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은 축복이다
뭔가 바람이 휙 하고 지나갔다. 귀신을 믿었다면 누군가의 영혼이 스쳤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안 봐도 안다. 내가 등을 돌리고 있어도 뚫어지게 그 등을 바라보고 냄새를 맡으며 관심을 바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잠시 그의 따뜻한 눈에 눈 뽀뽀라도 해줄 생각에 뒤돌아보면 어느새 딴청을 피우며 사뿐히 총총 떠나버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해 좀 더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한창때의 연애,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엄마를 찾을 때... 그 이후 오랜만에 겪는 경험이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너는 나에게 좀 중요한 의미라는 메시지를 안겨주는 것 같아 나도 그 눈빛에 바로 응답하게 만든다. 그래 나에게도 너는 소중한 아이야. 이것이 나만의 착각이라고 해도 하는 수 없다. 이미 난 홀딱 그의 마음에 들어가 버렸다.
그가 우리와 가족이 된 지 어느새 2년 하고도 절반이 지나간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보름달이 둥글게 뜬 날 달이는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유난히 겁이 많아 숨바꼭질을 하던 달이는 반려묘가 처음이라 어떻게 할 줄 몰라했던 우리와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봐도 안 본 척, 먹어도 모르는 척, 있는 듯 없는 듯, 달이가 우리의 공간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그랬던 달이가 이젠 거실 카페트 한 중앙에 벌러덩 배를 보이며 누워 잔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는 그 무방비의 자세로 작은 소음에도 놀라지 않는 의연함을 보였을 때 작은 감동이 있었다. 그의 무방비의 자세가 몸으로 보여주는 가족에 대한 신뢰감이라 생각하니 인정을 받았다는 묘한 흡족함이 몰려왔다. 그것도 잠시 이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만의 생체리듬에 맞춰 거실의 중앙에 벌러덩 널브러진 포즈를 시시때때로 보여준다. 집주인과 집사의 관계 정립이 이루어진 것 같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생명을 가진 존재가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로 우리의 가슴에 들어오는 경험은 신비롭다. 길에서 마주치는 길고양이나 강아지를 만날 때면 그저 지구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 중의 하나의 의미였지만 달이가 우리의 가족이 된 이후로는 길고양이 한 마리 한 마리도 내 마음에 고유한 존재로 느껴진다. 저 아이는 꼬리가 반밖에 없는 치즈, 요 아이는 까만 장화를 신은 얼룩이, 그리고 저 눈이 유독 까맣고 얼굴엔 점 투성이인 점박이 등등 그들은 각각의 개성을 내세우며 존재를 드러낸다. 제각각 그들의 별나라에서 와서 우리는 지금 여기 아름다운 지구에서 만난 것이다.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길에 달이가 먹는 캔 하나씩을 손에 쥐고 아파트 한 바퀴를 돌다 보면 치즈, 얼룩이, 점박이, 나비들이 번갈아 가며 눈에 보인다.
"오늘은 무슨 캔을 가지고 왔냐옹~"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집고양이로 자랐다면 좀 더 은밀히 집사와 애정과 관심을 나누었을 아이들이다. 물론 그들에게 자유와 평화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물어본다면 그들은 무엇을 선택했을지 그것 또한 모를 일이다. 이들은 유유히 자신의 밥을 챙겨 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저 자신에게 할당된 음식을 받아먹었을 뿐이라는 당연한 몸짓이다. 우리는 이런 쿨하고도 은밀한 관계를 즐긴다.
달이는 어느새 나의 숨소리에 발걸음에 그리고 생활패턴에 익숙해져 간다. 글을 쓸 때면 옆 의자 위에 앉아 한 숨 눈을 붙이고, 우리가 밥을 먹으면 함께 밥을 먹는다. 놀고 싶을 땐 놀이 매트에 엎드려 엉덩이를 씰룩씰룩 거리며 깃털 막대를 흔들어달라는 유혹의 눈빛을 보낸다. 집사는 그의 눈빛을 거절할 수가 없다. 그와 나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은밀한 싸인을 교류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내가 사는 세상의 범주에 함께 존재하는 것들이 감사하고 귀하다. 우리에겐 셀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 이렇게 지구의 별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사랑한다. 오늘 아침 산책 길에 만난 푸르러진 나무들도, 제 것인 양 당당히 참치캔을 먹던 길고양이들도, 그리고 우리 집 달이도 내겐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애정하는 동지들이다. 우리가 좀 더 오래오래 함께 이 지구에서 행복하기를, 서로 좋은 기운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