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여행 1
앙코르왓 여행은 내게 숙제 같은 것이었다. 엄마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앙코르왓이라 했고 여든이 훌쩍 넘은 아빠는 동남아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동남아 중 비교적 고난도 여행지라는 캄보디아를 나이 드신 부모님과 함께 하자니 패키지여행의 선택이 옳은 듯했다. 오늘이 제일 건강한 날이라는 엄마, 아빠를 생각하면 서둘러 여행 일정을 잡아야 했다.
여행상품은 베트남 하롱베이를 이틀 관광하고 캄보디아로 움직이는 코스였다. 캄보디아로 들어가는 직행 비행기가 없으니 베트남을 경유하면서 그곳 관광을 곁들이는 듯했다. 자유여행이었다면 비행기 티켓 구입을 시작으로, 숙소며 교통수단, 각종 유적지 예약으로 바빴을 텐데 패키지여행은 그저 경비를 완납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손쉽게 진행되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베트남 항공기가 하노이에 도착하자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 가족 외에 열두 명의 여행 동행이 더 있었는데 조합도 다양했다. 여고 동창 중년 모임도 있었고, 중년의 부부, 혼자 온 팔십 대 할아버지도 있었다. 여행을 오게 된 사연들이야 다양하겠지만 일단 공동운명체가 된 우리는 한 버스를 타고 6일 동안 함께 즐거운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은 일치했다.
가이드는 제 소개를 시작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했다. 패키지여행의 좋은 점은 현지 가이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점이라 생각하기에 그의 설명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보다 삼십 년 정도 더 뒤진 수준이며 지금은 비교적 값싼 노동력이 경쟁력이 되어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고 했다. 초반부 설명을 들을 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듣고 있었는데 점점 이야기는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가이드는 여행객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단 자신의 신변잡기를 쏟아내는 수준이었고 급기야 베트남의 상류층 유흥문화를 소개하는 이야기까지 흘러갔다. 다른 이들도 대놓고 불평은 못했지만 들떴던 여행의 분위기는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여행에는 몇 차례 쇼핑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가이드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쇼핑 목록 중 하나인 '침향'에 대해 설명했다. 침향이 향기 나는 목침인가 생각했는데 오래된 나무에서 채취한 비싼 건강식품이란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여행이 마치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건강식품을 사러 온 쇼핑 여행처럼 취급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일행 중 아무도 비싼 침향을 구입하지 않자 가이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표현했다. 한국에서라면 부당한 일에 어떤 방법으로든 대응했을 텐데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이드에게 대놓고 불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안내로 바라본 베트남은 그저 낙후되고 조악한 삼류 관광지밖에 되지 않았다. 되도록 그와는 거리를 유지한 채 하롱베이의 절경을 감상했다. 은근히 별도 팁을 요구하는 그를 무시하고 떠나는 날엔 죄 없는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정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캄보디아는 달랐다. 앙코르왓이 있는 씨엠렙 공항에 내리자 뜨거운 열대우림의 열기가 우리의 위치를 실감 나게 했다. 반갑게 맞아준 가이드는 오십 대 후반의 단정한 여성분이었다. 십 년 넘게 씨엠립에서 살고 있다는 가이드는 캄보디아의 열악한 경제사정과 불행한 역사를 이야기하였지만, 그의 이야기엔 캄보디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한국 교회나 여러 구호단체에서 캄보디아 사람들을 도우려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그 역시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했다. 가이드는 캄보디아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얼마나 삶에 대한 긍정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가족과 이웃을 얼마나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이야기했다. 가이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캄보디아는 불우하지만 함께 나누고 싶은 나라였다.
가이드는 38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 지치지 않도록 미리 호텔 에어컨을 켜서 준비해 주기도 했고 적절한 타임에 시원한 물을 제공해 가며 부족한 것이 없도록 세심히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부모님의 컨디션을 살뜰히 물어봐 주는 마음도 고마웠고 앙코르왓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도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 귀에 쏙 들어왔다. 물론 쇼핑에 대한 부담은 캄보디아에서도 있었지만 우리가 사지 않는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실망을 표현하는 일은 없었다.
베트남 가이드와 캄보디아 가이드의 태도가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환경은 캄보디아가 더 열악했지만 가이드의 따뜻한 태도는 훨씬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했다. 개인마다 역량은 다를 수 있지만 안내하는 나라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의 마음은 가이드가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베트남에서 돈을 벌고자 하지만 그 나라를 하대하며 잇속만 챙기려는 사람과 캄보디아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함께 도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삶이 차례로 내 마음속을 스쳐갔다. 전자는 사업의 실패로 돈을 다시 쫓아가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낯선 환경에서도 나누는 기쁨을 알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현재 네 명의 캄보디아 자녀를 입양해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긴 것은 하롱베이의 절경도 아니고 앙코르왓의 놀라운 건축물도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환경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잘 차려입고 멋진 선글라스를 썼던 베트남 가이드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호텔 일회용 칫솔이나 남는 생활품을 남겨주면 부족한 아이들에게 감사히 나누어주겠다고 말하던 캄보디아 가이드는 마음에 기쁜 씨앗으로 남는다. 벌써 마음은 다시 방문하고 싶은 캄보디아로 향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 다른 스펙트럼을 통과하게 된다. 캄보디아 가이드의 시선으로 보니 캄보디아 친구들이 나의 이웃 같은 마음이 들어 그들을 어떻게 도울까 생각하게 한다. 맨발로 환한 미소를 띠며 기념품을 팔던 아이들. 어깨 안마를 해주며 일 달러를 받아 가던 활짝 웃는 소년의 얼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처음엔 숙제 같았던 여행이었지만, 불편함도 있었지만, 예기치 않았던 소중한 답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역시 여행은 잊지 않고 내게 선물 하나를 안겨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