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봐도 거지 할머니였다. 꾀죄죄한 얼굴에 합죽이 입, 눈은 툭 불거져 나오고, 몸은 마르고 굽어있었다. 시선은 불안하게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고 입은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데다 거친 피부와 주름 때문에 나이를 가늠해 볼 수 없는 할머니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봄을 만났다.
내가 처음 그 할머니를 본 것은 바다가 보이는 야외 카페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라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이것저것 먹을 것을 벌려놓고 있었다. 어디선가 동화책의 마귀 할머니를 연상케 하는 할머니 한 분이 튀어나왔다. 우리를 향해 계속 중얼거리기에 난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어 "네? 할머니?"라고 대꾸를 했다. 할머니는 그 대응에 신이 난 듯이 내게 뭔가를 말하려던 참이었다. 함께 했던 동행이 내게 눈짓을 했다. 얼른 일어나자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모양새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품 안엔 할머니처럼 생긴 깡마른 강아지가 힘없이 안겨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 동네에서 꽤 유명한 할머니였다. 누군가는 귀신이 들렸다고도 말하기도 했고 또 살짝 정신이 나갔다고도 했다. 언제나 동네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중얼거리고 다녔고 사람들은 모두 귀신이 옮겨올까 봐 그녀를 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걸음걸이는 당당한 팔자 걸음걸이에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의 길거리 생활이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거리를 활보했고 여전히 표정과 옷차림은 화려해서 눈길을 끌만했다.
할머니를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녀의 패션 스타일을 열심히 곁눈질했다. 꾀죄죄한 얼굴과는 달리 그녀가 걸친 옷들은 색깔이 화려하거나 독특한 스타일로 눈에 띄었다. 영 구식이긴 하지만 어딘가 허영기 넘치는 복부인 아줌마의 스타일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엔 긴 코트나 드레스 같은 원피스 스타일로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이 소화할 만한 옷이기도 했다. 그런 옷에는 언제나 핸드백도 함께 엣지 있게 들어주는 센스를 발휘했는데 그 스타일이 어딘가 70년대 여성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행색이었다. 가난과 화려한 스타일은 어울리지 않는 듯했지만 그녀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함께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누군가에 의하면 할머니의 패션은 헌 옷 수거함에서 완성된 것이라고 했다. 요즘 헌 옷이란 게 해어지거나 험해서 못 입는 게 아니라 유행이 지나서, 지겨워져서 등등의 이유로 버려지곤 하니 그 옷들을 적절하게 이용해서 저렇게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칠십 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그것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꼬장꼬장한 할머니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옷을 골라 이리저리 걸쳐보았을 그림을 상상하니 귀엽기도 신선하기도 하다. 할머니는 그렇게 사계절을 다양한 옷의 연출로 거리를 활보한다.
며칠 전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두들 마스크를 끼고 땅만 보고 걸어가고 있을 때 할머니와의 만남은 신선했다. 그녀에게는 이미 봄이 오고 있었다. 움츠려 있는 거리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봄 냄새 폴폴 나는 그린 색 꽃무늬 재킷에 크고 화려한 구슬이 박혀 있는 한복에나 어울릴 듯한 커다란 클러치 백을 가슴에 안고 시선은 저 멀리 허공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녀의 활보가 답답한 마음을 뻥하고 뚫어주는 것 같다. 할머니가 바라보는 봄날의 기운이 왜 나에겐 오지 않았던 걸까.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 그녀를 본 날과 십 년이 넘게 흐른 지금 할머니의 모습이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정말 그녀는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마귀 할머니일까. 아니면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봄의 전령사인 것일까. 그녀의 활기찬 뒷모습 옆으로 하얗게 몽우리 진 목련 꽃이 빼초름하게 걸려 있다.
아무튼,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