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비행기 표를 예약할 때 우리가 고려했던 건 둘째 버찌의 입시 스케줄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날 즈음엔 버찌의 입시의 과정이 대부분 끝나고 결과만을 기다리는 시기이기에 여행에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입시 결과는 좋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고 여행지에서 합격 소식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를 상상했다. 거기까지가 나의 환상이자 무모한 기대였다. 입시가 끝났으니 엄마의 물리적 도움이 필요가 없을 테고 오히려 엄마의 잔소리 없이 즐거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기대는 늘 보기 좋게 빗나간다. 여행 기간 동안 당연하게 예상했던 합격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우린 각자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시차 때문에 나는 밤잠을 설쳐가며 한국 소식을 기다렸고 버찌와 남편과 큰 아이는 한국에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함께 고민해 주고 위로해 주지 못하니 좋은 풍경을 봐도 마음은 돌덩이를 메고 있는 듯 무거웠다.
그날 밤도 가족들과 톡을 주고받고 걱정하며 잠들었다가 악몽을 꾸며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해 피곤한 아침을 맞이했다. 바르셀로나 교외에 위치한 몬세라트 수도원을 가기로 한 날이라 일찍 서둘러야 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교외로 나가 몬세라트 수도원이 위치한 산 절벽까지 오르는 산악 열차를 타는 경로다. 가방엔 샌드위치와 간식거리를 사서 넣고 따뜻하게 옷을 입고 나섰다. 버찌를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얼른 몬세라토 수도원에 도착하고 싶었다.
몬세라트행 기차를 타니 온통 관광객들이다. 창밖으로는 파랗고 맑은 하늘 아래 시골 정경이 보였다. 어느 나라이건 시골 정취는 닮은 구석이 많은데 넓은 경작지에 띄엄띄엄 보이는 작고 낮은 집들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누군가의 강요 없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가 이런 풍경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몬세라토에 가까워지자 평지였던 지대가 울룩불룩 해지더니 저 멀리 기암괴석이 있었다. 몬세라토산이라는 의미가 '톱으로 자른 산'의 뜻이라는데 말 그대로 탑처럼 높게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이 장관이다. 그 위태로운 바위 산에 지어진 수도원이 멀리서도 보였다.
산악열차를 타고 굽이굽이 산을 오르니 아래에서 봤던 수도원이 더욱 거대하게 나타났다.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우리가 보고자 한 것은 기이한 산에 위치한 성당도 있었지만 성당 안에 있는 검은 성모마리아 상을 보고 기도하는 것과 세계 3대 소년 합창단에 속한다는 이곳 소년 합창단의 성가를 듣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들을 수 있다는 성가대의 노래를 듣기 위해 서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의 웅장함은 놀라웠다. 아치 모양의 둥근 형태의 높은 천장에 화려한 금색의 장식과 조각들이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얼마나 작고 힘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려는 것 같았다. 성당의 한 부분 한 부분이 모두 조각 작품인 듯했고 한참을 바라보아도 새로운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곧 성가대 가운을 천사처럼 입은 미소년의 합창단이 입장했다. 미성의 음색을 가진 합창단이니 나이가 많아도 중학생 정도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웅장한 성당 안에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 소리가 가득해졌고 이윽고 그들의 낭랑하고 고운 성가가 울려 퍼졌다. 가난한 기도의 마음에 성스러움을 내 온몸에 퍼부어 주는 것 같았다. 내 옆에는 감동 가득한 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두 달 전부터 열심히 예약해 줘서 이 좋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며 언니는 내게 기특한 동생이라고 칭찬해 준다. 길지 않아 아쉬웠지만 온 감각을 다 열어서 그들의 노래와 아름다운 성당을 받아들였다.
검은 성모 마리아 상을 보기 위해선 긴 줄을 서서 마리아 상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검은 성모상은 말 그대로 검은 피부의 성모 마리아가 무릎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한 손에는 작은 공을 쥐고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그 성모상을 보는 이유는 차례로 성모상 앞으로 다가가 작은 공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위해서다. 그 작은 공은 이 세상, 우주를 의미한다고 했던 것 같다. 나 역시 줄을 기다려 공에 손을 올리고 절실히 기도하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앞에선 제대로 기도도 하지 못한 채 그 위용에 주눅이 들어 잠시 묵상만 한 채 내려와야 했다. 내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몬세라트 수도원에 오면 더 기도를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막상 성당에서 내가 느낀 것은 너무 작고 하찮은 나의 존재였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다 모은다면 얼마나 많은 욕망과 바람과 간절함이 쌓일까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누군가가 평범한 건강을 기도할 때 누군가는 다급한 생명의 쾌유를 바랄 것이고, 내가 작은 아이의 입시 합격을 기도할 때 또 누군가는 전쟁에서 죽어가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리라 생각하니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일지라도 이 기도의 무게들을 가늠해 가며 정리해서 이루어주시기엔 너무 힘든 일이 아닐까 하는 인간다운 걱정이 시작되었다. 순간 내 기도의 소리가 자꾸 작아진다. 그 기도 이전에 이미 신은 버찌를 위한 계획이 다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도 나는 버찌의 엄마이니 작은 기도를 보태어야 하는 게 아닌가. 머리는 점점 복잡해졌다.
수도원에서 다시 푸니쿨라를 타면 그 기암절벽의 더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엔 등반도 많이 한다고 책에서 소개되어 있었다. 우리는 푸니쿨라를 타는 대신 절벽의 십자가까지 가볍게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아찔하게 높은 산이었고 가는 길은 숲이 우거져 아름다웠다. 수도사들이 기도하며 걷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나도 비슷한 마음이 된다. 수도원을 이렇게 외지고 높은 곳에 지어 둔 이유는 무엇일까. 세속에서 멀리 떨어지려는 마음도 있었을 테지만 신이 만든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라는 작고 힘없는 존재를 인식하고 겸허해지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기도에 대해 복잡해진 마음과 버찌를 위한 절실한 마음, 그리고 아름다운 산세에 대한 감탄으로 우리는 순례길을 걷듯이 산책했다. 뾰족한 해답은 얻지 못했지만 다시 산을 내려오는 마음은 조금 개운해졌다. 언제 다시 이곳을 방문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을 떠올린다면 지금의 복잡했던 마음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답은 없지만 생각만 많았던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