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감정의 색 - 피, 열정, 권력
2부 인간과 감정의 색
5화 빨강 RED - 멈출 수 없는
사진 출처 오스트레일리아 abc뉴스. 2026.03.30
하늘이 붉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이 단순한 기상 현상이라는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호주 서부, 사이클론 나렐이 다가오기 직전의 하늘이 그렇게 물들어 있었다고 한다. 먼지와 수증기가 빛을 산란시키며 긴 파장의 붉은빛만 남긴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날의 하늘은 그렇게 차분히 이해되는 색이 아니었다. 마치 우리가 서 있는 세계가 잠시 다른 층으로 밀려난 것처럼, 익숙한 풍경 위에 전혀 다른 감각을 덧씌우고 있었다. 낮인데도 저녁 같고, 현실인데도 어딘가 비현실적인 그 빛 속에서, 사물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색이 세계를 덮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가 보고 있던 것은 사물이 아니라, 언제나 빛과 조건 속에서만 드러나던 하나의 상태였다는 것을. 그 붉은 하늘 아래서, 모든 것은 잠시 멈춘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색은 보통 눈으로 먼저 들어온다. 그러나 빨간 색은 다르다. 눈보다 먼저 몸에 닿는다. 우리는 빨강을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 피의 색, 열의 색, 이 색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심장이 뛰는 색이다. 빨강은 이해되기보다 반응된다. 설명되기보다 먼저 느껴진다. 다른 색들이 세계를 보여준다면, 빨강은 세계를 흔든다.
태초의 대지가 품은 적철석(iron oxide)의 묵직한 산화철에서 얻은 붉은 기운은 인류가 마주한 최초의 색이었다. 이후 식물의 뿌리나 꽃에서 추출한 식물성 염료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을 천에 물들인 빨강이 등장했다. 여기에 멕시코의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로부터 얻은 코치닐(cochineal)의 강렬하고 영롱한 진홍빛이 더해지면서, 붉은색은 광물의 견고함과 생물의 유기적인 에너지가 결합된 가장 뜨겁고도 고귀한 예술적 언어로 완성되었다.
빨강은 하나의 색이 아니다. 흙에서 시작되어, 생명을 지나, 불을 거쳐 만들어진 색이다. 언제나 살아 있고, 언제나 뜨겁다.
왼쪽 - 알타미라 동굴벽화 복제. 독일 박물관, 뮌헨, 독일
오른쪽 - 알타미라 동굴벽화, 마그달레니아 다색 들소. 산티야나 델 마르, 스페인
인류 최고(最古)의 예술 작품들로, 땅에서 채취한 산화철 광물을 이용해 수만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한 붉은빛을 유지하고 있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1665-1669. 캔버스에 유채, 121.5×166.5Cm.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16~17세기 유럽 화가들은 코치닐 특유의 투명하고 깊이 있는 붉은색을 사용하여 귀족의 옷감이나 화려한 드레스의 질감을 표현했다.
"렘브란트 그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붉은색 안료(Red lake pigments)는 코치닐인데, 이는 깍지벌레에서 추출하여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렘브란트가 사용했던 또 다른 붉은색 염료는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로 들여온 브라질우드였다. 암스테르담의 라스푸이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이 나무를 가루로 갈아야 했다. 그런 다음 이 가루를 물에 끓여 염료를 추출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렘브란트 설명 발췌.
렘브란트의 붉은 옷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색이 단순히 그려진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실제 옷은 코치닐로 물들였겠지만, 그가 캔버스 위에 남긴 붉음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물에 녹던 염료는 금속과 결합해 안료가 되고, 그 위에 또 다른 붉은 층이 덧입혀진다. 색은 천처럼 스며들지 않고, 빛처럼 떠오른다.
몸에 닿는 붉음과 눈에 닿는 붉음. 같은 색이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무엇이 더 진짜에 가까운지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된다.
아래 그림 영조 어진의 빨간 색도 역시 의상의 염료와 그림 안료는 다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 1900.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에서는 '꼭두서니(Madder)' 뿌리에서 추출한 염료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물들였다. 왕의 옷은 꼭두서니로 물들였지만, 그 옷을 입은 왕의 초상화(어진 御眞)의 붉은 색은 다른 물질에서 만들어졌다. 의복의 천 위에 스며든 색과 그림의 바탕이 된 비단 위에 얹힌 색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염료는 몸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안료는 시선 앞에서 또렷하게 머문다. 초상화의 붉음은 옷의 색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권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상태로 고정된다. 같은 빨강이지만 하나는 삶 속에 스며들고, 다른 하나는 역사 속에 남는다.
빨강은 오래전부터 권력과 금기의 색이었다. 왕의 망토, 성직자의 옷, 위험을 알리는 신호까지. 빨강은 경계를 그리는 색이다. 여기에는 가까이 가도 되는 것과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경계는 선으로 그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빨강 앞에서 본능적으로 멈추고, 동시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진다.
어떤 도시는 색을 가진다. 어떤 도시는 색이 된다.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들어서면 붉은 도시가 아니라 붉어지고 있는 도시라고 느끼게 된다. 벽은 이미 붉지만 해가 기울수록 더 깊어지고, 사람들이 오갈수록 색은 더 살아난다. 이곳의 빨강은 칠해진 것이 아니다. 태양과 시간, 인간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다시 만들어내는 색이다. 붉음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진행 중이다. 빨강은 완성된 색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마라케시의 사람들은 빨강 안에서 걷고, 말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삶을 이어간다.
마라케시의 거리를 걷다 보면, 대지에서 길어 올린 적철석의 붉은 점토가 도시 전체를 감싸 안은 듯한 경이로운 일체감을 마주하게 된다. 햇살의 각도에 따라 분홍빛에서 짙은 진홍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건축물들은 마치 거대한 색의 우주가 지상에 내려앉은 듯하다.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질감은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대지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뿜어낸다. 이 붉은 성곽 도시(The Red City)는 단순히 멈춰 있는 건물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 아래 끊임없이 고동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맥박이다.
높이 솟은 붉은색 메디나 성벽 사이에 서면 광물성 철분이 단순한 건축적 고려 사항 이상의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모로코 장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역의 점토와 사암을 강력한 상징물로 변모시켰다. 도시의 외관뿐 아니라 영혼과 문화적 정체성까지 규정지었다. 붉은색 건축 자재는 깊은 문화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베이징 자금성의 붉은 벽은 마라케시의 토속적인 붉은색과는 또 다른, 제국의 절대적인 권위와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는 '궁궐의 붉은빛(주색 朱色)'을 띠고 있다. 고궁박물관의 거대한 성벽을 가득 채운 짙고 선명한 빨강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넘는다. 황제의 존엄함이 온 천하에 뻗어 나가는 통로와도 같다. 끝없이 이어진 붉은 회랑을 걷다 보면, 그 압도적인 색채의 물결이 마치 시간을 멈춰 세운 채 장엄한 역사의 맥박을 전해주는 듯한 깊은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빨강은 압도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천연 안료의 시대를 지나 19세기 화학의 발전은 예술가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강렬한 '카드뮴 레드(Cadmium Red)'를 선사했다.
이전의 빨강들이 자연에서 빌려온 색이었다면, 카드뮴 레드는 인류가 과학으로 직접 창조한 빛에 가깝다. 모네(Claude Monet)나 고흐(Vincent van Gogh)같은 인상주의자들은 채도 높은 카드뮴 레드를 통해 태양 아래 타오르는 양귀비꽃과 붉은 포도밭의 생동감을 화폭에 옮겼다. 단순히 색의 변화를 넘어, 빛의 찰나를 포착하려는 인간의 근대적 열망이 투영된 결과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붉은 포도밭> 1888. 캔버스에 유채, 93 x 75 cm. 푸쉬킨 미술관, 모스크바, 러시아
고흐는 이 작품에서 태양 빛에 타오르는 포도밭의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붉은색보다 훨씬 선명하고 불투명한 카드뮴 레드를 과감하게 사용했다. 이 안료는 빛에 쉽게 바래지 않는 견고함을 지녀, 고흐가 갈망했던 '영원히 타오르는 빨강'을 가능하게 했다.
노란 태양과 카드뮴 레드의 포도밭, 카드뮴 레드의 강렬한 채도는 옆에 놓인 노란색과 부딪히며 화면 전체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부여한다. 고흐는 대지를 적시는 낙조의 빛을 재현하기 위해 화학의 선물인 카드뮴 레드를 선택했고, 그 결과 포도밭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뜨거운 생명력을 뿜어내는 붉은 심연으로 재탄생했다.
최근 MoMA(뉴욕 현대미술관)의 보존 과학 분석에 따르면, 마티스는 처음에 파랑, 분홍, 황토색으로 그려진 화면 위에 최종적으로 베네치안 레드를 덮어 씌우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앙리 마티스의 붉은 방을 바라보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방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곳에는 테이블, 창문, 의자, 액자들, 여러 사물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간을 이루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의 색으로 잠겨 있다. 마티스는 사물을 지운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질서를 해체했다. 원근은 사라지고, 깊이는 평면으로 접히며, 공간은 더 이상 물리적인 구조가 아니라 감정의 장이 된다.
이때 빨간 색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다. 세계를 덮어버리는 힘이며, 사물을 의미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이다. 우리는 그 방 안에서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색 안에 ‘들어가게’ 된다. 순간, 색은 대상이 아니라 환경이 된다.
앙리 마티스 <붉은 스튜디오> 1911. 캔버스에 유채, 181 × 219.1cm. 현대미술관, 뉴욕, 미국
마티스의 빨강은 세계 위에 놓인 색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방식이다. 더 이상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공간이 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마티스가 만든 세계다. 그의 빨강은 폭발하지 않는다. 지속된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숨 쉴 수 있는 공기처럼 조용히, 그러나 완전히 우리를 둘러싼다.
방안의 빨강은 격렬함이 아니라 침투다. 우리는 왜 이 색을 완전히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할까. 아마도 빨강은 우리가 숨기고 싶은 것과 가장 가까운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몸, 욕망, 상처, 분노. 드러나면 안 된다고 배워온 것들이 빨간 색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빨강은 감출 수 없다. 덮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 삘긴 색은 아름다움과 동시에 불편함을 가진다. 우리는 빨강을 좋아하면서도 끝내 그것 속에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붉은 산수화는 군대 생활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을 쓰고 풍경을 바라보면 온통 붉은색이었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파란 색 안경을 썼다면 그의 그림은 온통 파란색이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가정처럼 보이지만, 그의 그림 앞에서는 쉽게 답할 수 없다. 색은 도구일 뿐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세현의 붉은 산수에서 빨강은 선택된 색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보게 된 경험이다.
그가 바라본 풍경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기억은 단순한 시각적 인상이 아니라 몸에 각인된 감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의 산수는 채색된 풍경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 풍경이다.
이세현 <붉은 산수> 개인전 <Penetration(관통)> 2024.02.03 - 2024.03.27. 서울 성수동 갤러리구조.
이세현의 '붉은 산수(Between Red)' 붉은 안료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동시에, 분단 국가의 군사 초소와 개발로 파괴된 자연이라는 아픈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빨강은 단순한 색채를 넘어 금기와 공포,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에 서린 역사적 상흔을 시각화한 강렬한 매개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붉음은 단순히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이지만은 않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한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풍경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색이 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익숙함 속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산은 여전히 산이고,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감각이 달라진다. 우리는 그제야 묻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풍경은 과연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었을까. 아니면 익숙함이 덧씌운 색 안에서 편안하게 길들여진 시선이었을까.
이세현의 빨간 색은 어떤 색이라기보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시선을 흔드는 방식에 가깝다. 그의 산수는
자연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다시 보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그 장치가 작동하는 순간, 익숙했던 풍경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같은 구리인데 왜 어떤 것은 푸르고, 어떤 것은 붉게 변할까. 우리가 도시에서 보는 구리는 시간이 지나면 청록색으로 변한다. 돔 지붕이나 거리의 동상에서 보이는 청록색은 구리가 공기와 물, 산소가 만나 만들어낸 결과다.
도자기의 가마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다. 불이 타오르는 가마 안에서 산소가 충분하면 구리는 탁한 색으로 변하지만,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붉은 색을 드러낸다. 같은 물질이지만 어떤 환경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이 되는 것이다.
도자기의 빨강은 단순한 색이 아니다. 흙과 불, 보이지 않는 공기의 균형 속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 색이다.우리는 그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잠시 허락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왼쪽 -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 고려, 13세기. 점토(粘土), 높이 32.5cm. 국보. 리움미술관, 한국
오른쪽 - 꽃병. 중국 강희시대(1662–1722). 소피색 유약을 바른 도자기. 높이 45.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미국
중국 랑야오홍(郞窯紅, Langyao Red) 도자기는 전체를 유약으로 붉게 덮었다. 깊고 농밀한 빨강으로 불이 지배한 색이다. 조선의 동채무늬(진사 辰砂) 도자기의 빨간 무늬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고려시대에는 포도알이나 모란꽃잎 등 주요 부분에만 사용하다가 조선시대 백자에서는 빨간 색이 더 넓은 부위를 차지했다.
불을 통과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빨간 도자기는 가장 얻기 어려운 색이다. 구리는 불 속에서 쉽게 변하고, 조금만 조건이 달라도 붉음은 사라져버린다. 완전히 붉은 도자기는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불과의 협상이며, 우연과의 타협이다.
완성된 도자기는 한 번 태어나면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마 속에서 녹아든 유약은 유리처럼 굳어 색을 안쪽에 가둔다. 더 이상 공기와 반응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늙지도 않는다. 도시의 구리 지붕이 푸르게 변해가는 것과는 달리, 도자기의 빨간 색은 불 속에서 결정된 순간을 오래 붙잡고 있는 색이다. 변화가 멈춘 자리에서 남은 색이다.
융릉 홍살문, 귀신불침부적, 복주머니(두루주머니), 동지팥죽
동양에서 빨간 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마주할 때 사용하는 힘이었다. 사람들은 빨간 색으로 귀신을 쫓았고, 같은 색으로 복을 불러들였다.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의미처럼 보이지만 뿌리는 하나다. 강한 것은 약한 것을 밀어내고, 남은 자리에 새로운 기운을 들인다. 빨강은 언제나 경계에 놓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이 색은 문이 된다.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모든 문화에서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서양의 회화에서 빨간 색은 주로 감정의 극점에서 나타난다. 마티스의 붉은 방에서 보았듯이, 빨강은 사물을 지우고 감정이 공간이 되도록 만든다. 우리는 무엇을 본다기보다 무엇인가에 잠기게 된다. 색은 대상이 아니라 상태가 된다. 반면 동양에서 빨강은 감정이 아니라 힘으로 이해된다.
동양에서 빨강은 세계를 나누는 문이다. 하나는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를 바깥으로 밀어낸다. 두 방향은 결국 같은 움직임이다.
빨강은 가장 단순한 색처럼 보이지만 가장 모순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사랑의 색이면서, 동시에 분노의 색이다. 장미와 피는 같은 색을 가지고 있고, 입맞춤과 상처는 같은 색으로 남는다. 왜 같은 색이 가장 따뜻한 감정과 가장 파괴적인 감정을 동시에 담고 있을까. 아마도 감정이 가장 농밀해졌을 때 나타나는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이 옅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감정이 극에 이르면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그때 남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색이다. 그리고 그 색은, 대개 빨강이다. 수줍어서 볼이 빨개지거나, 화를 못이겨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지거나, 언어보다 색이 먼저 앞선다.
빨강은 언제나 시작의 색이다. 태어나는 순간의 색, 처음 피어나는 꽃의 색, 그리고 무언가가 바뀌기 직전의 색. 이 색은 끝이 아니라 넘어가기 직전의 순간이다. 조용히 지속되는 색이 아니라 무언가를 밀어붙이는 색. 그래서 빨강은 멈춰 있는 색이 아니라 항상 앞으로 가는 색이다. 우리는 그 색을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그 색을 통해 다음으로 나아간다.
어느 순간 우리는 붉음을 지나 빛 속에 서게 된다. 모든 것이 더 이상 숨겨지지 않는 자리, 드러나는 색의 영역으로. 그곳에서 만나는 색이 yellow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