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gen Jul 23. 2020

호모 루덴스의 봄 이야기

( 지나간 봄 이야기)


봄이다.

나의 일과는 밤12시부터 1시쯤까지 나물 다듬기를 끝으로 마감된다. 그제는 머위, 어제는 취, 오늘은 씀바귀… 달그락거리고 물소리가 나는 일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할 수 없지만 식탁에 앉아서 채소를 다듬거나 마늘을 까는  일이야 어느 시간이든 상관없어서  좋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야기로 어머니는 내일 하지 뭐하러 이 밤중에 야단이냐고 하셨지만 이렇게 밤에 해두면 내일이 편해서 좋다. 그리고 시계를 보면 이미 자정을 넘겨 내일에 와있으니 내일 하고 있는 것이다.(좀 이상한 문장인가?)


식당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많은 시간동안 부엌일에 매어있다. 식구들에게 수시로 구박을 받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들기름 발라서 김을 굽고, 도라지와 더덕은 뿌리째 사다가 껍질 벗기고, 연례행사로 절기에 따라서 저장식품을 만든다. 그런데 이 저장식품의 재료들을 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직접 캐고 따고 뜯고 그렇게 구한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농사는 사돈이 힘들여서 짓고 나는 얌체같이 다 된 것 따다 먹기만하는 셈이다.

밭에서 이런저런 먹거리를 가져오면 일이 산더미다.

제철에 향기롭게 먹고, 데치거나 말려서 냉동고에 저장해두어 다음 해까지 일년을 먹으니 이 일이 내겐 중요한 연례행사인 것이다.


평택 사돈네(큰며느리 친정댁) 덕에 공짜로 밭에서 거둬와 저장해 둔 것들.

쑥, 머위, 냉이 - 데쳐서냉동함. 마늘쫑 -고추장에 푹 파묻음. 마늘, 고추 – 초간장에 절임. 깻잎 -소금물에 절임.  무우–진한 소금물에 짠지담금, 썰어서 무말랭이, 살짝절였다 끄들끄들 말려서 고추장에 장아찌 박음. 무청 – 시레기.


공주 사돈네서(딸 시댁) 보내주셔서 저장해둔 것들,

인삼, 꿀 – 꿀에 인삼을 재어둠. 꿀이 넉넉한 덕분에 여러가지 차를 만들었다.  냉동실에 보관했던 대추에 생강 사다가 함께 꿀에 재어두었다. 생강껍질 벗기고 곱게 채썰며 손끝이 맵게 느껴질 때마다 대추를 준 K에게 사랑의 화살을 마구 날리다보니 생강의 매운 맛이 달콤하게 변했다.


입춘은 겨울속에 있는데 그래도 나는 입춘이 지나면 나물 캐러 갈 날을 기다린다. 따뜻한 봄 햇살을 등에 받으며 흙냄새를 맡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가. 흙에서 에너지를 공급받는 기분이다. 한가롭게 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자연에게, 사물에게, 생물에게, 무생물에게 말걸기 놀이 말이다. 난 수다쟁이인가. 왜 이렇게 말걸기 놀이를 좋아하고 즐기는 걸까. 손주들과도 늘 말걸기 놀이를 해서 아이들도 말을 잘 한다. 화분한테 말하고, 책한테 말하고, 스케치북에 말하고, 레고블록에게 말하고, 인형이야 말할 것도 없이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고(이 문장도 참 이상하네. "말할 것도 없이"라면서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야?), 인형에게는 일방적인 말이 아니라 대화를 한다. 물론 손녀가 일인이역으로 하는 말이다. 무생물을 의인화하여 대상으로 말을 하니 자연히 무생물까지도 귀히 여기는 것 같다.


내가 밭에서 말하면서 노는 모습은 이렇다.

독일에서 온 쌍둥이 칼과 평택에 살고있는 쑥이 만났구나. 너희들은 이렇게 만나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겠지? 이 칼을 만든 사람은 이 칼이 무슨 일에 쓰일거라고 생각하며 만들었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 했겠지만 그래도 여기 평택에 있는 쑥하고 얘가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거야. 아무 생각도 없이 만든걸까? 그렇다면 나는 이 칼을 쓰고싶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도없이 만든 칼을 쓰나.

그런데 얘 쌍둥이 칼아, 넌 기분이 어때? 쑥을 뜯는 일이 만족하니? 어쩜 불만일지도 모르겠다. 넌 아주 유명하잖아, 그러니 좀 더 강하고 대단한 것을 자르는 일이 어울린다고 생각하겠지. 이 연약한 순을 자르는 일 보다는 말이야. 아, 연약한 단계는 좀 지났다. 연약할 때는 네가 필요없거든. 그냥 내 손으로 다 뜯을 수 있어.

이번엔 쑥, 너, 얘 쑥아! 겨우 봄볕에 몸을 내밀었는데 이렇게 잘라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런데말이야, 너는 이 밭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지내는 것이 좋으니, 아니면 사람들에게 뜯겨서 먹히는 것이 좋으니? 누가 뜯어가지도 않고 본체만체 내버려두면 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아닐까? 널 예쁘다고 뜯어가고 맛있게 먹어주면 너는 오히려 더 행복해할지도 몰라.

내친구들 중에는 말이야 자기에게 어려운 일을 시킨다고 화를 내는 친구도 있고, 쉬운 일만 시킨다고 화내는친구도 있거든. 너는 어때? 너는 어떤 쑥이야? 사람들이 너를 뜯어간다고 화를 내는 쑥이니, 아니면 사람들이 잘 뜯어간다고 기분좋아하는 쑥이니…….


이렇게 나의 놀이는 참 여러 종류이다. 가끔 어떤 사람들이 내게 일 좋아해서 안해도 될 일거리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참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신나는 놀이가 참 많다. 나는 늘 즐겁게 논다.

제철 저장음식을 만드는 일도 나의 재미중에 하나인데 이번엔 딸기잼을 못 만들었다.

해마다 딸기잼을 끓여서 다음 해 만들 때까지 일년을 두고 먹어왔는데 올해엔 잼을 만들지 못했다. 외출을 삼가고 다음주 다음주로 미루다가 딸기철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포도값이 좀 내려가면 포도잼을 만들어야겠다.

매실 오미자 돌배 유자청도 때를 놓치지 않고 만든다. 청이나 잼에 들어가는 설탕의 분량을 눈앞에 두고보면 무서워서 기절할 노릇이다. 그렇지만 나는 장사들의 고도의 마케팅 전략에 쉽게 무릎꿇는 사람이라 당흡수가 적다고 광고하는 것, 유기농이라고 광고하는 것을 준비하고 안심해버린다. 마치 최면에 걸린듯 설탕이 무섭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과학적인 증명을 하는 것보다는 광고문구를 이해하는 일이 훨씬 쉬우니까 쉬운 길을 택한다.


이제 쑥을 뜯을 때 사용한 쌍둥이 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맺어야겠다.

미안하다 칼아. 너는 콜라비를 자를 때 쓰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내가 겨우 쑥을 뜯었구나. 네가 좀 속상했을 것 같아. 이해한다. 왜냐면, 나도 누가 나에게 어려운 일을 시키지않고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면 속으로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거든. 나를 뭘로 보고...?

미안해. 이제 너는 아침마다 콜라비를 자르는 일에 열심히 사용할게.


-끝



작가의 이전글 아들의 결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