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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Apr 07. 2022

여행은 도끼다

제주책방 풀무질

여행은 도끼다.


짧은 이틀의 여행이 내게 도끼가 될 수 있었던 건 제주 책방 풀무질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책방 풀무질을 방문할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첫날 숙소에서 머지않은 곳에 비자림이 있어 우린 아침 일찍 비자림을 산책했다.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비자나무의 숲은 아름다웠다. 울창한 후박나무 가로수길을 지나가다 보면 갖가지 새소리가 어우러진 비자림이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진심으로 감탄하게 되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주어지는 긍정적인 일중 하나이다. 바로 그 비자림에서 차로 십분 거리에 제주 풀무질 책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린 고민 없이 방문했다.


밭이 펼쳐진 마을 속에 위치한 작은 제주식 가옥이었다. 마당엔 동백꽃 나무가 그림처럼 두 그루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엔 집과 한그림처럼 어울리는 순둥이 개가 누워있다. 방문객은 일상이라는 듯 무심하게 한번 바라보고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남편이 알은척했다.

" 네가 광복이구나!"

 마음 좋은 책방 주인장이 우연히 키우게 된 유기견이며 광복절날 가족이 되어 광복이가 되었다고 인스타에서 얻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제이름을 듣고 한 번 우리를 더 바라볼 뿐 심드렁하다.


작은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씩씩하고 거침없는 인사가 터져 나왔다. "안녕하세요?" 뜻밖의 환대에 마음이 환해진다. 조용한 책방에 소리 없이 들어가 소리 없이 구경하고 소곤거리며 책을 사 오던 풍경과는 다르다. 우리도 씩씩한 마음이 되어 마음 놓고 큰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

사람을 처음 만나면 이렇게 인사하던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잊고 있었을까. 인사 하나로 마음의 경계선이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작은 책방은 오밀조밀 아름다웠다. 한쪽 편엔 시와 소설 위주의 문학책이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고 또 한 켠엔 고전 책이 그리고 철학 책도 눈에 띈다. 또 한 쪽 벽면엔 제주에 대한 책들도 진열되어 있고 아름다운 그림책도 전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작은 집과 어울리게 너무 과하지 않은 책 진열과 집 밖의 풍경이 조화로워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양한 책들이지만 이질감 없이 서로 어울리는 게 책방 주인의 취향이지 않을까 싶었다. 한쪽 테이블에 밖에서 만난 광복이의 사진이 붙어 있어 유심히 살폈다. 책방 주인이 다가와 광복이 사진이라며 친절히 설명해 주신다. 그때 책방 주인 은종복씨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게 되었다.


적당한 주름과 그을린 얼굴빛과 흰머리가 간간이 섞여 있는 모습으로 봐선 중년이 훌쩍 넘은 듯한데 그의 눈빛은 청년의 것이다. 목소리 또한 아까 인사할 때의 우렁차고 똑똑한 발성으로 또랑또랑 힘 있고 자신감 있는 음성이었다.

"우리 광복이 처음 온 날부터의 사진이에요. 처음 우리 집에 올 땐 몸이 지금의 반 밖에 안되고 온몸에 진드기에 힘없이 아파 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해졌어요. "이렇게 시작한 광복이에 대한 이야기는 예상되던 스토리였다. 거기에 지금은 "세순광"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만큼( 세화에서 가장 순한 광복이) 착하고 예쁜 개라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광복이의 순한 눈망울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세상에 악한 개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거칠게 대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지." 자신감 넘치는 책방 지기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개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


책방 주인 은종복씨의 말씀이 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진심 그대로 정확히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상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정확히 답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야기하면 "아, 그럴 수 있겠네요."라고 대응했고 거기에 따라오는 그의 생각을 정확히 말했기에 나 역시 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해서 기대하며 듣게 되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허투루가 없어 정확히 그 말들을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책방 주인의 뒤엔 그의 젊은 시절 서울 풀무질을 운영하던 청년 은종복씨의 사진이 있었다. 더 젊고 생기 있지만 눈빛은 지금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때와 지금은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까.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초면이라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오랫동안 책방 주인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이유를 나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책방 마당의 예쁜 동백나무에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도 했고 오늘 세화장이 열리니 구경하라는 팁도 알려주며 다정함을 보인다. 그의 다정함에 진심이 느껴져 우린 마음이 따뜻해졌다. 일상에서 사회적인 태도로 적당히 ~하는 척하며 살아온 내게 책방 주인 은종복씨의 태도는 도끼 같았다. 사람이란 존재의 원래값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원래값을 잊은 채 내 모습이 아닌 이런저런 척에 익숙해져 온 내 모습이 느껴져 부끄러워진다. 이런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내게 책방 지기는 내게 도끼가 되었다.


책방을 나서는데 책방 지기 은종복씨가 작은 잡지를 건넸다. 광복이에 대해 쓴 글이 실려있다고 친절히 찾아 표시해 주신다. 제목은 "종복이는 버려도 광복이는 안 버린다."이다. 아내가 광복이에게 다정히 건넨 말이라는 설명에 우린 다 같이 크게 우하하 웃어댔지만 그들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이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될 것 같았다. 길고도 짧은 인생이 소중한 것은 이렇게 진심을 만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그 경험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소중함을 이렇게 우연한 여행 속에서, 처음 보는 이에게서 느끼게 되는 이 놀라움을 나는 또 이렇게 글로 나눈다.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


내 인생에 또 얼마나 많은 도끼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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