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읽고
"소라색 옷으로 준비하시면 되겠네요."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산부인과에서 들은 말이었다. 아기가 아들임을 넌지시 알려주는 그들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신생아 아기 용품점에 가면 딸을 위한 핑크색, 아들을 위한 하늘색, 그리고 성별을 미처 알지 못한 아가들을 위한 회색 정도의 옷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게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들을 위해 성별 구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주입한 성에 대한 구별 인식이 나에게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고른 남자아이용 장난감과 책, 이불 등등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나를 직시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란 책을 우연히 들춰 보았을 때 언뜻 목차를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책을 왜 더 빨리 알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의 마음이 일어났다. 이 책은 우리가 생활 속에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을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이끌어 내는 책이었다. 이 책의 부제는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이다.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라는 작가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페미니즘에 관련된 강의나 책을 쓴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녀가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은 치잘룸 아다오라라는 예쁜 딸을 낳은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 때문이었다.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친구가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된 딸아이를 보면서 강인한 페미니스트로 키우고 싶은데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며 편지를 보냈다.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했던 작가도 그 질문에 무겁고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열다섯 통의 편지로 답한다.
그녀는 먼저 친구에게 예쁜 생명을 탄생시킨 것은 축하한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될 만큼 대단한 일을 한 것임을 알린다. 그런 그녀에게 작가는 두 개의 페미니즘적 도구를 제시한다. 하나는 "나는 중요하다." '~하다면 중요하다.'가 아니라 나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전제이다. 두 번째는 하나의 질문, **을 반대로 뒤집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이다. 여자에게 주어지는 태도나 판단이 반대로 남자일 경우에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지를 되묻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러운 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명쾌하다.
그녀가 보낸 첫 번째 편지는 감동적이다. 친구에게 스스로 엄마라는 말로 자신을 정의하지 말고 충만한 사람이 되기를 조언한다. 일하는 엄마라서, 혹은 전통적인 엄마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자책하지 말며 스스로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 신뢰하고 충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집안과 육아를 모두 떠안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더 실질적인 제안은 세 번째 편지 "성 역할"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온다. 아이들에게 성 역할이라는 구속복을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 저지른 엄마들의 실수인 남자, 여자아이의 장난감을 구분한다던가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가 여자답다, 남자답다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들 개개인의 장단점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그들 내면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 페미니즘"의 위험성에 대한 항목도 인상적이다. 여성평등을 주장하면서 단서를 거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머리고 여자는 목이다."라고 표현한다던가, "여자에게 잘해 줘야 한다"라고 말한다던가, 혹은 남편의 허락 아래 **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남성 우월에서 말하는 잘못된 페미니즘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의 표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무심코 사용하는 말 중에 여자아이에게 공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연약한 여성을 의미하는 뉘앙스가 있다. 강간 사건에 있어서도 남자들은 '내 딸이나 아내나 여동생이었다면...'이라고 말하며 특별한 종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보인다. 종종 여성들을 숭배한다던가 하는 말로 과한 옹호의 표현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것 역시 그저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시각으로 '위하는 척'하는 태도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편지는 외모에 대해 신중하게 이야기하라고 조언한다. 여자아이가 화장을 하거나 짧은 치마를 입거나 하는 일에 그들이 원한다면 할 수 있게 하라고 한다. 단지 외모와 도덕성을 연결해서 부도덕해 보인다는 이유로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던가 몸에 꽉 죄어서 건강에 좋지 않은 이유가 반대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항목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을 부끄럽게 한 항목은 "호감형 되기를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이었다. 아이가 해야 할 것은 다른 이에게 호감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비추어 본다면 나는 꾸준히 어른들에게 혹은 또래 친구들에게 다정하고 호감 가는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게다가 내 아이도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착하고 호감 가는 아이가 되도록 아이를 단도리하는 일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엄마의 바람 아래 아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보다는 주변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는 아이에게 용감한 사람이 되어 자기 의견을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이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아무도 내게 호감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너의 편이 되어줄 것이며 네가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면 솔직하게 그 불편함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근의 많은 사건들을 돌이켜본다면 피해자들이 극심한 피해를 당하고도 자신의 괴로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숨기거나 자책하는 일로 이어지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우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 스스로의 편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었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동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다. 특별한 대우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네가 중요한 것만큼 나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것, 그리고 여성이기에, 남성이기에 당연히 그러하다는 편견을 버려달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멀리 나이지리아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생활한 그녀의 경험과 나의 것은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으면서 내게도 이런 조언을 해 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여성으로서 좀 더 유연하고 당당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떠올려 보았다.
100페이지 남짓한 작고 가벼운 책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딸을 가진 엄마뿐 아니라 아들을 키우는 엄마, 아빠, 그리고 엄마 자신을 위해서 읽어야 할 기본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몰라서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