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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Jul 19. 2024

애도와 휴식

영화 <퍼펙트데이즈>


  향년 87세.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투병 기간은 3년 남짓, 요양원에 들어가신지 한 달 만에 세상과 이별했다. 구순에 가까운 나이니 누가 봐도 호상이라는 단어로 죽음이 표현될지 모르겠다. 죽음에 호상이라는 말은 누구를 위한 말이었을까. 노부모를 모시기 힘든 자식의 입장에서인지 늙음을 온몸으로 느꼈을 죽은 이를 위한 말이었을지 알 수는 없다. 죽음을 앞에 두고 좋은 일이니 나쁜 일이니를 운운하는 것마저도 인간의 몫이 아닐지 모르겠다. 영정으로 쓴 젊을 적 사진을 바라보며 향을 피웠다. 큰 아버지의 긴 인생이 향을 타고 날아간다. 어느 누구의 인생도 죽음 앞에 가벼울 수가 없다. 목울대 어디서부터 인지 꽉 막힌 애도가 올라와 잠시 숨을 멈춘다. 큰 아버지와의 속 깊은 정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 죽어서야 쉴 수 있다는 말이 슬픔을 몰고 왔다.



  큰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농부로 평생을 살아왔다. 집안이 가난하니 중학교로 진학하는 일보다 바쁜 일손을 돕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두 살 아래 동생은 어떻게든 학교로 보내어졌지만 한 번 학교를 벗어난 큰 아버지의 삶은 논과 밭을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자라면서 본 큰 아버지는 까만 피부에 깡마르고 등이 살짝 굽은 채로 부지런히 몸을 놀리는 모습이었다. 매 때 고봉밥을 드시면서 왜 저리 말랐을까를 염려하던 어린 마음이 떠오른다. 농부의 고단한 삶을 알지 못했다. 큰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 때 우리는 집을 떠나 요양원에 가시기를 입 모아 종용했다. 간병하는 큰 어머니, 자식들의 수고와 조절되지 않는 통증 때문이었다. 가기 싫어하던 눈빛과 거절할 수 없는 마음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감정이 잡힐 듯 생생했다. 오래된 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나뭇잎과 쨍한 하늘과 쪽기와의 풍경이 서럽게도 아름다운 오후였다.



애도의 마음은 곧 잊혀지고 산사람은 산대로 죽은 사람은 죽은 대로 삶은 이어진다. 큰 아버지를 다시 떠올린 건 일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 씨 덕분이었다. 중년의 히라야마 씨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향해 미소 지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만드는 퍼펙트 데이의 중요한 포인트다. 매일 아침 똑같이 비추는 햇살에도 마치 세상을 처음 만나는 아기의 시선처럼 바라본다. 완벽한 하루를 만들기 위한 의식처럼 그의 몸 안에는 따스한 햇살의 기운과 아름다운 음악과 달콤한 커피 향이 채워진다. 충만한 에너지로 매일 아침 출근하는 그의 근무지는 도쿄의 공중화장실이다. "Tokyo Toilette"이라고 적힌 파란 점프 수트를 입고 오전, 오후 공중 화장실을 돌며 청소를 한다. 그의 노동은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 신성하게 열성을 다해 이루어진다.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아 또다시 큰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며 미소 짓는다. 그가 보낼 노동의 오후에 동력을 주는 에너지다. 노동과 휴식의 동작이 잘 짜인 뮤지컬 리듬 같다. 



  영화는 지겨울 만큼 그의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준다. 매일 비슷한 날씨에 어제와 같은 미소로 하루를 시작하고 어김없이 더러워져 있는 변기를 닦는다. 작은 변화도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화장실 문을 여니 엄마를 잃은 꼬마가 울고 있다. 아이를 달래 손을 잡고 주변을 서성이는데 마침 엄마가 당황한 모습으로 달려왔다. 혼자 가버린 아이를 꾸짖는 엄마의 표정은 청소 아저씨의 손을 잡은 아이가 더 불편해 어쩔 줄 모른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아이 손을 닦아주며 급히 떠나는 두 사람을 히라야마 씨는 감정 없이 바라볼 뿐이다. 엄마를 따라가며 뒤돌아 손 흔들어주는 아이를 보며 히라야마 씨는 다시 그 천진한 미소로 화답한다. 잠시 일던 마음의 폭풍에 다시 평화가 깃든다. 



  영화를 보면서 장자의 빈배 이야기를 떠올렸다. 물 위에서 표류하던 배가 우리의 배에 부딪혔는데 그 배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면, 그저 그렇구나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에 누군가가 배에 타고 있었다면 그에게 거칠게 항의하거나 욕설을 퍼부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갈등은 의도적 감정적 자아의 차원에서 일어난다. 감정이 동요되는 단계의 이면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상대의 공격도 나의 불편함도 빈 배가 유유히 흘러가듯 무심히 내 삶을 지켜낸다.  일상에 쓸모없는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은 채 온전한 나의 하루를 이루는 비결이다. 히라야마 씨가 만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관찰하듯 바라본 후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고요하지만 단단한 장자의 정신이 그에게 숨겨져 있다. 



  시골의 큰 아버지가 쉴 새 없는 농사일 중에서 그에게 위로가 된 일상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새벽녘부터 시작되었을 노동 중간에 잠시 쉴라 바닥에 주저앉으면 고향 산천의 아름다운 산세와 새소리,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이 큰 아버지에게도 기쁨이었을까. 부지런히 여물을 끓여 키운 소가 착한 눈망울로 얼굴을 들이밀 때 그는 위로를 받았을까. 땅을 돌아보고 동물을 살피는 일이 장자가 말하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지어주던 큰 아버지의 활짝 웃던 모습은 시골의 깨끗한 하늘빛과 닮아 있었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고단함과 숭고함을 모두 아는 눈빛이다. 말이 아닌 행동과 미소가 마음에 남는다.



  주인공 히라야마 씨는 말이 없다. 혼자 살면서 혼자 청소하고 혼자 밥을 먹는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엔 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영화를 보면서 깨닫는다. 평범한 일상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지닌 관찰 퍼즐 조각으로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말이 아닌 행동이 우리를 규정한다.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 햇살에 감응하고 옛 팝송을 흥얼거리며 출근하는 사람. 감독하는 이 아무도 없지만 맡은 화장실 청소를 윤이 나도록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 누군가 자신의 일상에 돌멩이를 던져도 이내 아무 일도 아닌 듯 자신의 고요를 되찾는 사람. 누군가에게 티 나지 않은 작은 선의의 마음을 내주는 사람. 그리고 잠들기 전 좋아하는 문고판 책을 읽으며 마음을 넓혀가는 사람. 



  나는 어떤 일상으로 나를 만들어 갈까를 떠올린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일에 늘 휘청댄다. 기대했던 나의 하루는 내 의지와는 다르게 타인에 의해 환경에 의해 다른 변주가 시작된다. 타인과의 교감으로 변주는 더 풍성해질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갈등과 분노로 듣기 괴로운 소음으로 변질할 수도 있다. 히라야마 씨가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기쁨을 느끼듯 일상의 연주에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과 중에도 나다울 수 있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나를 잃지 않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햇살에 감응하고 사랑하는 이의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면 장자의 빈 배처럼 우리 마음도 가벼워지지 않을까. 내 마음을 빈 배처럼 만들어줄 마법의 주문을 쌓아둔다면 두려울 게 없다. 



  큰아버지는 시골집 가까운 선산에 고운 가루로 묻히셨다. 무거웠던 몸을 내려놓고 팔랑팔랑 나비가 된 영혼이 마을을 이리저리 여행하듯 유랑하고 있을 것이다. 한평생 일궜던 땅과 낡은 집을 오가며 긴 삶을 돌아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에게 햇살 같은 안식이 이제 시작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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