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오늘도 내가 지킨다.
사회 초년생 때부터 한 번도 데스크탑으로 일해본 적이 없는 나는 늘상 백팩을 매고 다닌다. 그렇다고 백팩에 랩탑만 들어가랴, 화장품에 노트에 이것저것 쑤셔 넣다 보면 백팩은 늘 꽉 차 있다. 심지어 LG 그램을 들고 다닐 때도 백팩은 늘 무거웠다. 어깨가 안 좋은 나는 그래서 랩탑도 가벼운 거, 가방도 가벼운 거를 주구장창 외치고 다닌다. 어떻게든 무거운 짐을 빼고 가볍게 다니는 BMW족이다.
그런 내 신념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건 텀블러다. 무려 벤티 용량의 음료도 들어갈 만큼 크다 보니(710ml) 무게도 350g 꽤 된다. (가볍다고 텀블러 회사는 주장하는데 나에겐 여전히 무겁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이 텀블러를 가방에 넣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텀블러가 예뻐서, 유행해서, 텀블러를 들고 다니면 할인을 해줘서 사고 선물하고 들고 다니기도 한다. 나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텀블러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지구 사랑은 우리 집에 있는 두 아이와 회사의 핵심 가치로부터 시작되었다.
요즘 초등학교 교육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정말 많은데, 그중에서도 지구와 환경에 대한 교육은 단연 으뜸인 듯하다. 우리 아이들은 불 끄기, 전기 코드 뽑기, 물 아껴 쓰기를 7-80년대 어른들보다 더 잘한다. 화장실 불을 자주 켜놓고 나오는 우리 남편은 그 덕분에 두 딸에게 자주 타박을 받을 정도다. 아이들과 그런 노력과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마트 갈 때 장바구니를 들고 가기, 가게에서 비닐봉지 없이 손에 물건 사가지고 오기, 이면지 쓰기 등은 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도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잔을 포기하기는 참 쉽지 않았다. 내가 언제 카페를 갈 거야라고 계획해서 갈 때보단 누군가와 어쩌다 가는 경우도 많았고 번거롭게 그때마다 텀블러를 챙겨 들고 다니는 건 정말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21년 1월에 입사한 지금 회사에서 갑자기 2022년부터 회사 핵심가치를 하나 추가했는데(원래는 신뢰, 고객 성공, 혁신, 평등 이렇게 4가지) 그게 바로 Sustainability 바로 지속가능성이었다. 음, 웬 지속가능성? 근데 우리 회사 참 마케팅 잘한다 그런 생각이 바로 들었다. 이 시대에 ESG, 환경 이슈는 단연 비지니스의 화두였으니까! 맘에 들었던 건 가치와 일상의 비지니스 환경과 행동에 곧바로 접목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회사 쇼핑백은 재활용된 콩기름 종이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고 간식 냉장고에는 플라스틱 병 음료는 없고 모두 캔이나 병에 음료가 담겨 있다. SaaS 회사라 그렇기도 하지만 웬만해선 문서 출력도 잘 안 하니 종이 사용도 매우 억제된다. 직원들끼리도 환경 보호를 위한 동영상을 같이 보거나 플로깅 등의 행사도 하며 실제 지구 환경을 지키기 위한 여러 활동도 종종 하며 어느덧 지속가능성이 내 삶에 깊이 쑥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진짜 텀블러를 사고 싶다, 사야겠다는 생각을 어느 날 하며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뒤지다가 색감이 너무 예쁜데 가격도 적당하고 내가 원하는 큰 사이즈, 뚜껑이 완전히 밀폐되어 음료가 든 상태로 가방에 들고 다닐 수 있는 보온도 잘 되는 녀석을 찾았다. 바로 구매하지 않고 내 선물함에 갖고 싶은 아이템으로 하트 표시를 해두었다. 흔한 스타벅스 텀블러 말고, 애매한 사이즈 때문에 메가커피에선 못 쓰는 그런 텀블러 말고 어디서나 쓸 수 있는 그런 텀블러를 드디어 발견했고 지르기만 하면 됐던 거다. 그러다 내 생일이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직장 동료가 그 텀블러를 ’나에게 선물하기‘ 해주었다. 그게 작년 11월이니 어느덧 10개월째 이 텀블러를 잃어버리지도 않고 거의 매일 들고 다니며 물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주로는 커피를 마시며 애정하고 있다. 물론 텀블러를 쓴다는 건 무겁게 들고 다니는 걸 넘어서는 불편함이다. 라떼를 마신 날은 우유 비린내가 가시지 않아 집에 와서 베이킹 소다로 세척을 해줘야 하고, 언제 어디서 누가 커피를 마시자고 할지 몰라 텀블러를 마치 핸드폰처럼 들고 다니는 게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탠저린 옐로 색깔의 710ml, 350g 이 텀블러를 진심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스타벅스에서는 텀블러를 내밀면 400원 음료 할인을 해줘 잠시 행복해지지만 물질적인 건 정말 부차적이다. 이 거대한 지구가 이번 여름 이렇게 뜨거워질 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구 온난화가 문제다, 너무 덥다만 외치는 삶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플라스틱을 안 쓰고, 종이컵을 아끼며 나는 중량을 더한 백팩 무게만큼 지구에 대한 책임을 내 삶에 더해가고 있다. 그뿐인가? 일회용품을 쓸 때마다 갖던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오, 텀블러 들고 다니네요라고 말해주는 동료와 주변인들의 깨알 같은 칭찬 앞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니, 어찌 텀블러 없이 산단 말인가! 나는 누가 뭐래도 텀블러 예찬론자가 된 것이다.
나에게 이 아름다운 물건을 선물해 준 Y님, 다시 한번 고마워요. 사무실에서 나는 자리에 없어서 탠저린 옐로 색깔을 보고 아, 저기가 K님 자리구나 하고 알았다며 메세지를 주기도 하는 그녀 덕분에 나는 오늘도 지구 지킴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대여, 텀블러를 사십시오. 그리고 들고 다니세요. 그러면 남극의 얼음이 조금은 느리게 녹고, 몰디브도 더 천천히 물에 잠기게 될 거랍니다.
[오덴세 텀블러 쇼핑몰에서 가져온 이미지, 탠저린 옐로 지금도 너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