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친구에게서 카톡으로 사진이 날아왔다. 400킬로의 거리에 있는 친구의 소식은 언제나 반갑고 그립다. 두 장의 사진이었다. 하나는 광수 생각이라는 책 표지,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뒷장의 박광수 씨의 싸인과 그 아래 친구의 짧은 메모였다. 날짜를 보니 99년 8월 4일! 세상에 2000년대가 아닌 99년 세기말의 기록이다.
그날 우리의 기억은 이렇다. 당시 조선일보 연재만화였던 <광수생각>은 인기 절정이었다. 주인공 신뽀리는 엉뚱하면서도 창의적인 사고로 우리의 무릎을 탁 치게 하기도 그리고 아련하고 따뜻한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도 했다. 인터넷 신문이 발달했던 시기가 아니었으니 만화 때문에 조선일보를 사야 하나 하는 갈등이 생겼던 시간이었고 그때 반갑게 광수생각의 만화가 책으로 묶여 발간되었다. 친구와 나는 그 더운 여름 그의 만화책 발간 기념 전시회가 있다고 해서 달려갔던 것이다. 광수생각의 주인공 신뽀리가 들어간 다양한 소품들이 있었던 것 같고, 우리는 거기서 산도적처럼 우람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작가를 만났다. 그는 신뽀리의 손그림과 함께 매일매일 똥도 잘 싸고 웃으며 살라는 메시지가 담긴 명랑한 싸인을 안겨주었다.
친구가 이런 사진을 보낸 건 우연히 딸이 티브이에서 박광수 작가가 나오는 걸 보고 누구냐고 묻길래 이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에는 99년 그날 함께 만화가 박광수 씨를 만나 웃었던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아마 우리는 그날 누군가를 웃게 해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았다. 작가에겐 쉽지 않은 직업인 듯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을 아련히 웃게 만드는 일이 의미 있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 내 기억에 박광수 작가의 사생활에 대한 논란으로 잠시 우리는 실망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친구와 이런저런 우리의 이십 대 말의 기억을 두고서 이야기를 나누다 현실로 돌아오니 그때와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인 듯 다른 세상으로 느껴진다. 99년도에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민과 힘든 점들이 있었을 텐데 그저 가볍고 발랄했던 그 마음만을 기억하다니 기억의 왜곡일 수도 있겠다. 현실의 나는 그때처럼 일상에 충실할 뿐이며 그때그때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있지만 또 없는 듯 털어내기도 하며 최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이 지나면 지금의 2021년을 또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이빨을 흔들며 말할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사진을 보고서 그때의 우리가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그리고 지금까지 불평불만 속에서도 함께 기억을 공유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광수 씨가 싸인 속에서 응원해 주었듯이 느을 건강하고 똥두 잘 싸고 매일매일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니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그 전자는 확실하니 다행이다.)
인생은 찰나라고들 한다. 그만큼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찰나에 집중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순간 충실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먼 훗날 작은 계기로 딱 머릿속에 떠오를 때 그 순간이 비록 기억의 왜곡일지라도 따뜻한 기억으로 흐뭇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십 년 후 떠올릴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면 나는 오늘 무얼 하면 좋을까!