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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gen Aug 06. 2020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Solveig's Song by Grieg,Edvard (1843-1907)

온 집안에 그윽하게 퍼지는 부드러운 커피향과, 책 읽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잔잔한 음악을 즐기며 책을 읽는 순간은 ‘참 행복하다’는 걸 실감한다.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희곡 <페르귄트>를 읽기 위해 책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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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는 노르웨이 출신의 그리그가 작곡한 <페르귄트 음악의 관현악 모음곡 제 2 >중에 있는 아름다운 곡이다. 단조 음악들이 모두 우리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애잔함이 있듯이 솔베이지의 노래도 가슴밑바닥까지 촉촉히 적셔준다. 때로는 음악이 지닌 물기가 런던의 안개보다 더 습하다.
A단조로 시작되는 바이올린 연주곡. 솔베이지의 노래는 피아노용의 편곡(작품번호 52)도 있지만, 나는 현악기의 단조음을 더 좋아한다.
그리그는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출생하여 독일 라이프찌히 음악원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때 슈만과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몇 가지의 고유명사들 - 노르웨이, 베르겐, 라이프찌히, 슈만, 이런 이름들이 내게 친근감을 준다.
노르웨이라면 뭉크의 그림이 있는 오슬로가 떠오르고, 베르겐에선 싱싱한 살아있는 연어를 볼 수 있었고, 통독 이후의 어설프게 발전해가는 도시의 라이프찌히도 인상깊었던 곳이다. 그리그가 영향을 받았다는 슈만, 그의 아내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였는데, 유로화폐를 쓰기 이전의독일 화폐 100마르크 짜리에 초상이 그려져있다.
몸으로 접했던, 낯설지 않은 이러한 것들 때문에 나는 그리그의 노래에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 여름, 큰 아들이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놓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노르웨이 여행을 했었다. 보름동안의 자동차 여행이었는데, 가족끼리 그렇게 오랜 시간을 꼭 달라붙어 지낸 시간은 그동안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기회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속을 달리는 차 안에서 열띤 기분으로 깔깔대며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좁은 자리에 짜증이 나서 투덜거리며 티격태격하기도 했던, 그러나 이만큼 지나고보니 그저 그립기만 한 순간들이 솔베이지의 노래에 실려 환영처럼 떠오른다. 그 때 느꼈던 노르웨이의 분위기가 그리그의 음악과 어우러지면서 눈앞엔 그것이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노르웨이라면 입센(Ibsen,Henrik 1828-1906)의 <인형의 집>도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중의 하나이다. 지금은 중년을 훨씬 넘은 우리 친구들은 <인형의 집>에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얼마전에 읽은 그의 희곡 <페르귄트(Peer Gynt)>도 내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책이다.

몰락한 지주의 아들 페르는 집안을 재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나친 공상에만 빠진다. 애인 솔베이지를 버리고 돈과 권력을 찾아 세계여행을 떠난다. 산속 마왕에게 혼을 팔기로 하고.
아프리카에서 노예상을 하여 큰돈을 벌고 추장의 딸 아니트라를 만난 페르는 나중에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정신이상자로 몰린다. 마지막으로 귀국길에 오른 배가 난파하여 무일푼이 된채 고향 땅을 밟는 페르. 거기서 늙은 마왕으로부터 빚독촉을 받는데 최후까지 혼을 팔아 넘기지 않고 살아난 후, 백발이 된 솔베이지의 팔에 안겨 죽음을 맞이한다.
페르가 백발의 솔베이지 품에 안기는 마지막 장면은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황폐한 인간을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페르귄트처럼 음악까지 맞춰서 들으며 읽는 희곡은 마치 공연장에서 관람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내가 자주 듣는 <솔베이지의노래>는 제2조곡의 제4곡, <아니트라의 춤>은제1조곡의 제3곡이다.
해당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읽으면 눈앞엔 오페라의 무대가 펼쳐진다. 희곡 읽기에 재미를 붙이면, 앉은 자리에서 종합예술을 스스로 실현하게되고, 나는 금방내 돌팔이 예술가로 변한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러다가 뚝딱뚝딱 무대를 설치하고, 무대의상을 갖춰입고, 공연을 하고… 감독이 되어 무대를 휘젓고 다니기도 하고, 배우역할도 몇 가지를 도맡아 한다. 연극이어도 좋고 오페라여도 좋다. 솔베이지가되어도 좋고, 아니트라가 되어도, 페르귄트가 되어도 좋다. 늙은 마왕이면 또 어떠랴.

예술이란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향유하는 자의 것이다. 즐기는 자의 것이다.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그저 늘 허공에 붕붕 떴다 지층을 뚫고 가라앉았다 해가면서 가슴으로 몸으로 느끼는 예술 감상을 한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나를 노르웨이로 싣고 간다. 거기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는 입센이나 그리그와는 또 다르게 <노르웨이의숲>을 그린 비틀즈도 만나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만난다.
노래에 몸을 싣고.


<행복해지는 약> 수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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