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의 그림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입니다.
Klimt, Gustav - Death and Life
죽음, 삶, 일생을 살면서 이 두 단어를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바로 옆에 있는 단어요, 다시 생각해 보면 아직은 나와 먼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닌 말, 삶과 죽음!
십대 후반에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에 빠져들고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고, 푸쉬킨의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 로 시작하는 <삶>이라는 시를 시시때때로 읊고, 책상 앞엔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이런 말을 써 붙이는 시절에는 죽음의 동경과 삶의 극복에 시달리며 열병을 앓는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매혹이고, 삶은 아직 그 진미를 알 수 없는 씀바귀 나물 맛이다. 아, 참, 이건 1960년대 내 젊은 날의 상황이었고, 요즘 고등학생들도 쇼펜하우어나 키에르케고르에 심취하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처럼 죽음에 대한 동경도 강렬한 것이 우리네 인생아닌가!
Klimt, Gustav -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위의 그림에서 옆에 버티고 서있는 해골의 모습은 영락없는 저승사자의 모습이다. 누구를 데리러 온 것일까? 한 덩어리로 똘똘 뭉친 이 가족들은 저승사자가 그들 옆에 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잠 속에 빠져있는 것인가.
저승사자가 힘껏 끌어당겨도 이들은 누구 하나도 내어주지 않을 기세로 똘똘 뭉쳐있다.
이부자리도 귀하던 시절, 색색의 조각이불 하나에 온 가족이 몸을 들이밀며 밀착되어 지내던 내 어린시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서로 이불을 내쪽으로 끌어당기기는 했어도 곁에 붙어있는 사람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클림트 특유의 모자이크 기법으로 채색된 이 그림, 한 덩어리로 뭉친 사람들을 보면서 갑자기 우리의 옛 모습이 생각났다.
죽음은 언제나 클림트의 주 테마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다는 절망 대신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주는 죽음이다. 어린 아이를 등장시키므로 우리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마치 잠을 자며 꿈을 꾸는 듯한 평화로움을 보여준다.
클림트가 친하게 지내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도 그의 음악에서 죽음은 잠시 나들이 간 것으로 표현한다.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죽은 자식을 그리는 노래>에서 말러는 “그 아이는 잠시 밖에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그림은 로마 국제전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1911년에 그렸으나 5년 후 다시 수정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하는 골드 배경 대신 다크 불루 배경을 쓴 것이 특별하다. 어떤 사람은 마티스를 모방한 거라하고 어떤 사람은 다만 풀죽은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그림은 골드를 사용하지 않은 클림트의 골든 작품이다.
수베르트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의 연주를 들으며, 그 곡의 가사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를 읽으며 클림트의 <죽음과 삶>을 감상하면 죽음이 부드럽게 잠을 재워주는 친구로 느껴진다. 젊은 날 한때 곁눈질을 했던 쇼펜하우어의 염세철학이 다시 떠오른다.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시에서 속삭인다.
소녀의 간절한 소망, "나는 아직 어려요. 그냥 지나가 주세요."
사자의 달콤한 대답, "나는 친구란다. 괴롭히려 온 것이 아니야. 내 팔 안에서 꿈결같이 편히 잠들 수 있단다."
그러나, 그러나 클림트의 그림에서 주시해야할 부분이 있다. 울근불근한 사내의 근육, 확대된 혈관에 뜨거운 피가 콸콸 소리를 내며 돌고있을 것 같은 그의 근육이 그림에서 어색할 정도로 튀어나지 않는가? <삶>이다! 죽음과 삶은 공존한다.
그림에도 삶과 죽음은 나란히 한 틀 안에 있고, 우리네 인생에도 삶과 죽음은 한 울타리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