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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에드만 May 06. 2018

<폴란드7> 아우슈비츠, 카메라도 죄 같았다

이제 막 퇴사한 前 신문기자의 폴란드 여행기 7.

아우슈비츠 방문을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잡을 걸 그랬다.     


오늘 방문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기억이 이유없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현장에서 느낀 감정은 더 강력했고, 여진은 잦고 깊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릴없이 발끝으로 땅을 짓이기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다가, 숙소로 돌아오곤 한다. 계획했던 크라쿠프 일정도 모두 취소했다. 무엇인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폴란드 크라쿠프 인근 독일명 아우슈비츠에 마련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수용소 막사들이 줄지어있는 모습을 본 순간,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애도할 준비도 못한 내가 카메라를 들고 이곳을 찍는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죄를 짓진 않았지만, 나 역시 책임의 긴 사슬에서 자유롭진 않다고 생각했다. 한 장의 사진도 찍지 못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이 수용소에서만 1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살, 가스, 질병, 구타, 굶주림, 실험. 

들풀이 다시 돋은 이곳에서, 10만여명이 소각됐다.

생명이 주어고 동사가 소각이라니, 가당키나 한 문장인가.     


책으로는 읽은 적 있다.     


철학자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며 탄식했고, 

아우슈비츠 생존자 파울 첼란은 그보다 더 급진적으로 ‘아우슈비츠 이후 대체 말이라는 게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가슴이 뭉클했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그런데 수용소 여성들의 머리카락를 잘라 만든 모직 2톤을 보고서 다 무너져버렸다. 대체 말이라는 게 가능한가. 잔해만 남은 소각장 앞에서 흐르던 유대인 학생들의 구슬픈 추모가가 여전히 귓가를 맴돈다.     


무심코 써왔던 관용구 ‘출구가 없다’라는 표현이 두려워졌다. 소각장엔 실제로 출구가 설계되지 않았다. 들어서면 재가 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재가 지금도 아우슈비츠 인근 대지에 스며들어 산화하고 있다고 한다. 대기를 떠돌고 있다고 한다.      


방문한 날, 날씨는 야속하게도 화창했다. 공기도 깨끗했다. 들이마쉰 숨 속에 재가 포함돼 있을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아연해졌다. 부글부글 들끓다가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역사가 자연과 함께 인류에 보내는 이 짓궂은 농담에 웃음으로 화답하긴 힘들 것이다. 시간은 극심한 슬픔도 부식시킨다고 하지만, 적어도 유대인들에겐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우슈비츠 자료를 폴란드에 많이 들고 왔다. 이를 참고해서 여기서 본 것과 생각한 것을 엮어 긴 기행문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쓸 수가 없다. 그럴 능력이 안 된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짧은 감상만 남겨놓는다.     


*사진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박물관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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