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 영화
이사를 하며 책을 정리했다. 책을 버리는 노동은 육체적인 수고와 함께 번뇌도 데리고 왔다. 그동안 쌓이기만 했던 책들은 내 마음의 역사이기도 했다. 책 제목을 따라가다 보면 내 마음이 어느 수원에서 시작되어 여러 갈래 줄기를 따라 흐르다가 이런 호수도 만나게 되었구나를 알게 된다. 어느 노작가의 말처럼 서가는 살아 움직이는 거라더니 먼지 쌓인 책들은 뱀 허물처럼 영혼의 흔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읽는 시', '지혜로운 엄마 되기 '등의 육아 서적에서부터 세상 곳곳을 책으로 누빌 수 있는 여행 안내서, 삶의 고달픔을 토로하는 이름 모를 작가들의 에세이, 그리고 시집과 대중소설들. 아이가 커서도 버리지 못한 아름다운 그림책들도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책들을 고르던 시절의 기억이 책갈피처럼 꽂혀 있어 책을 정리하는 시간은 자꾸 늘어졌다. 책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에는 책과 함께 한 추억이 사라지는 두려움이 스며들어 있다.
단출해진 책장을 가지고 이사를 오면서 다시 책장을 빼곡히 채우지 않겠다 생각했다. 웬만하면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구입한 책은 다시 누군가를 위해 넘겨줘야지 다짐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방에는 나날이 쌓이는 먼지와 함께 새로운 영혼이 다시 자리 잡는 중이다. 보이는 책마다 누군가에게 주지 못하는, 꼭 사서 간직해야 하는 이유의 꼬리표를 달고서 재독을 기다린다. 책장을 가볍게 한다는 계획은 역시 지키지 못할 다짐이었나 보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으로 알려진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대단한 애서가였다. 집에서 보관한 책이 오만 권에 가까웠다고 하니 웬만한 도서관 규모다. 그가 살았던 밀라노 시에서 집이 무너질까 주의를 줬다고 할 정도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이라는 다큐 영화에는 작가의 책에 대한 사랑과 그가 아낀 도서관이 소개된다. 희귀본 천오백 권을 포함한 그가 소장한 장서는 역사, 천문학, 철학, 의학, 화학, 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져 있다. 기호학자로서, 작가로서 가진 호기심의 분야가 놀랍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위대한 작가의 독서력이 책 구절마다 빛을 발한다. 무언가에 호기심을 갖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다양한 관심의 레이더가 펼쳐지는 건 역시 독서가 주는 즐거움이자 괴로움이기도 하다.
에코의 아름다운 서재는 그의 기준에 따라 분류별로 정리가 되어 있다고 한다. 수 만권의 책의 위치를 작가는 기억하고 찾아낼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끊임없이 책을 찾아보기도 했거니와 그의 궁금증을 따라 이어지는 작가의 지적욕구가 만드는 길과 일치하기 때문일 거라 짐작한다. 물론 그 많은 책들 중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도 많은데 작가는 이 책들이야말로 지식의 잠재성을 지닌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읽지 않은 책을 상상하는 시간 역시 애독가의 또 다른 기쁨이다. 읽은 책들이 작가의 방대한 지식과 교양의 뿌리가 되어주었다면 읽지 않은 책은 그가 나아가고 싶어 하는 생각의 방향과 상상의 가지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아름다운 도서관에 감탄하면서도 한켠에는 이 영상을 아이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침 묻힌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독서하는 모습보다는 스마트 기기의 글과 그림이 더 익숙한 이들에게 아름다운 도서관은 그저 보기 좋은 유물로만 느껴지는 건 아닐까. 무겁고 때 묻은 오래된 책을 보는 일마저도 이제 잘 볼 수 없는 장면이 되겠구나 싶다. 움베르토 에코는 디지털 시대에서 넘치는 정보는 지식이 될 수 없음을 꼬집어 말한다. 방대한 문헌 몇백 권을 온라인으로 검색하는 것보다 두세 권의 책을 찾아 읽고 자료를 필터링하는 일이 인간에게 필요한 지식과 사고라는 주장이다. 오래된 책장을 넘기며 그 시대 저자의 사고와 그 책을 읽었을 또 누군가의 영혼과 어디쯤에서 만나는 상상을 하는 일. 그것이 느린 독서와 사유의 기쁨이 아닐까.
여행을 가면 그곳의 도서관을 방문한다. 호주 멜버른의 주립 도서관은 여러 면에서 내 마음을 흔들었다. 겉에서 보면 유명한 박물관인가 싶은 오래된 건물에 커다란 돔 형태 지붕을 덮고 있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사람의 발길이 가장 많은 시내 중심가에 아름다운 도서관이 위치해 있다는 것도 놀랍다. 도서관 앞 작은 광장에는 길거리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자유 발언을 하는 시민들의 무리도 쉽게 볼 수 있다. 도서관 내부의 천장 높은 열람실과 우아한 장식들은 마치 중세 시대 학자가 된 기분이 되어 오래 머물며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작지만 인기 있는 도서관 카페테리아는 멜버른 시민들의 친숙한 만남의 장소다. 도서관이 자연스럽게 일상과 맞닿아 있는 모습이 부러워 질투가 난다.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 도서관이라면 일상에 지친 영혼에 책의 위로가 자연스레 얹어지지 않을까.
움베르토 에코의 서재처럼 대단한 서고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고 내 일상의 도처에 자연스럽게 책이 놓여 있기를 바란다. 잠시 친구를 기다리는 그 짬에 도서관이 훌륭한 기다림의 장소가 되고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는 일이 모두의 가벼운 일상이 되면 좋겠다. 오래전 누군가의 영혼을 울렸던 글이 현대의 외로운 이들에게도 심금을 울리게 하여 그 마음을 젊은 세대들과도 나누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상상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손쉽게 닿는 책으로부터 시작되면 좋겠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고 이 숙제를 풀어나가는 이들의 생각은 모두 제각각이다. 책으로 함께 사고하고 대화한 이들이라면 좀 더 상식적이고 지혜롭게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내지 않을까. 새해 아침 먼지 쌓인 책을 보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