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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Jan 25. 2022

신여성이 된 기분


속단은 위험하다.


내가 책을 사고 싶어 하는 건 책을 읽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책의 물성에 대한 욕구도 큰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책을 손에 쥐었을 때의 그 묵직한 그립감, 내용과 제목을 고려해서 만들었을 표지의 독특함, 종이의 질감 등이 책을 읽는 재미의 큰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집에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또 새로운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색다른 표지에 기웃거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전자책을 사용하는 이들이 편리하다는 말에 콧방귀만 날리며 열심히 책을 사다 날랐다.


새해 들어 집안이 너무 무겁고 많은 짐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얼마 전 광주 아파트 붕괴 사건의 끔찍한 사진을 본 이후일 지도 모른다. 충분히 굳어지지 않는 콘크리트의 무게에 처참히 무너져 내리는 아파트의 모습에 내 집이 자꾸 오버랩된다. 짐을 덜어야겠다 마음먹고 둘러본 게 책의 무게였다. 잡다한 짐들의 무게에 책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만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부류의 짐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손쉬운 일이지 그 무게와 먼지도 만만치 않았고, 버릴까 말까 하는 갈등의 마음도 쉽지 않았다. 우선 아이들 책부터 골라내고 그리고 내 책도 골라냈다. 읽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책들에, 다시 읽겠다 쟁여둔 책들, 그리고 추억이 숨겨진 책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그렇게 골라낸 책들이 백 권을 족히 넘었다. 중고서적에 팔 수 있는 책들은 팔고 버릴 책은 버리고 나니 깨끗해진 책장이 그렇게 홀가분하게 느껴질 수 없다. 정리의 힘이다.


중고 책방에 넘긴 책값이 이십만 원이 조금 안 되는 197천 원이다. 가벼워지겠다는 결심의 일환으로 이북 리더기를 구입했다. 생각보다 작고 가볍다. 갤럭시 노트 폰보다 옆으로 좀 뚱뚱한 크기 정도이니 폰으로 보는 것과 뭐 큰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전자도서관을 일단 등록해 책 대여를 시도했다. 대여해 볼 수 있는 책이 다양하진 않다. 다시 전자책 구입 시 받은 무료 쿠폰으로 북클럽을 가입해서 볼 수 있는 책들을 내 서재에 담았다. 전자도서관보단 책은 다양하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다. 개중 눈 여겨보았던 신간 몇 권을 골랐다. 좀 더 진화된 방법으로 책 읽기 시작이다.


생각보다 간편하고 눈이 편안하다. 오랫동안 앉아 책을 읽는 게 힘들었던 나는 스스로 집중력이 약한 게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확실히 전자책으로 읽으니 더 오랜 시간 책을 읽게 된다. 눈이 편안하기도 하고 가벼우니 여러 자세로 고쳐 앉아 읽기도 쉽다. 손에 책을 쥐는 힘도 필요 없고 눈만 굴리게 되니 이런 신세상이 있을 줄이야. 책의 물성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모든 물성을 사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책 한 권의 무게보다 훨씬 가볍게 한 권의 책이 쉽게 읽힌다. 특히 밤엔 눈이 침침해 책을 읽는 게 힘들었는데 밤 독서가 가능해진 게 놀랍다.


외출할 때에도 무슨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던 것에서 이젠 작은 핸드백에 전자책 하나 쑥 넣어가게 된다. 책은 역시 종이책이야를 외치던 나는 그러니까 경험해 보지 않고 내 고집대로 생각하는 꼰대의 마인드가 아니었을까.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러니 속단하지 말자. 일단은 경험해 보는 걸로. 이게 뭐라고. 누구에겐 가는 구문물일 전자책을 지금에야 구입해서 이렇게 기특해하며 예뻐한다.(로봇청소기를 들였을 때의 바로 그 기분이다.)


음... 마음먹은 김에 책장을 한 번 더 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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