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리스본을 여행지로 선택한 것은 단지 스페인과 가깝다는 이유였다. 스페인을 제대로 다 돌아보는 것도 좋지만 가깝지만 다른 빛깔을 지녔을 리스본을 가보면 어떨까 싶었다. 의도와는 다르게 리스본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나는 포르투갈 리스본에 점점 빠져들었다. 다시 유럽을 여행하는 기회가 오더라도 포르투갈만을 목적으로 오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과감히 리스본 3일을 추가했다. (3일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리스본은 바르셀로나에서 한 시간 반 정도의 비행시간으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며, 같은 유로를 쓰는 EU 국가이기에 스페인의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여행 전 준비 단계로 몇 권의 책을 읽었는데, 바르셀로나에 대한 책으로 <스페인은 가우디다>를, 리스본에 대한 책으로 박종호의 <리스본>, 페르난두 페소아의 <리스본>,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었다. 건축가 가우디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다양한 경로로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리스본과 포르투갈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작가의 철학적 메시지도 담겨 있어서 감명 깊은 소설로 마음에 남았다. 박종호의 <리스본>은 아주 자세한 리스본과 포르투갈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의를 듣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또 한 권, 페소아의 <리스본>은 여행안내서처럼 자세히 리스본 도시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펼쳐지는데 이 책이 이 백 년이 넘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 책을 들고 리스본 거리를 걸어도 크게 문제가 없을 만큼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리스본이 더 궁금해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낯선 도시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은 뭉게뭉게 커졌고 이런 경험은 실제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포르투갈의 중요한 역사적 배경인 카네이션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들의 국민성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1974년 포르투갈의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젊은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군사 쿠데타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시민들이 카네이션 꽃을 혁명군에게 달아주었다는 감동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민들의 지지로 이 혁명이 성공하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게 되고, 그들이 가졌던 수없이 많은 해외 식민지를 대부분 포기하고 순차적으로 민간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내게 판타지 같은 감동적인 역사로 다가왔다. 우리의 쿠데타와 민주화 과정이 오버랩되면서 한때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던 힘의 제국이 어떻게 이런 평화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놀라웠다. 게다가 얼마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너무 멋진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던 파울루 벤투 감독도 포르투갈인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의 리스본 여행은 시작도 전에 이미 하트 뿅뿅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리스본 공항에 내려 짐을 찾은 후 공항 밖을 나서는데 바르셀로나와는 다른 활기가 느껴졌다. 그날이 금요일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온 듯 공항 밖은 분주하고 설렘이 넘쳐났다. 지중해의 휴양지를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데 택시 기사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얼마 전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겼기에 혹시 억울한 감정을 가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south korea'라고 작게 말했다. 기사는 백미러로 다시 한번 우리를 보더니 좋은 나라라며 우리를 치켜세운다. 얼마나 오래 비행했는지 그리고 그곳은 어떤지를 묻는데 다정한 호의가 느껴졌다. 칭찬에 머쓱해진 나는 너희의 축구는 참 멋지다고 말을 덧댔다. 그는 질세라 한국의 축구도 정말 잘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그 뒤엔 너희의 선수이자 우리의 훌륭한 벤투 감독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우린 금세 동지 같은 마음이 되고 말았다. 포르투갈 인들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역사박물관을 둘러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래된 도시였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들을 잘 보존하지만 그들이 사는 지역은 현대적으로 바뀌는 것과 달리 이곳은 어디를 둘러봐도 새로운 건물보다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많았다. 공사 중인 건물조차도 신축보다는 다시 리모델링하는 작업인 것 같았다. 낡은 건물에 밝은 페인트 색, 혹은 알록달록 선명한 이슬람식 타일들이 반짝인다. 페소아의 <리스본>에 나오는 건물들이 거의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게다가 도로에는 낡은 전차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덜커덩거리며 지나다닌다. 사람들과 버스와 전차가 그냥 함께 길거리를 다니는데 적절히 조화롭게 잘 운행되는 것도 신기하다.
우린 첫 코스로 시내 근교에 있는 신트라라는 작은 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리스본 호시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사십 분 정도 가면 나오는 동화 같은 작은 도시이다. 수도원으로 지어졌다가 포르투갈 왕실의 별장으로 쓰였다는 페나 성이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고 그 주변으로 고성들이 둘러싸고 있어 중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포르투갈에서도 주요한 관광마을로 꼽히는 듯 관광객들이 북적였다. 페나 성의 알록달록한 색감과 건물 곳곳에 새겨놓은 부조들이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포르투갈의 화려했던 시절의 장식들도 흥미롭고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정경도 평화로운 동화 같아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돌로 쌓아둔 고성을 오르는데 비가 떨어졌다. 아침에 리스본공항에서 보여줬던 맑고 파란 하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우산도 없이 모자만 쓴 채 고성 숲길을 걷는데 괜히 기분이 좋다. 숲의 초록빛은 더 선명해지고 어딘가에 숨어있을 생명체들이 이 비를 반기는 것인지 상쾌하고 신선한 냄새가 숲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 같다. 낯선 곳에서 비를 맞으며 오래된 길을 걷는 우리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어 괜히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길을 잃어 멀리 둘러 가도, 비가 내려 온통 젖어도, 버스 기사의 말을 못 알아들어 멀뚱거려도 이 모든 것이 별로 두렵지도 걱정되지도 않는다. 나도 모르게 숨어 있던 긍정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바로 여행이 주는 힘이었다.
작은 카페에 들어가 유명하다는 에그타르트와 커피를 시켰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은 머리도 좀 닦고 추워진 몸도 녹이며 달콤한 타르트를 먹으니 비도 카페도 내 여행을 풍요롭게 만드는 작은 기적처럼 느껴진다. 카페의 다정한 주인 할아버지의 미소는 보너스다. 한국에 돌아가 이 순간을 다시 떠올린다면 무엇 하나 두렵지 않았던 내 마음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호의를 생각할 것 같다. 여행은 어쩌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온 세상의 호의와 사랑의 에너지를 느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하게 된다. 그 마음이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