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의 <붕대감기>를 읽고
누군가 페미니즘을 말하며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역경을 외칠 때 반대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따뜻함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일이 있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삶이란 건 원래 고난과 함께 하는 거라는 생각과 함께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함께 느꼈던 연대감과 자매애에 대한 기억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숨겨둔 힘 같은 것이었다.
남자 형제의 정과는 다른 언니와의 끈끈한 교감, 여고시절 친구들과의 질투와 애정의 연대감, 직장생활에서의 여자 선후배 간의 설명할 수 없는 연결 의식이 나의 삶에 깊게 들어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남녀평등이나 여성의 지위 등등을 논하는 주제와는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그저 우리에게 흐르는 여성의 피는 함께 하는 긴밀한 동지애를 느끼게 했다.
윤이형의 <붕대감기>는 이런 나의 생각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우리의 이야기를 끝이 없는 붕대처럼 이어간다. 맞벌이로 아이를 키우는 외로운 은정, 여고시절 친구로 만나 한 명은 전업주부로 한 명의 자신의 일을 하는 미혼의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가는 진경과 세연, 헤어디자이너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을 택했지만 동시에 페미니즘 운동 집회에 참석하는 지현, 성추행을 당하고 그에 강력 대응하고자 하는 채이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받지만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교수 경혜 등 다양한 그녀들이 등장한다.
다양한 그녀들이 각자의 언어로 말하는 그들의 생각과 행동과 사건은 내 안에 숨겨진 나를 만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우리에겐 현시대를 함께 하면서 겪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경험들이 존재하고 여기서 각자가 느끼는 생각과 고민이 많은 부분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와 내 마음을 다독여 준다.
일하는 은정은 바쁜 그녀의 회사 스케줄로 7살 아들 서균을 할머니 댁에 잠시 보낸다. 서균은 교회에서 함께 스키장을 갔다가 이유를 알지 못하는 병으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한다. 휴직을 하고 의식이 없는 아들 서균옆에서 간호하는 일상을 보내는 은정은 그녀의 고통을 함께 고민해주고 울어줄 이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는 일을 떠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도, 육아의 고단함을 함께 고민하는 동지도 없이 자신의 길을 앞만 보고 살아온 것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서균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를 물어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평소에 마음에 맞지 않아도 혹은 의미 없는 만남이란 생각이 들어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갔어야 했는지 이제 와서 고민에 빠진다.
진경과 세연은 여고시절 교련시간에 서로 붕대감기의 파트너가 된 것을 인연으로 친구가 된다. 화장을 한다는 이유로 왕따였던 세연과 예쁘고 인기 있던 부반장 진경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그들대로의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고, 각자 전업주부로 미혼의 직장여성으로 살아간다. 서로 좋아하지만 기혼, 미혼의 입장이 된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은 쉽지만은 않다. 좀 더 서로에게 솔직한 진심을 보여준다면 더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눌 수 있을 텐데 세연은 그런 관계를 맺는 방식이 서투르다. 진경은 자신이 내미는 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연과 자신이 너무 다른 방향에 서 있지 않은지 고민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관계 맺기를 시작하지만 학창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관계 맺기는 쉽지 않다. 서로 호감을 가지면서도 얼마만큼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인지 각자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다름에 대해 우린 얼마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산다고 하더라도 쉽게 풀지 못할 과제인 것 같다. 다만 우리에겐 함께 느낄 수 있는 자매애나 동지애, 그리고 따뜻함을 무기로 감싸 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소설 속의 그녀들의 나지막한 고백을 들으면서 솔직한 마음에 함께 공감되고 나 역시 숨겨둔 나약한 모습들을 누구에겐가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이 다소 무참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일지라도 그 후에 다가올 신뢰가 존재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여성들의 이야기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우리 스스로를 더 이해하게 되고 그들과 함께 하는 현재의 세상을 외롭지 않다 느끼게 해 준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흐르는 따뜻한 우정이 건강하게 표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 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P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