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을 들어서는데 하늘이 온통 뿌연 잿빛이다. 흐린 데다가 미세먼지도 심한 것 같다. 뿌연 하늘에 미세먼지의 주범인 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비행기를 타려니 마음이 불편해진다. 코로나 시국으로 좀 나아졌던 공기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기세인데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큰 가방을 들고 씩씩하게 공항으로 입장했다. 거의 삼 년만이 아닌가 싶다. 공항의 공기는 역시 설렘과 분주함이 가득하다. 넓은 공항에서 길을 잃어도 좋고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여 작은 점이 되어가는 내 모습도 좋다. 이 정도면 여행을 다니지 못한 채 삼 년을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다.
출국 보안 검색을 위해 긴 줄 위에 서 있는데 언니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언니의 동공이 커졌다. 출발 전부터 무슨 변수인가 가슴이 덜컥했는데 언니의 표정은 빠르게 잔잔한 감동의 미소로 이어졌다. 언니의 큰 딸 민주가 엄마 여행 잘 다녀오라고 백만 원을 송금했다고 했다. 취직한 지 만 일 년이 된 성인 딸에게서 받는 용돈! 그 기분이 어떨지 부럽기도 하고 그 감동이 내 것처럼 가슴이 뭉클하다. 자식을 돌보던 마음에서 자식이 엄마를 위하는 마음을 받게 되는 순간이다.
어젯밤 우리 스페인 여행의 출정식을 위해 건배를 했을 때 민주가 따뜻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모, 우리 엄마를 좀 부탁해요. 엄마가 정신이 없어 이것저것 막 흘리기도 하고 영어도 잘 못하고 소매치기한테 당할 수도 있고..."
민주의 염려는 사춘기 딸을 수학여행 보내는 엄마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웃기기도 하고 부탁받는 이모도 별 수 없다는 걸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되어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심각히 염려해 주는 딸이 있다니 언니는 참으로 행복한 여자다. 민주의 부탁도 있고 나 역시 오랜만에 나가는 유렵 여행이니 마음이 비장해진다. 어디 가서 소매치기나 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 괜히 여권과 지갑을 꼭 부여잡는다.
인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열네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오랜만의 여행은 그 열네 시간도 다정하게 느껴지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 나와 언니는 스페인의 몇 개의 도시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다녀오기로 계획했다. 정확히 일 년 전, 혹시나 갈 수 있으려나 하고 예약한 마일리지 좌석 예매가 가져다준 여행이다. 좌석을 예약한 후, 거짓말처럼 코로나 사태도 조금은 진정이 되어 갔고 딱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가게 된 형국이다.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 그래서 가게 된 여행이니 선물 같은 여행인 것이다.
우린 여행 전에 서로 각자의 행복을 마음껏 누려보자며 서로 어떤 것도 말리지 말기로 약속했다. 옷 입는 것부터 구경하는 것, 사는 것까지 우린 각자의 욕망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우리의 여행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평소 우리의 일상이 욕망을 억제하는 일이었나 생각해 본다. 일부는 그렇고 또 일부는 내가 만든 틀을 깰 수 없어 욕망을 누르는 점도 있었다. 그 욕망은 어디선가 한 번쯤 마음껏 발산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마트북으로 다운로드해온 스페인 여행정보책을 펼쳤다. 빼곡한 정보가 가득한데 내 발로 가보기 전에는 그 정보가 뿌연 안개처럼 다가온다. 바르셀로나는 기대대로 가우디와 건축의 도시이며 우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화려했던 과거의 문명을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은 명확했다.
인천공항에서 정오 정도에 출발해서 열네 시간을 비행하니 우리 시간으로는 자정이 넘었고 바르셀로나 시간으로는 오후 늦은 시간에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밖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고 낯선 언어가 주변에 맴도는 것으로 이제서야 먼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실감하게 된다. 짐 찾는 곳으로 나서는데 트랜스퍼하는 공간에 줄을 서 있는 몇 명의 사람이 보였다. 출국 전에도 비싸 보이는 가방을 든 젊은 남자를 눈여겨봤는데 그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다부져 보였는데 그가 혹시 유명 인사가 아닐까 유심히 봤었다. 난 그가 혹시 축구선수 이강인이 아닌가 하고 언니에게 물었고 언니는 그가 축구 선수라고 하기엔 키도 작고 몸이 그리 좋지 않다며 내 말을 일축했다. 그런가 하고 지나쳤는데 그게 며칠 뒤 아주 후회스러운 한순간이 되고 말았다.
며칠 뒤 인터넷에서 이강인 선수가 바로 그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그의 소속팀인 스페인 마요르카의 전지훈련을 위해 바르셀로나를 경유하여 마요르카로 떠났다는 뉴스를 보고서야 그 남자가 이강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를 진작에 알아봤다면 월드컵 때 너무 멋지게 잘 뛰었다는 격려의 인사와 팬심을 보였을 텐데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나는 뭉크의 <절규> 속에 나오는 인물처럼 머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축구에 진심인 아들로부터 어떻게 이강인 선수를 못 알아볼 수 있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오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는 긴 비행시간 잠을 자고 난 직후에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졌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내 둔한 눈썰미에도 연예인 포스가 흘렀으니 그는 단연코 축구 스타였음을 인정한다. 실제로 인사는 못 건넸지만 지금이라도 힘주어 말하고 싶다.
"이강인 선수 멋져요! 언제나 응원해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