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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Feb 02. 2023

오늘도 한발 한발 최선을 다해 걸어가기


 아침 산책은 나의 유일한 운동이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큰길을 건너고 성당을 들러 잠깐의 묵상을 한 후, 이어진 오솔길을 걸어 금련산 한 바퀴를 걷고 오면 딱 한 시간 정도의 적당한 산책코스가 된다. 집 앞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침의 건강한 에너지를 다 끌어오는 기분이 된다. 요 며칠 날씨가 추워지면서 주저 없이 나가던 발걸음이 주춤해졌다. 옷을 더 두껍게 입으려니 몸은 무거워지고 찬바람에 금세 얼어버릴 발가락을 생각하니 그냥 이불속에 더 머무르고 싶은 유혹에 몸이 늘어진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이불속에서 웅크려있는데 문득 어제 본 9시 뉴스가 생각났다. 한국 최초 무보급 단독 남극 원정 여성 탐험가라고 긴 수식어로 소개된 김영미 대장의 인터뷰였다. 그 긴 단어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하나씩 곱씹어 봤다. '한국최초'. '무보급', '남극', '단독 원정', '여성', '탐험가'. 어느 하나 가벼운 단어가 아니다. 그 대단한 걸 해낸 위인이 산뜻한 아나운서 앞에 앉아 수줍게 웃고 있는 동네 이웃 같은 사람이라니, 나는 온 감각을 다해 그 방송에 빠져들었다.


 방송에서는 김영미 대장이 남극에서 찍어온 동영상이 잠깐씩 소개되고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온통 눈으로 뒤덮인 땅을 김영미 대장은 두꺼운 옷과 고글로 무장을 한 채 스키를 신고 혼자 100킬로가 되는 짐을 끌어가며 이동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이지만 눈보라가 시야를 가리는 듯했는데 김영미 대장은 그 정도면 산들바람이라고 표현하며 웃었다. 제대로의 남극 눈보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밤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서 홀로 끝없는 눈길을 걸어가는 기분을 상상했다. 그 길을 51일 동안 혼자 걸어간다는 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남극 원정의 뉴스에서 내가 가장 크게 꽂힌 단어는 '단독 원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 박영석, 허영호 대장이 원정대를 꾸려서 남극 완정을 한 적은 있지만 단독으로 간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단독으로 남극을 간다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51일간의 고요하고 외로운 시간을 김영미 대장은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아나운서가 질문했다. 사람들이 남극에서 혼자 있는 것이 외롭지 않냐고 물을 때 서울이 더 외롭다고 했는데 그 의미가 어떤 것인가.


 김영미 대장은 그 답을 꿈으로 말한다. 꿈은 도망가지 않는데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나 자신이라고. 그 꿈을 지키는 것이 힘들고 외로운 일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감히 짐작하건대 김영미 대장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림 속에 있었던 서울보다 꿈을 향해 사력을 다하는 남극에서 스스로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도시에서의 여러 관심과 걱정, 그리고 일상생활과 욕망들은 꿈을 희미하게 만들지만 남극에서는 오직 주어진 자연에 대응할 뿐 꿈에 대한 열망은 어느 때보다 더 또렷하고 맑게 반짝이지 않았을까.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그 성취를 해 낸 여성이 우리 눈앞에 있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기적처럼 감사하게 느껴진다. 다만 김영미 대장의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저녁 뉴스의 인터뷰 시간은 너무 초라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는 계속 그 뒷이야기를 상상했다. 추운 침낭 속에 안대를 끼고 누워 생각했을 그 날카롭게 맑은 정신들을 나도 경험해 보고 싶다고 열망했다.


 1,185km의 빙판을 51일 동안 혼자 고군분투했던 그날들에 대해서 김영미 대장은 매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그다음 말이 중요하다.

"그래도 매일 살아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은 내가 꿈꾸었던 일을 내 의지로 해내는 그 순간이 아닐까. 누군가에 의해 꺾이지 않고 스스로 나 자신을 곧추세울 수 있는 그 순간 김영미 대장은 살아있다고 표현한 것일 게다. 내 의지로 하려고 했으나 상황에 의해서 혹은 내 마음이 옅어져서 구름처럼 사라진 일은 얼마나 많았을까. 매해 나 자신을 돌아보면 하고 싶었던 일을 해낸 것보다는 이런저런 상황으로 이 정도까지라도 해낸 나 자신을 위로해 주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스스로를 세우고 격려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에는 솔직하지 못한 변명과 게으름과 그리고 타협이 분명히 존재한다. 내 꿈을 더 명확히 밝히는 일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지 않는 일임을 김영미 대장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스스로를 지키고 세울 줄 아는 김영미 대장은 참으로 대장이다.


 집을 나서니 아침의 찬 공기가 역시 매섭다. 날카롭게 불어 뺨을 얼얼하게 만드는 칼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김영미 대장도 그랬을까. 다시 한번 남극을 떠올리며 김영미 대장이 들었다면 코웃음 쳤을 부산 바람과 남극 바람을 비교해 본다. 그녀의 한 발짝에 비하면 내 한 발짝은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은 한 발짝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준 용기는 쉽게 잊히지 않고 나를 계속 걷게 만든다. 오늘 아침 읽은 그녀의 SNS 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도 한발 한발 최선을 다해 걸어가기"

그녀가 남극을 완주한 하루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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