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기운이 흐르는 토요일 오전이었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었다. 주말을 맞는 마음이 부산스럽다. 빨래 건조대를 닦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였다. 엄마의 음성 뒤로 지하철의 웅웅 거리는 배경소음이 들려왔다. 엄마의 목소리는 낮고 정확했다. 엄마의 주거래은행인 동네 신협의 주주총회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말이 주주총회이지 주주총회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주주들에게 선심 쓰듯 나누어 주는 주총 선물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 내게도 얼마 전 우편으로 주총 알림 공지가 온 것이 기억났다. 나지막한 정보를 교신하듯 엄마는 내게도 얼른 벡스코 전시장으로 선물을 받으러 오라고 했다.
"이번 선물이 뭔데?"
"냄비세트래."
"에구, 그런 냄비세트 받아서 뭐 하려고. 집에 널린 게 냄비에다 쓸데없는 냄비 받아다가 쓰레기밖에 더 되겠어? 다 지구를 죽이는 일이지 뭐."
"아냐, 쓸 만할 거야. 지난해 것도 괜찮더라."
나는 혹시라도 가게 되면 전화하겠다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세탁기는 잔여 시간이 십사 분이 남았다고 깜빡거리고 있었다. 빨래도 널고 점심 준비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엄마, 아빠가 무거운 냄비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걸어올 그림이 그려졌다. 무거울 텐데 그게 뭐라고 낑낑대며 들고 올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자동차 키를 들고 나섰다. 벡스코까지 평소엔 십오 분밖에 안 걸릴 거리인데 차가 막히는지 30분이 소요된다고 티맵은 안내했다. 역시나 벡스코 주변에는 차들이 주차장처럼 깔려 거북이 등딱지처럼 모두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벡스코 주차장은 아예 진입로를 막아두었고 한참 멀리 제2전시장으로 돌아가면 주차 공간이 있다고 경찰들이 안내하고 있었다. 겨우 몇 번 유턴을 받고 요리조리 끼어 들어서 제2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딸이 온 것을 반색하며 엄마는 이미 선물을 받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기쁘게 말했다. 조심히 찾아오라며 3층에 있겠다고 말하는데 그 3층이 어디인지 모른 채 전화를 끊었다.
벡스코 제2전시장에서 주주총회가 열리는 벡스코 오디토리움은 넓은 전시장의 양쪽 끝에 위치해 있어 긴 구름다리를 타고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십여 분 정도가 걸리는 것 같았다. 여러 전시장에는 키즈페어도 열리고 알 수 없는 행사들이 진행 중이라 혼잡했다. 뛰듯이 걸어 오디토리움이라고 안내된 곳에 도달했다. 예상대로 큰 강당에서 주총이 열리고 있었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3층이란 곳을 올라가 보았지만 텅 빈 사무실뿐이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주총 선물을 주는 곳 3층이라는 것 외엔 엄마의 위치를 잘 알지 못했다. 단지 딸이 근처에서 뱅뱅 돌고 있는 게 답답한지 주총 입구로 가서 등록을 먼저 해보라고 했다. 선물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며 목소리는 조금 더 다급하고 높아져 있었다.
다시 입구로 돌아가 근처에 있는 행사 요원을 찾았다. 관계자인 듯한 남자가 양복을 잘 차려입고 안내하고 있었다. 주총 선물 수량이 모자라 증정이 이미 끝났으니 다음 주 신협 은행으로 오면 선물을 드리겠다고 그냥 돌아가라고 말했다. 늦었구나 싶었지만 오히려 무거운 걸 안 가져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시원했다. 엄마, 아빠를 태우고 얼른 빠져나가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엄마는 무슨 소리냐며 엄마의 눈앞에서 사람들이 선물 교환권을 받고 있는데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며 언성을 높였다. 아까의 엄마 목소리가 도 레 미 파 솔의 "미" 정도였다면 이제 "솔"의 음역에 다다라 있었다. 내 짜증도 함께 올라갔다. 다시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툭 끊어버리고 다시 자세히 안내문을 살폈다.
"아뿔싸!"
여기는 우리 동네가 아닌 옆 동네 신협 주총이었다. 허둥대는 마음으로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주주총회만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급히 빠져나와 우리 동네 신협 주총 회장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남천 신협 주총 회장이라는 안내표시가 보였다. 엄마의 말대로 선물은 이미 동이 나고 선물 교환권을 배부하고 있었다. 대단히 중요한 사무를 보는 것처럼 신분을 확인하고 교환증을 손에 쥐었다.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다. 엄마를 찾으러 3층으로 올라갔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딸이 어디서 헤매는지를 답답해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아까의 전화 목소리만큼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왜 여기를 못 찾고 엉뚱한 곳에서 헤맸냐며 원망이 가득한 눈길을 보낸다. 나도 엄마와 언성 높여가며 손에 쥔 냄비 교환권과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엄마에게 짜증을 냈다.
"엄마는 내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찾아올 텐데 왜 자꾸 안달을 하고 그래?"
"아니, 네가 선물 못 받는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엄마는 눈을 흘기며 말한다. 멀찌감치 냄비 세트 두 개를 옆에 두고 우리를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한 손에 냄비 세트 하나씩을 들고 터덜터덜 전시장을 걸어 나왔다. 여기서 다시 주차장이 있는 제2전시장까지 가려면 한참이다. 엄마, 아빠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려면 십오 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엄마가 들고 있던 냄비세트를 냉큼 받아 들었다. 묵직하다. 박스에 그려져 있는 냄비 사진을 보니 그저 마트에서 파는 행사용품 냄비일 뿐인데 이게 뭐라고 우린 화창한 토요일 오전에 이리 법석을 떨었을까 싶어 쓴웃음이 난다.
엄마는 주차한 곳이 이렇게 멀었냐며 말이 유순해진다. 바쁜 걸음으로 뛰어왔을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아빠는 우린 매번 이렇게 지하철 타고 와서 여길 잘 알지만 수진이는 이번이 처음이니 잘 못 찾아오는 게 당연하다며 조곤조곤 딸을 두둔해 준다. 나는 냄비 하나씩을 들고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나란히 걸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웃기고도 애잔해 괜히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 전화 목소리에 짜증이 나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갔던 때와는 다른 온도의 마음이다. 딸이 헤맬까 봐 그리고 냄비를 못 받게 될까 봐 전전긍긍 초조해했을 엄마의 마음이 내 마음처럼 와닿는다.
엄마는 늘 그랬다. 엄마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 과해져서 그게 우리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도 했고 그게 순조롭지 않을 땐 화를 내며 우릴 재촉했었다. 그때마다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 나는 왜 이런 엄마가 아련해지는 것일까. 거기에 우리 모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슬쩍 딸을 두둔해 주는 아빠의 무심한 한마디까지 우리 세 명의 긴 세월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주차장까지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할 우리 세 사람의 발걸음이 우리에게 남겨진 세월이지 않을까 싶어 걸음을 더 늦추게 된다. 오르락내리락했던 우리의 감정을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투명하게 다 아는, 싸구려 냄비를 함께 손에 든 동지의 마음이 된다.
엄마가 말했다.
"저녁에 이서방이랑 애들 데리고 집에 와. 이 냄비에다 맛있는 오곡밥이랑 나물 해 놓을게. 내일이 대보름이쟎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늘 그 마음의 자세에서 노심초사 딸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