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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dos Paul Mar 15. 2024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인간 실격」

봉사와 복종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몰염치와 부끄럼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인간 실격」의 주인공 '오바 요조'는 자신이 도저히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내내 그 인간의 삶이란 것을 영위하기 위해 처절하게 익살을 떤다. 요조 자신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이라는 자격에서 실격된 존재로 칭한다. 그리고 「인간 실격」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실은 세상의 모든 개인도 그러하다는 것이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스럽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 실격」92, 96p.


    즉 세상이란 다름 아닌 '개인'이다. 서로를 속고 속이는 개인 간의 투쟁이 세상을 이룬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모든 이가 익살꾼이라는 암시를 작품 속에 새겨 넣은 듯하다. 모든 인간은 서로를 속이고 또 속으며, 그렇게 투쟁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호리키가 그러했고, 넙치 또한 그러했고, 아버지의 친구들과 세쓰 또한 그러했다. 


    즉 인간이라면 모두 살면서 연극을 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익살꾼이다. 그런데 작품 내에서 이토록 요조가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원인은, 단지 그런 통속적인 '인간의 삶'이란 것과 자신의 삶을 도무지 일치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단지 흉내 내고 익숙해질 뿐, 그것을 도저히 가슴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인간 실격」19p.


    이런 익살꾼을 자처하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인간의 삶'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런 의심의 수렁에 빠져 끊임없는 자기 회의에서 벗어날 수 없던 것이다. 


즉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 거고 그렇다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인간 실격」17p.


    도대체 인간들은 무엇으로 괴로워하는 것인가?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않고, 겉과 속이 다른 자신들의 모습에 회의를 느껴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말미암아 고뇌하는가? '공복'의 괴로움, 즉 실용적인 괴로움인가? 정말 그게 다일까


    요조는 위와 같은 의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하지만,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고 말하며 번민한다. 절망적인 이해의 좌절이다.


    때문에 요조는 그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따라 하고자 익살을 떨게 되며, 이로써 그는 일체의 주체성을 상실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저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무(無)로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인간들은 일관성을 고수할 것을, 사회의 일원으로서 통일될 것을, 법을 준수할 것을 요조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협박은 요조에게 내가 아는 나와 타인이 아는 나의 불일치로부터 오는, 타인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닥쳐오는 극단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충족과 부응으로 인한 불안과 집착, 맞지 않는 옷을 입히고,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씌우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을 강요하는 연극의 감독들, 관객들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다. 


    이러한 폭력 속에서 요조는 고립되어 있었기에, 그에게는 순순히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품 속에서는 극진한 서비스 정신 내지는 봉사로 서술되지만, 그것은 복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극단적인 착한 아이 증후군 환자, 나쁘게 말하면 노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누구도 그에게 인간처럼 사는 법, 인간처럼 행동하는 법, 인간처럼 웃는 법, 인간처럼 말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그는 태생부터 불행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량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바른 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니 뭐니 하는 도덕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이렇게 인간을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과 대립되어 밤이면 밤마다 지옥 같은 괴로움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인간 실격」27p.


    그러나 어쩌면 요조는 데카르트적 '의심하는 인간'의 진정한 화신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 순수했기에,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데 성실했기에, 자기기만에 빠져 안주하지 않았기에. 따라서 「인간 실격」은 모든 인간을 다음과 같이 양분한다. 즉 겉과 속이 다른 스스로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낀다면 요조이고, 그렇지 않으면 호리키이다.


    모든 인간이 수행하는 그 '연기'라는 것을 지칭하는 명칭은 다양한 듯하나, 그 행태만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 '체' 하는 것, 그것은 틀림없이 인류가 억겁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 낸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편한 진실 중 하나인데, 웬만큼 '사회화'된 사람이라면 삶이란 가면무도회와 다름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직접적으로 폭로하고 들추지 않는다. 누구나 가면을 벗을 수 있고, 또 상대방의 가면을 벗겨 버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무도회의 암묵적 룰을 깨는 것이다. 역사는 보통의 경우 그런 무법자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곤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야말로 그야말로 파국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면에 가려진 그 민낯을 서로 알면서도 은밀히 숨기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즉 인간이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고, 자신의 속내를 순순히 드러내지 않으며 철저히 자신을 위해 남을 속이는, 추잡하고 이기적으로까지 보이는 모습을 드러내기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매한 위상이 무너지기에 모두가 인간인 척하는, 그러한 거대한 연극이 세계이고 '인간의 삶'이라고 인정해 버리기에는, 그것은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십자가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가롯 유다의 은 삼십 냥은 다름 아닌 '사회적 품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종말론적 결말 중 하나는, 어느새 그러한 연기가 자신들을 집어삼켜서 연극 속 배역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착각하게 돼 버린,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이 돼 버린, 무한한 자기기만에 빠져 버린 결말이다. 마침내 스스로에게 세뇌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연기가 아니게 된다. 그냥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수단이 목적이 되어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비참한 결말, 차라리 '빅브라더'라도 존재했더라면 변명이라도, 핑계라도 댈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이 경우에는 어떠한 변호의 여지도 없다. 스스로에게, 나아가 인간 자체에 충실하지 못했기에 발생한 비극이다.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움벨트'(Umwelt)이다. 움벨트란 간단히 말해서 '한 주체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자신의 주변 세계'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예컨대 인간과 박쥐의 감각 기관은 다르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서 주변 세계를 인식하지만, 박쥐는 예의 초음파 같은 것으로 주변 환경을 인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과연 한 인간의 '세계'와 박쥐의 그것을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인간인 나와 박쥐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계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세계'를 움벨트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생명체의 움벨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물론 물리적 세계는 그 자체로 실제적으로 존재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인 세계의 실존과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나라는 주체에게 어떻게 다가오느냐, 나아가 내가 세계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객관적 세계의 주관적 인식이 그토록 풍부하고 다양한 자연의 행태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세계, '움벨트'이다. 하물며 새들조차 자기 주변의 이웃 새들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놀라운 집단적 행동을 창발해 내지 않던가? 


위치를 선정할 때 찌르레기들이 보이는 이러한 성질 덕분에 우리는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로 찌르레기 간의 상호 작용이 그들 사이 간격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새들 사이의 연결성에 좌우된다는 사실이었다. 만약 내가 친구들과 함께 달리다가 우회전한다면, 속도를 맞추기 위해 내 관심은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1~2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친구)에게 집중되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거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중에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당연했다.
(…)
새들은 아주 간단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옆에 있는 동료의 위치에 맞춰 이동한다. 회전에 관한 정보는 이 새에서 저 새에게 빠른 속도로, 마치 순식간에 퍼지는 입소문처럼 전달된다.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27, 30p.


    따라서 주변 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대단하신 '인간'의 세상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여기서 어떤 보편적인 종(種)으로서의 인간의 움벨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서로에게는 각각의 수많은 고유한 움벨트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조가 말하는 그 '인간의 삶'이란 것을 어느 정도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문제 이긴 하겠다만, 대체로 우리는 그 좁디좁은 우리 주변의 세계, 나와 마주치고 살을 맞대고 같은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존재들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새들 또한 상대적인 일정 비율을 넘어서는 거리에 있는 동료들의 거동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가 가치를 두어야 할 것, 무엇보다 소중히 여겨야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일컫는 움벨트일 것이다. 그것은 나만이 유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자 그 무엇보다 실제로 내 삶을, 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때문에 그 숭고한 주변과 함께 연대하기 위해서 익살을 떨어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리고 마땅히 그리 하여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도대체 익살꾼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결국에는 나 또한 뻔뻔해진 채 '인간의 삶', 즉 속세에 빠져 연기자로 살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때 우리가 놓인 양자택일의 기로는, 요조와 같이 그 연기자로서의 숙명에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며 평생을 자기 회의 속에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 또한 나 자신의 모습이오, 하고 염치없게 살아갈 것인가, 그것뿐이다. 가히 인간이라면 이러한 연극에 스스로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강제로 참여될 것인가 하는 봉사와 복종의 경계 사이, 몰염치와 부끄럼의 경계 사이에 놓여 있는 듯하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그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신의 실존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이러한 '연기'가 우리 인간의 본능임을, 그토록 한 사람의 삶을 파멸로 이끌었던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배우로 참여하는 하나의 연극임을 인정할 것인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復讐)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것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습니다.
(…)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도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호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상하게 인색해졌습니다. 또 시게코의 말을 빌리자면 시게코를 별로 귀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 실격」91, 92p.


    그러나 그것의 전제는 모두가 인간으로서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을 나약함을 인정하고 사실은 나 또한 사기꾼이오,라고 과감히 그 공공연한 비밀을 인간 사회에 폭로하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서로의 배역을, 서로의 움벨트를 존중하며 충실히 연극에 참여하는 것이다. 


"야, 그건 좀 괜찮은데. 자 그런 식으로 또 하나. 부끄러움의 반의어."
"몰염치지. 유행 만화가 조시 이키타."

「인간 실격」110p.


    따라서 차라리 다자이 오사무의 또 다른 작품「직소」에 나오는 가롯 유다처럼 자신의 천박한 본성을 드러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끄럼보단 몰염치가 나은 것이다. 


아아, 새소리가 시끄러워. 지겹게도 들려오네. 왜 이렇게 새들이 떠들어대는 거지. 짹짹짹짹, 왜 이렇게 난리를 부리는 걸까요. 저런, 그 돈은?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저, 저에게, 은 삼십 냥을. 아, 네. 과연. 하하하하. 아니에요.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두들겨 패기 전에 그 돈을 집어넣으시지요. 돈이 탐나서 아뢰러 온 게 아닙니다. 집어넣으라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받겠습니다. 그렇지, 나는 장사꾼이었지. 나는 아름답고 우아한 그분한테서 돈 때문에 늘 경멸받았지. 받겠습니다. 저야 뭐 천생 장사꾼이죠. 천시 받는 돈으로 그분에게 멋지게 복수해 주겠습니다. 이런 게 저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복수의 수단이죠. 이것 보라고! 녀석은 은 삼십 냥에 팔린다. 나는 조금도 울지 않아. 나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 처음부터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았어. 네, 나리. 저는 거짓말만 했습니다. 저는 돈이 탐이 나서 그분을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오오, 그게 틀림없어. 그분이 저에게 돈을 조금치도 벌어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오늘 밤 확실하게 깨달았기 대문에, 그거야 장사꾼이니까, 재빨리 배반한 거죠. 돈, 이 세상은 돈이면 다지요. 은 삼십 냥, 이 얼마나 근사합니까. 받지요. 저는 쩨쩨한 장사꾼입니다. 예,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네. 아, 미처 말씀 못 드렸군요. 제 이름은 장사꾼 유다, 헤헤, 가롯 유다입니다.

「직소」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임무란 자기 기만에 빠지지 말 것, 스스로에게 충실할 것, 폭로할 것, 진실을 마주할 것, 나아가 나의 움벨트에 속해 있는 음지의 존재들, 태생부터 불행한 존재들, 범죄자들, 노예들, 인간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 묶인 자들을 돌아보고 '인간의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조와 같은 이들의 불행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소외받는 이들을 향한 진정으로 '다정한' 시선과 미소가 필요하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토록 사소한 미소, 그 미소 한 번이었을지도 모른다.


호리키는 내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마자 이렇게 말하더니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다정한 미소가 고맙고 기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다정한 미소 하나에 저는 인생의 완전한 패배자가 되어 매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 실격」128p.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진정으로 우리 또한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기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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