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동네 한바퀴

보이지 않는 그녀의 힘은 여기서 나왔지!

by 소록소록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보고 싶은 나의 친구 O가 오늘 부산엘 오겠다고 했다. 때맞춰 날씨도 화창한 오늘, O를 만날 생각에 마음은 이스트로 부풀린 빵처럼 빵실 빵실해졌다. 평소에 O가 온다면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은 차고 넘치게 많았는데 막상 아무 생각도 없이 들뜨기만 한다. 이러니 메모가 중요한 거라고, 목록에 리스트 업하지 못하는 내 게으른 태도에 잠깐 낙담했다.


O는 나의 대학 친구이다. 대학 기숙사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O는 순정만화에서나 나옴직한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언어는 머뭇했지만 허튼 말이 없었고 간간히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으흐흐...'하고 웃는 버릇이 있었다. 외모만 보고 그녀를 호락호락하게 봐선 안된다. 그녀의 눈빛만큼 마음은 먼 곳을 꿈꾸고 있었고 그 꿈을 행동으로도 옮길 줄 아는 당찬 소녀였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당찬 인생의 절정기를 함께 했다.


기차 도착시간에 맞춰 부산역으로 갔다. 붐비는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대번에 O를 찾아냈다. 처음 만났던 그때의 O의 모습은 그 후 삼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생각하는 듯한 눈빛을 두리번거리며 날 찾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활짝 웃었다. 순간 나의 친구 O가 오랜 시간 그 모습을 지켜준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 울컥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렇게 보고 싶은 얼굴을 언젠가는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애정을 나눌 수 있다는 일일 것이다. 각자의 지난한 일상을 뒤로하고 우리는 현재의 기쁨에 충실했다. 옛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현재의 나를 버리고 과거의 우리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그 과거를 맞아들이고 싶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완벽하게 보내면 좋을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O가 가고 싶다고 말한 곳은 해운대바다도 송정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적 기억이 있는 동네를 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에겐 낯선 동네, 그녀에겐 그리웠던 동네를 찾아가게 되었다. 사하구 괴정동. 그녀가 살던 동네의 이름이었다. 몇 해전 돌아가신 O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동네가 크게 변하지 않아 골목을 두 번 정도 돌고 나서 그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젊었던 O의 아버지가 고심해서 고른 땅에 공들여 지은 집은 낡고 오래되었지만 단단해 보였다. 누군가 살고 있는 그 집을 먼발치에서 훔쳐보며 O는 그 집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함께 동네를 걸으며 O가 어릴 적 다니던 초등학교와 동네 가게들, 그리고 주변 집들을 구경하며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흉내 냈다. O의 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거주하기 편리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시고도 그 집을 누구에게 팔지 못해 한참을 빈 집으로 두고 자주 그 집을 찾으셨다고 했다. O는 두런두런 아버지에 대해 그 집과 함께한 그녀의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이렇게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아니고 무엇이 있을까 싶다. 비록 그 추억이 지금의 내 감정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겠지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있다면 뭐 조금 변질되어도 무슨 대수겠는가. O는 연세가 너무 많고 여러 합병증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족들의 애를 태우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잠시 놓아두고 아버지와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나 보았다. 좋은 기억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동네와 집이 있다는 것이 행운이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 집과의 기억은 그녀가 타지에서 생활할 때에도 크고 작은 보이지 않는 힘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살아나갈 그녀의 인생을 졸졸 따라다닐 따뜻함일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멀리서 몇 백 년 만에 똑떨어진 핼리 해성이 아니 듯, 이렇게 뚝심 있게 반복적으로 지난한 세월을 견뎌왔음을 알게 되니 어떤 삶이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 지루한 삶을 반짝반짝 닦아내는 일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그 날의 하루는 우리에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함께 부산 역사에서 반가운 재회를 하고 동네 한 바퀴 영화를 찍으며(?) 옛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잊었던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하루였다.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지금의 한 순간이 나중에 또 어떤 기쁨의 기억이 될지 기대가 된다. 친구 덕에 나 역시 사하구 괴정동이, 젊은 O의 아버지가 지은 아늑한 집이, 그리고 낡은 초등학교가 반짝반짝 내 가슴에 소중히 간직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