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일하지 않은 하루를 돌이킴
코로나는 끝났지만 재택근무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제 재택을 한다, 몇 번 재택을 한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내가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나가고 그럴 일이 없으면 집에서 일을 합니다. 갤럽 [Wellbeing]이라는 책에서도 재택을 하느냐 여부보다 더 중요한 건 직원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는데 저 역시 매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입니다. 1주일에 1번 재택을 했더라도 매니저가 월요일에 나오세요, 했으면 끔찍이도 싫어했을 텐데 내가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어 그나마 덜 싫어지는 게 확실합니다.
회사와 집이 멀어서 재택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재택을 하면 일밖에 할 게 없기 때문에 회사에 나갈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할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다. 밥도 30분이면 먹고 화장실도 5초 안에 도착하기 때문에 시간을 쓸래야 쓸 일이 없습니다. 문만 열고 나가면 산책로인데도 손대면 죽는 문처럼 열 생각도 못한 채 집 안에 갇혀 모니터와 온종일 씨름을 합니다.
그래도 1주일에 2-3번은 꼭 회사에 나갈 일이 생깁니다. 밥을 먹자는 동료가 있거나, 파트너나 고객과 미팅이 있을 때 혹은 업무상 세션을 진행해야 하는 경우 등. 그래서 요즘 모토는 나간 김에 만나서 할 일은 다 몰아서 하자입니다. 혼자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은 재택 하는 날, 만나서 밥 먹고 논의하고 커피챗 하는 건 회사 나가는 날. 밥 먹자는 사람이 밀려서 줄을 서기 시작하면 회사 나간 날 이른 저녁도 먹고 헤어집니다. 밥 먹으러 회사 나가느니 그게 효율적이더라고요.
어제는 그 만나서 하는 일의 피크인 하루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아침 8시에 업무를 시작했는데 하루동안 무려 8건의 미팅을 했습니다. 후아, 네 8건이요. 때로는 10분 컷의 단거리, 30분 때로는 3시간에 걸친 마라톤 같은 미팅을 했습니다. 만난 사람은 온라인 오프라인 포함해 9명이니 그리 많진 않네요. A님과 1 on 1, B님과 1 on 1, 다시 A, B님과 팀 미팅 그 후엔 A, B님과 파트너사 방문 등. 외부 일정이 많았던지라 카페만 4곳을 방문해 음료를 하도 마셨더니 나중엔 배도 아프더라고요. 그러고서도 개인적인 일정으로 코치님 한 분의 회사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코칭까지 받고 집에 와서 완전 뻗었습니다. 날도 더웠고 사람도 많이 만났고 무엇보다 3시간 마라톤 미팅은 그만큼 치열하지만 결론은 잘 안나는 계속 꾸준히 달려야 하는 일이다 보니 더 지쳤던 거 같아요. 미팅은 끝났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선 그 프로젝트가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3년짜리 프로젝트가 이제 시작되었으니 부인할 수 없는 마라톤성 업무가 확실합니다.
그래도 불평도 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엄마를 기다린 두 딸이 있어 퇴근길 집에 오자마자 나는 행복해졌고 얼른 엄마모드로 돌아가 저녁을 가족과 함께 먹고 씻고 드러누웠습니다. 하루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남겨두자, 그리고 책임감과 열심도 좋지만 즐거움과 여유로 살아가자라고 다짐한 지 2-3년이 넘었지만 사람이 쉽게 변하면 죽을까 봐 그런지 자꾸 관성처럼 과거의 나로 돌아가려 합니다. 애초에 8개 미팅을 하겠다고 잡아둔 것 자체가 문제였긴 할 겁니다. 더 정신 차릴 현실은 하루 8개 미팅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네요.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아침이 맞이해 주니 저는 참 행복합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두운 만큼 지치고 잘 안 보이고 끝이 없는데, 경계가 없어 보이는 그 시간 사이에 빛이 생겨나 나를 다시 비추고 움직이고 생기 나게 하니 말이죠. 밤과 낮을 창조한 신을 찬양하고 하루 24시간과 1년 365일을 만들어 낸 누군가를 칭송하고 싶어 집니다.
이러나저러나 중요한 건 저입니다. 삶을 바꾸는 것도 저이고 선택하는 것도 저고요. 다독여도 보고 정신 차리라고 흔들어도 보며 잘 가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라톤도 더 즐겁고 여유 있게 결승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지난 주, 너무 예쁘고 밝았던 슈퍼문 - 중랑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