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의 그림감상, 감상鑑賞이 아닌 감상感想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세로 28cm, 가로 23.9cm, 보물 527 호
그림을 보고있을 때의 나는 참 행복하다. 나는 그림을 보고있으면 참 행복하다.
이 봄 내내 인상파 화가들이 펼치는 색채의 마술에 홀려있던 나는 오래된 책 유홍준님의 "화인열전" 두 권을 다시 읽었다.
"화인열전2"의 반쯤은 거의 단원 김홍도 탐구에 할애했다.
나는 특히 단원의 "속화첩" 중에 있는 그림들에 사로잡혔다. 그림은 물론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것이지만, 나는 그의 그림에서 동영상의 움직임을 보았다. 방금 지나간 앞장면의 잔영과, 금방 이어질 뒷 장면의 예감으로 등장인물들의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까지 들려왔다. 까르르르 자지러지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빨래터>를 보라. 졸졸 물흐르는 소리, 큰 빨래를 물살에 맡기고 철벅철벅 흔들어대는 소리, 여인네들의 재잘거림, 이런 것들이 수선스럽게 들려오지 않는가.
또한 그네들의 표정은 어떠한가?
"뒤에서 훔쳐보는 양반의 모습으로 더욱 여인네의 속살이 신비롭고" 유홍준님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에서 일하는데 속살이 드러남은 당연하다. 이런 모습을 훔쳐보는 선비의 모습이 해학적이다. 그 시대엔 지금처럼 여인네들의 속살을 훔쳐볼 기회가 흔치 않았었겠지. 그래도 체면은 지키고싶은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런데, 엿보는 한량을 그려넣어 그림에 춘의(春意)를 담고있는 것은 내가 알고있던 단원의 풍속화로선 뜻밖이다. 신윤복이라면 모를까, 단원의 그림에도 춘의가 담겨있다니.
서양 인상파 작품처럼 물감을 덕지덕지 쳐바르지 않은 이 그림의 간략한 필선과 담박한 채색이, 어디에 살든 동양인의 정서를 버릴 수 없는 나에게 조용한 떨림으로 다가온다. 아주 편안한 느낌이다.
단원이 30대 중반에 이 속화첩의 그림들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니 1770년대 후반이 될 것이다 이보다 한 10여년 앞선 서양의 한 작품을 곁들여 본다.
Jean-Baptiste Greuze - Laundress,
40.6 x 31.7 cm, J. Paul Getty Museum
1761년 파리의 쌀롱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어린 세탁부에게서 받는 인상과 우리 빨래터의 아낙네들에게서 받는 인상은 사뭇 다르다. 모델도 다르고 화가도, 화풍도 모두 다르다. 그림의 무대와 화가의 환경도 다르다. 그러니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들끼리 한 자리에 올려놓은 격이 된다.
<세탁부> 즉 인물에 중심을 둔 이 그림에 비해, 단원의 그림은 <빨래터>라는 장소에 중심을 두었다. 장소는 그 속에 사물이나 인물을 담고있어 대서사시의 긴 이야기가 있고, 우리는 그 장소에서 오갔을 만한 화제를 쉽게 떠올릴 수도 있다. 내게 <빨래터>는 마치 소설과도 같은 그림이다.
주제가 인물인 그뢰즈의 그림에서는 장소는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나는 어린 세탁부의 표정에 시선을 뺏긴다.
화폭에는 그림자조차 없지만, 이 세탁부의 눈빛을 보면, 누군가 화폭 밖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비처럼 부채로 안면을 가린 선비는 아니겠지. 큰 바위 뒤에 숨어서 엿보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마주서서 눈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빨래"라는 주제가 그리 즐겁고 행복한 주제는 아닌데, 이 소녀가 얼굴에 매력적인 표정을 담고있는 것으로보아 아마도 반가운 , 소녀의 호감을 살만한 사람이 서 있을 것같다.
이 두 그림들은 모두 남자 화가들이 그렸는데, <빨래터>의 모습도 즐거워 보이고, <세탁부>의 모습도 밝아보이니, 빨래를 힘들어 하는 것은 오직 주부들만의 일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