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번 전차를 타면 벨렝 지구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갈 수 있다고 구글이 안내했다. 토요일이라 거리에 사람은 많아지고 교통권을 살 수 있는 인포 센터는 늦게 문을 열었다. 헤매다가 겨우 '리스보아'라는 교통권을 사서 전차를 탈 수 있는 광장을 찾아갔다. 우리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전차에 줄 선 사람들이 모두 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십오분 배차간격이라는 전차가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별다른 동요 없이 동행끼리 서로 수다를 떨며 기다렸다. 삼십 분이 넘어가자 이게 맞나 의심스러운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앞에 줄 선 이에게 슬쩍 물었더니 해맑게 그들도 15번 전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답했다. 더 기다려야 하나. 오기로 한 차가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불안인 것인지 혼자 안절부절못했다. 전차도 사고가 나서 못 올 수가 있는 것인지, 왜 이 사람들은 항의하지 않는 것인지, 귀한 시간이 나만 아깝게 느껴지는 것인지 등등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결국 졌다. 나는 다른 선택사항인 버스를 갈아타는 것으로 검색해서 무사히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도착했다. 도착해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결국 전차가 오긴 했는지가 계속 궁금했다.
말이 수도원이지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그 어떤 성당이나 궁과 비교해도 규모나 웅장함이 뒤지지 않는다. 버스에 내려서 펼쳐진 위용에 입이 떡 벌어진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만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수도원의 규모만 봐도 그 시절 종교의 힘이란 왕보다 더 강력했을 거란 확신이 든다. 건물의 모든 면에는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 장식이 뒤덮여 있는데 그 섬세한 조각을 위해 건물에 매달려 있었을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을 떠올리게 했다. 1500년대 지어졌다는 이 수도원의 내부에 들어가면 넓은 중정과 그를 둘러싼 회랑의 우아함이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에 따라 매번 다른 아름다움을 주니 이리저리 카메라를 들이대며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화려했던 시절의 기세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건 역시 예술의 힘이다.
발견의 시대에 있었던 시기에 대 항해를 위한 잠깐의 머묾이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한 축제였을까를 상상하게 된다. 성공적인 항해를 기원하는 마음과 회항 시 새로운 식민지 개척과 보물들을 가득 싣고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가득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수도원 주변도 유네스코 문화재를 더욱 빛나게 해줄 이국적인 풍경으로 넘쳤다. 푸르른 공원을 배경으로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반짝이니 겨울이라는 계절을 잊게 한다. 모델인 듯한 아름다운 여성이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수도원 담벼락에서 이런저런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중세의 빛바랜 건물을 배경으로 한 초 현대적인 드레스의 모델이 비현실적으로 어울려 자꾸 바라보게 된다.
아침에 그렇게 기다렸던 15번 전차를 발견했다. 관광객들을 가득 태우고 그림처럼 달린다. 우리도 거기 끼어 시내 방향의 전차를 탔다. 낭만적인 전차의 모습과는 달리 공간이 너무 좁아 출퇴근 지하철처럼 꽉 끼어탔다. 리스본 주민인듯한 내 옆자리 승객이 운전기사에게 뭔가 날카로운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도 이제 그만 태우라는 의미였을게다. 생활인으로서의 리스본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으로 올라탄 관광객들의 북적임이 소란스럽고 짜증 나는 일상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음이 움츠려든다.
돌아오는 길에 타임아웃 마켓을 들렀다. 큰 시장 안에는 리스본의 여러 맛집들이 푸드코트처럼 모여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뽈뽀 요리부터 해서 타파스, 에그 타르트, 그리고 와인샵까지 리스본의 먹거리들이 다 출동한 듯해 보였다. 마켓의 중앙에는 거대한 전광판 두 개가 서로 등을 맞대어 카타르 월드컵의 축구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며 축구 중계의 경기 흐름을 따라 탄식과 열광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나는 현재 라이브로 진행되는 경기인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날 경기를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포츠의 재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뜨거워질 수 있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재밌고도 놀랍다.
오후가 되니 공기가 차가워지며 싸늘해졌다. 어제부터 따끔거려오던 목구멍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리스본의 야경은 놓칠 수가 없다. 택시를 타고 상 조르주 성으로 향했다. 찬바람에 온몸을 움츠리고 성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성 주변은 적막했다. 성 입장료가 싸지 않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물가에 비해서 성당이나 공원, 미술관 등의 입장료가 비싸다는 것이다. 관광수입이 그들의 큰 수익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일 거다. 야경을 보기 위해 이런 돈을 지불해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여행은 지갑을 열고 닫을 때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언제 이곳에 와 보겠냐는 생각으로 입장료를 내고 성으로 들어갔다.
정말 그랬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리스본의 야경은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하늘은 아직 태양의 잔열을 머금은 채 부드러운 회색빛을 띄고 있었고, 그 아래엔 고요한 바다와 나지막하고 오래된 리스본의 건물들이 따뜻한 붉은 조명을 반짝이며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었다. 리스본의 새로운 풍경이었다. 우리는 서로 말을 잊지 못한 채 가만히 불빛 속에 아름답게 빛나는 리스본을 바라보았다. 인생에 오래오래 남을 하나의 장면을 잊지 않고 싶어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 아름다운 리스본을 다시 꼭 와야겠다는 다짐이 리스본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을 위로했다. 리스본에서의 시간들이 옛날 영화의 낡은 필름처럼 찰칵찰칵 내 머릿속에서 돌아간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이 여행을 계획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을 순간답게 몰입할 수 있는 기쁨이 여행을 꿈꾸게 하는 힘이다. 아쉬운 리스본의 시간들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