는 갈색은 금박의 광택과 가장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성스러운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두치오 이후에도 이 흙의 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르네상스가 지나고 바로크와 네덜란드 회화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화가들은 여전히 시에나를 팔레트에 올렸다. 강렬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 화면(키아로스쿠로)에서도, 인물의 피부를 따뜻하게 감싸는 명암 속에서도 이 색은 조용히 스며들었다. 시대가 변해도 흙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거의 모든 작품에 토양 안료를 사용했다. 특히 초벌칠(Priming) 단계에서 시에나를 활용해 화면 전체에 깊고 따뜻한 기초 톤을 형성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같은 초상화에서 시에나를 섞어 자연스럽고 생기 있는 피부색을 표현했다.
왼쪽; 렘브란트 <자화상> 1659. 캔버스에 유채, 84.5X66Cm. 내셔널갤러리, 워싱턴DC, 미국
오른쪽; 페르메이르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경. 캔버스에 유채, 44.5X39Cm.
마우리츠하우스, 헤이그, 네덜란드.
시에나 색은 자연스러운 따뜻함과 기법적 유연성 덕분에 시대를 초월하여 화가들의 팔레트에서 빠질 수 없는 색상이 되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도시 시에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색 견본이다. 붉은 벽돌과 테라코타 지붕, 햇빛에 바랜 건물들, 먼지와 시간에 덮인 골목. 도시는 붉지도 갈색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 정확히 이름 붙일 수 없는 따뜻한 흙의 색이다. 특히 피아차 델 캄포 광장을 내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도자기처럼 보인다. 불에 구워진 흙이 수백 년 동안 식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같다.
시에나는 화려하지 않다. 결코 무채색도 아니다. 그 색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던 것들의 층이다. 햇빛 속에서는 금빛으로 부드럽게 번지고, 그늘 속에서는 깊은 갈색으로 가라앉는다. 마치 색이 아니라 시간의 농도처럼 보인다.
캄포 광장 (Piazza del Campo). 사진출처;시에나 공식 방문 싸이트 https://www.visitsiena.it/
도시 전체가 하나의 '시에나 색' 예술품처럼 보인다. 팔라초 푸블리코 (Palazzo Pubblico)와 만자 탑 (Torre del Mangia)은 시에나 시청사 건물로, 현지에서 채굴한 황토색 흙으로 만든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전형적인 번트 시에나(Burnt Sienna)의 따뜻하고 묵직한 적갈색 톤을 띠고 있으며, 일몰 때 햇빛을 받으면 강렬한 황금빛 갈색으로 빛난다.
특정 건물 하나라기보다 시에나의 캄포 광장을 둘러싼 붉은 벽돌 건축군 전체가 시에나 색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 글의 시작은 브런치의 트릴로그trilogue작가님 글에서 시작됐다. 글의 제목 배경 사진은 불타는 번트 시에나색을, 글중에 있는 사진은 안정된 로우 시에나색을 보여준다. 같은 사진에서 번트와 로우 시에나의 색감을 모두 볼 수 있다. https://brunch.co.kr/@hongblee1/65 )
히샴 마타르 <시에나에서의 한 달> 신해경 옮김. 2024. 열화당.
히샴 마타르(Hisham Matar, 1970- )는 시에나에서 보낸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간”이라고 썼다. 그는 광장이나 골목을 서둘러 돌아다니기보다 한 그림 앞에 오래 머물며, 빛이 조금씩 기울고 벽의 색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도시에서는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보다 이미 존재하던 것이 천천히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 시에나파 그림들은 기독교적 관례와 상징이라는 은둔 세계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 그림들이 기쁨을 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의 의향을 거스르다시피 하면서 계속 그 그림들을 보러 갔다. 잠깐 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그림들을 보면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그리고 해석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잔틴도 아니고 르네상스도 아닌 그 그림들은 오케스트라가 악기를 조율하는 휴식 시간처럼 악장과 악장 사이의 파격으로서 홀로 서 있었다. 13-14쪽.
카타피 정권의 눈 밖에 난 아버지가 리비아 비밀 경찰에 납치된 후, 아버지를 잃은 히샴 마타르는 그림을 바라보는 것으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고 있었다. 그는 시에나에 머물며 시에나의 건축물과 시에나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느리게 느리게 치유의 시간을 보냈다.
시에나의 낮의 밝은 황토빛은 저녁이 되면 깊은 적갈색으로 가라앉고, 그림 속 성인들의 얼굴과 돌벽의 표면은 같은 시간의 층을 공유하는 듯 보인다. 시에나의 색은 눈을 사로잡기보다 시선을 붙잡는다. 그래서 이 도시는 화려한 풍경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진다.
한국의 황토(黃土)는 '시에나(Sienna)' 색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로우 시에나(Raw Sienna)'색이 우리가 흔히 아는 황토색에 가장 가깝다. 로우 시에나는 가공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황토색이다. 노란색과 갈색이 섞인 전형적인 흙색이다. 반면에 번트 시에나 (Burnt Sienna)는 황토를 가열(소성)하여 수분을 제거했을 때 나타나는 붉은 갈색이다. 도자기나 벽돌을 구웠을 때 나오는 깊은 색감이 바로 번트 시에나 색이다.
황토와 시에나 모두 주성분이 산화철(Iron Oxide)과 점토, 모래가 섞인 천연 토성분 안료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에나 지역의 흙에서 유래한 시에나는 일반적인 황토보다 망간 함량이 약간 더 높다. 조금 더 어둡고 투명한 느낌이다.
유럽의 시에나가 도시의 벽에서 태어났다면 한국의 시에나는 자연과 가마에서 나타난다. 서양에서 ‘오커’나 ‘시에나’라 부르는 토양색은 한국에서 ‘황토색’이라고 불왔다. 이름은 달라도 근원은 같다. 철을 품은 흙이라는 사실이다.
천재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의 <경주의 산곡에서>를 보면 산이 붉다. 바닥의 흙도 붉은 색이다. 풀보다 먼저 존재했던 땅의 색, 햇빛에 말라 단단해진 토양의 색이다. 경주의 흙은 젖어 있지 않다. 건조하고 밝으며, 빛을 강하게 되돌려 보낸다. 그림의 풍경은 자연이라기보다 거대한 안료 덩어리처럼 보인다.
색은 화려하지 않지만 강렬하다. 꽃의 붉음이 아니라 대지의 붉음이기 때문이다. 시에나가 인간이 만든 도시의 색이라면 이인성이 그린 경주의 흙은 인간 이전부터 존재했던 색에 가깝다.
이인성 <경주의 산곡에서> 1934. 캔버스에 유채, 130X194.7cm. 리움미술관, 서울, 대한민국.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인성 예술의 백미이자 일제 강점기를 풍미했던 조선 향토색을 황토색으로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인성은 서구적 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의 향토색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붉은 땅의 색을 '한국적 시에나'로 해석하며, 이것이 민족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상징함을 서술한다. 굳이 경주의 붉은 흙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의 향토색'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흙이 르네상스 도시의 자부심이 되었듯, 이인성이 그린 붉은 땅 역시 그 시대 조선이 붙들고자 했던 어떤 근원의 색처럼 보인다.
분청사기 철화무늬 - 불 속에서 태어난 시에나
분청사기의 철화무늬는 색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철 성분 안료는 가마 속에서 산화되며 검붉은 갈색으로 변한다. 붓으로 그렸지만 결과는 불이 완성한다. 색은 칠해진 것이 아니라 구워진 것이다. 선은 또렷하지 않고 번지며, 표면에 스며들어 흙과 하나가 된다. 특히 철화 어문이나 초화문을 보면 그림이라기보다 흔적처럼 느껴진다. 마치 누군가가 잠시 손을 얹었다가 불 속에서 그 기억만 남겨 놓은 것처럼.
분청사기를 굽던 계룡산 인근 가마터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철을 품은 토양, 질 좋은 흙, 충분한 땔감과 물, 물길(금강)을 통한 유통까지 - 재료와 자연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색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땅이 허락한 것이었다.
왼쪽 -분청사기철화당초문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덕수6439
오른쪽 -분청사기 철화 당초문 편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동원457
분청사기 위에 철사(鐵砂) 안료로 그려진 자유분방한 무늬는 시에나색의 화학적 근원인 '철(Iron)'과 맞닿아 있다. 세련된 서양의 유채 물감에서 시작해, 가장 투박하고 솔직한 한국의 흙(도자기)으로 끝맺으며 색의 근원을 완성한다.
유럽의 시에나가 채굴된 흙이라면 분청의 철화는 다시 태어난 흙이다. 땅 → 불 → 색. 이 과정을 지나면서 색은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시간의 기록이 된다.
이인성의 작품과 분청사기 철화는 시에나색 중에서도 더 붉고 진한 '번트 시에나'의 느낌과 훨씬 닮아 있다.
흙이 색이 되는 순간
시에나는 특정한 나라의 색이 아니다. 철을 품은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성당의 벽이 되고, 어떤 곳에서는 햇빛에 마른 산이 되고, 또 다른 곳에서는 가마 속에서 검붉은 선으로 남는다.
시에나는 화려하지 않다. 가장 인간적인 색 중 하나다.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냄새와 온도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빛의 색이 아니라 살아온 것들의 색이다.
색 중에는 눈을 사로잡는 것이 있고 마음을 흔드는 것이 있다. 시에나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있다. 조용하지만 깊고, 따뜻하지만 쓸쓸하다. 아마도 그것이 흙이 가진 감정일 것이다.
흙의 색을 따라가다 보니, 우리는 땅의 시간 속으로 내려왔다. 철을 품은 토양이 도시가 되고, 그림이 되고, 불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색은 땅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어떤 색은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위로 열린다. 손에 묻는 흙의 감촉이 아니라, 눈을 멀리 데려가는 깊이로 다가온다. 다음 색은 흙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온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초월의 감각을 품은 색 — 블루(Blue)다.
1부 자연과 물질의 색
2화 블루 Blue - 하늘 바다 초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